96. 온천만들기(2)
터전이 넓어지며 능력이 강해질수록 케레스의 농기구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진다. 노움과 움을 위해 조종석의 크기를 줄인 게 대표적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편해졌지. 움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크기를 넘어 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김서준은 그 능력으로 각각의 중장비를 경량화시켰다.
-쿵. 쿵. 쿵.
덕분에 내려앉은 10여 대의 중장비들은 지하에 있는 물에 큰 자극 없이 가볍게 땅에 가라앉았다. 엘린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건 크기가 작네요? 평소 보던 것보다 반은 더 작은 거 같은데요? 잘 만든 모형 같아요.”
“너무 크면 이런 지형에서 쓰기 힘드니까요.”
크기도 마음대로 하면서, 성능은 더 좋아진 것도 이번에 성장한 여파. 하지만, 노움이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자동으로 움직인다움!”
노움의 말대로였다. 하나하나의 트랙터와 굴착기는 내려앉자마자 주변 나무와 풀을 밀어내며 터를 다지기 시작했다.
“완전 신기하다움! 역시 우리 신농님 대단하다움!!”
“맞고-블!”
“멍멍!”
김서준 역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게 될 줄이야.’
마치 인공지능이라도 탑재된 거 마냥, 김서준의 명령을 읽고 알아서 작업을 처리하기 시작하는 트랙터와 굴착기. 작업이 조금 거칠고 투박해서 세밀한 작업은 어렵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도 충분했다.
“하지만 아쉽다움···. 노움도 운전하고 싶다움···.”
노움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김서준이 웃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 노움 것도 있으니까.”
김서준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황금빛이 다시 한번 모여들기 시작했다.
-팟.
빛무리가 사방으로 사라지고 소형차만 한 크기의 트랙터 한 대가 나타났다.
“와···.”
엘린이 감탄을 터뜨렸다.
“멋지고-블.”
“멍멍!”
고블과 리노도 눈을 휘 동그랗게 뜨고 트랙터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노움은 감격에 빠져 눈물을 글썽거렸다. 김서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기존의 황금색 포크레인이지만, 조종석에는 귀여운 눈과 입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포인트.
“모, 모자 설마···.”
“맞아. 노움이 쓰고 있는 그 모자를 본떠서 만들어봤어.”
조정석 위로 초록색 모자 장식이 붙어있었다. 최근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타오에 나오는 캐릭터가 초록색 모자를 쓰고 있는 느낌. 김서준이 노움을 떠올리며 직접 생각한 디자인이었다.
“앞으로 이걸 노움 전용 포크레인으로 하려고. 어때 맘에 들어?”
“너, 너무 마음에 듭니다움!”
감격에 벅차 겨우 말을 뱉은 노움은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짧은 다리의 한쪽을 꿇고 말했다.
“이 노움. 신농 님께 평생 충성을 맹세 하겠습니다움!”
노움이 땅으로 내려앉아 소리쳤다.
‘노움 답네.’
조카 같은 녀석이 저러고 있는 모습이 한결 더 귀엽다. 김서준은 노움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 빨리 타볼까?”
“움!”
“운전석 뒤에 좌석도 있으니까 리노랑 고블도 탈 수 있어. 물론 노움이 허락해줘야 하겠지만.”
김서준이 씽끗 웃었다.
그러자 리노와 고블이 노움에게 달라붙어 말했다.
“노움 공, 한 번만 태워 달라는 고-블!”
“멍멍!”
노움은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전우들의 명을 거절할 수는 없다움! 좋다움! 다들 타라움!”
그렇게 쪼르르 포크레인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흐뭇하게 그 뒷모습을 보는 데 엘린이 다가왔다.
“??”
김서준이 의아한 눈으로 엘린을 바라봤다.
그러자 엘린이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서준 씨, 저도 한번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일부러 엘린을 데리고 한 바퀴 시 운전을 마친 김서준은 작업현장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여기가 좋겠네.’
작업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포크레인들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뽑아 올려 옮기고 있었다.
그러면 트랙터가 그 흔적을 지우고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이 곧장 이어졌다.
‘잘하고 있네.’
김서준은 혹여나 명령 수행을 잘못하거나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데 주력했다.
“...일단 주변의 터를 다지는 작업 중인데요. 저거 보세요. 보이시나요? 아까 소환한 트랙터가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엘린은 옆에서 촬영하며 브이 로그 영상에 사용한 대사를 따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원래도 영상 촬영할 때면 엘린은 보기 드문 텐션을 보여줬다.
‘아니, 트랙터가 너무 재밌어서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김서준은 엘린이 내리자마자 나중에 자기도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구구구.
갑작스러운 소리에 김서준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나무 한 그루가 뽑히지 않고 김서준의 포크레인과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 포크레인은 억지로라도 뽑아 버리겠다는 듯 출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상한데?’
김서준은 황급히 그런 포크레인의 동작을 멈췄다.
크기는 작지만, 하나하나가 억대를 호가하는 중장비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게 김서준이 소환한 중장비가 아니던가.
‘그런 포크레인이 못 밀다니.’
김서준이 황급히 머릿속으로 고블을 찾았다.
[무슨 일인 고-블!]
[저 나무 안 뽑히는 데, 무슨 문제 있는 거야?]
[...앗!]
머릿속에 고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고-블! 저 나무가 주변 마나를 물로 보내주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고-블! 저 나무는 뽑으면 안 되는 고-블!]
김서준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리 온천을 만든다 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돼.’
자연이 만든 성지이기에, 자연을 더 세밀히 살필 필요가 있었다.
[고블, 신난 건 이해하지만, 지속적으로 이런 형상을 살피고 보고해줘.]
[죄송하고-블. 알겠고-블.]
고블이 노느라 정신이 팔린 대에 대한 사과를 보내왔다. 김서준은 흔쾌히 용서하고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오늘 작업은 터를 잡는 작업이었다.
‘온천을 지으려면 먼저 땅 정비부터 해야겠지.’
노천 온천 부지와 씻고 묵을 수 있는 건물이 들어갈 정도의 부지를 만들 셈이었다. 김서준은 고블과 공조를 통해 건드리면 안 되는 나무를 제외하곤 옆으로 옮겨 심었다.
그렇게 땅을 조금씩 넓히며 충분한 땅을 확보하고, 다시 그 땅을 평평하게 만들면 끝. 십여 대의 중장비와 노움은 그 일을 충실히 잘 해내고 있었다.
‘좋아 이 속도면 오늘 하루면 충분히 작업은 끝나겠어.’
작업현장 위로 멋지게 만들어질 온천을 떠올리니 벌써 설렜다. 그러다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하나 스쳤다.
‘잠깐만. 어차피 노천 온천이면, 굳이 그 옆에 나무가 전부 관상용일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보는 것만으로도 온천욕과 동시에 맑은 공기와 산림욕까지 할 수 있으니 의미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기왕이면 옆에 있는 나무나 식물이 어떤 효과가 있으면 더 좋으면 좋지 않나?’
김서준은 새로 얻은 스킬, 신농의 재능을 떠올렸다. 키운 작물에 특별한 효과를 부여하는 이 스킬은 모두 먹어야만 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쥴처럼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특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온천이라면, 마침 잘 어울리는 게 있겠어.’
김서준은 씩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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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슬슬 철수 준비하자고.”
헌터들은 하나씩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오늘 던전 토벌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남은 건 보스가 있는 보스 룸뿐.
“에픽 길드, 모두 철수한다!”
“황룡 길드, 오늘 훈련은 끝났다. 모두 밖으로 나간다.”
오늘 보스 룸을 담당한 길드는 ‘청룡 길드’였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길드는 일찍부터 퇴근을 준비하는 게 당연했다.
“안 가나?”
길드원들을 이끌고 나가려는 권왕 강백호가 에픽 길드의 마스터 정현민을 보고 물었다. 셔츠와 슬랙스로 마치 사무라도 보러 나온 것 같은 복장의 정현민은 고개를 저었다.
“묘하게 불안해서요. 저만 남아서 보고 가려고요.”
“흠···.”
잠시 낮게 신음한 강백호가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먼저 나가라. 나도 좀 이따 나가지.”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부 길드장이 황룡 길드원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현민이 의아하다는 듯 강백호를 바라봤다.
“권왕님이 무엇하러···.”
“어린 년놈들이 혹시 나 몰래 수작이라도 부릴까 걱정돼서 말이지. 내가 이렇게 직접 남아서 지켜볼 거니까 꿍꿍이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말게!”
권왕은 꼬장꼬장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정현민은 노장의 속내를 알고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흠! 감사는 무슨. 감시하니까. 감시.”
길드원들을 미리 철군시킨 두 사람은 청룡 길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휴식 충분히 취할 거니까,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요. 포션 필요한 사람 이야기하시고요!”
저 멀리 전소민이 길드원을 챙기는 게 보였다. 전소민은 가냘프고 우아하면서도 착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길드원들을 혹독하게 다뤘다.
덕분에 길드원 중 전소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과연 저런 상태로 보스 몬스터랑 싸울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저게 맞지. 저렇게 강하게 굴려야 조금이라도 더 훈련될 테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 훈련은 곧 생존율과 직결되지 않는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길드원이 이번 임무에서 살아남길, 아니 단 한 명도 이번 임무에서 죽지 않길 바라는 전소민의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부하들 다 잡겠군. 껄껄.”
권왕이 웃으며 말했다.
“아, 권왕님.”
강백호의 목소리에 전소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저희끼리 해도 되는데, 여긴 무엇하러···.”
“저희를 감시하러 오셨답니다.”
정현민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땀방울이 맺힌 전소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청룡 길드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에픽 길드가 함께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헌터 계의 신사니 뭐니해도 이놈만큼 속이 복잡한 녀석이 또 없으니까.”
“어르신. 오해입니다. 저희 에픽 길드는 선의로···.”
“퍽이나.”
“소민 님. 절대 저 말에 저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전소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뒤에서 쉬던 헌터들 사이에도 미소가 번졌다. 국내 최강이라는 헌터들이 주고받는 농담과 인간적인 모습은 언제 봐도 기묘한 장면이었다.
“그나저나 30명 전원이 다 들어갈 필요가 있나? 제일 잘 싸우는 녀석으로 10명만가서 빠르게 처리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맞아요. 이렇게 많이 들어가면 훈련도 잘 안 될 텐데.”
정현민이 물었다.
북한에 가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몬스터를 제압하고 땅을 차지하는 게 중요했다. 이런 식의 대규모 레이드를 연습할 이유가 없었다.
“6명씩 5개 조로 모두가 한 번씩 경험하게 할 겁니다. 경험은 많으면 많은 수록 좋으니까요.”
“아, 그런 식으로···.”
“좋은 생각이야. 하나라도 경험을 더 쌓아보는 건 중요하지. 영리한 블랙 바질리스크라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물론, 경험치 얻으려다 죽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말이야. 나도 그랬고.”
강백호의 말에 헌터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니까 생각 잘 해. 애꿎은 길드원 사지로 몰지 말고.”
강백호의 말에 전소민은 내심 감사한 미소를 띄웠다.
‘진짜 어르신의 배려는 대단하다니까.’
S급 던전이지만 토벌은 순조로웠다. 다들 블랙 바질리스크가 강하고 머리가 좋아 위험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경각심이 크게 새겨지지 않았을 수 있었다.
S급의 경고는 그런 그들에게 경각심을 새기기 충분했다.
잠시 후, 휴식을 마친 청룡 길드원들이 일어났다. 전소민은 그들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오늘 훈련에 참여하지 않으실 분 있으십니까?”
“....”
“그럼 들어가죠.”
전소민은 보스 룸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환한 빛이 문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전소민은 그 빛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 이건?”
전소민의 뒤로 헌터들이 따라 들어왔다. 헌터들은 밀림을 연상시키는 광경에 탄성을 뱉었다.
그런데,
“왜 신전이 아니야? 블랙 바질리스크 룸은 신전의 모습이어야 되는 거 아니었나?”
“맞습니다. 근데 여기는 숲···.”
마지막으로 들어온 권왕과 정현민의 목소리에 낭패감이 짙게 배 있었다.
“불안하더니. 이거였나?”
전소민은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던전이 변형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