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온천만들기(1)
“흠···.”
트레스는 물이 흐르는 돌 주변을 면밀하게 살폈다.
“경사도도 그렇지만, 땅이 거대한 바위가 많아서 그거 먼저 처리해야겠소. 망치의 술을 못 쓰는 게 아쉽군. 클클클.”
트레스가 고생하라며 김서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게, 좀 아쉽네.’
드워프의 망치의 술은 토목공사에서는 최고였다. 순식간에 구조물을 지을 수도 있을뿐더러 땅을 다지는 것도 가능했다.
‘집과 양조장, 가온 길까지 모두 성공적이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엘린은 절대 마법으로 지반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망치의 술은 결국, 마나라는 매개체로 땅을 직접 자극하는 일. 여기서 발생한 마나가 땅이 가진 마나를 자극하면 자칫 물과 마나 사이의 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는 거다.
“라이너스 대륙도 무리해서 마법으로 효과를 강화한다던가, 무언가 변형을 가하는 바람에 많은 성지를 잃어야 했어요.”
씁쓸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엘린을 보며 김서준은 망치의 술이나, 엘린의 마법진은 절대 이용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마법이 없어도 못 만들건 아니니까.’
트레스의 우수한 설계.
노움, 움 그리고 우노와 도스까지 우수한 인력까지 있으니 사실 마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도 넉넉하고.’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지는 어때요?”
“땅 상태는 매우 좋소. 평탄화 작업과 나무만 제거하면 바로 작업하면 되오. 물론, 인간 세계의 위대한 피조물인 고층 빌딩은 어렵겠지만 말이오.”
트레스는 고층 빌딩에 빠져있었다. 드워프가 온 벨리르 대륙에서 높은 곳을 내려다보는 건축물은 성뿐이었다.
‘무수한 노력이 쌓이고 쌓일 뿐 아니라 엄청난 규모로만 지을 수 있는 성의 한계를 극복한 게 신기하다고 했지.’
그래서일까.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온천을 초고층 빌딩으로 세울 계획이었나보다.
“고층 빌딩은 처음부터 생각도 안 한 걸요?”
“그런가? 아쉽군. 하지만 인간으로서 인간이 세운 위대한 산물을 그대의 터전에 하나 정도는 세워야 하지 않겠나?”
“고민해볼게요.”
김서준은 웃으며 대답한 뒤, 트레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엄청나게 큰 대형 온천을 만들건 아닙니다.”
성지인 만큼 대단한 온천이겠지만, 최근 유행하는 워터파크 형 스파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주변 경관이 너무 아까워.’
주변의 나무들이 정돈되지 않고 마구 자란 거처럼 보이지만, 잡초 제거와 가지만 조금 치면 아름다운 풍경이 될 성싶었다.
‘산림욕과 온천욕을 함께 할 수 있게 만들면 엄청난 시너지가 생길 거야.’
자연경관과 소리, 그 안에 자연의 기운을 받고 몸은 따뜻한 물속에서 노곤하게 풀어지고, 끝내 활력이 넘치는 상태가 되는 기분.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러려면 노천으로 만들어야겠죠.”
“노천탕이라. 좋소. 지대가 낮은 것도 아니니 뒤로는 숲이 앞으로는 마을의 경관이 보이게 하면 좋겠군.”
“네. 여기에 별채를 지어서 온천욕 후, 잘 수 있도록 할거고요.”
“그러면 담장도 나무로 하는 게 좋겠군.”
“대나무를 이용하는 게 좋겠죠?”
트레스는 현실적인 설계를 김서준은 컨셉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냈다. 서로의 피드백도 소통도 원활했다.
“여기는 이렇게···.”
“그러면 두께를 3m 정도는 해야겠군.”
덕분에 두 사람의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은 급물살을 탔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금산온천의 첫 번째 설계 컨셉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
이제 막 토벌을 마친 던전 앞.
여기저기 지어놓은 임시 막사 앞에 헌터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쉽지 않네.”
“그래도 해야지. 훈련을 할 수 있을 때 좀 더 해두는 게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올리는 길이니까.”
“새끼, 말하는 거 보면 죽으러 가는 거 같네.”
“너무 심각했나? 하하하.”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은 식사와 함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방금 막 토벌을 마쳤지만, 헌터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바이올렛 호퍼 이후로 올라간 위세와 유명세, 거기에 알게 모르게 강해진 팀웍과 눈에 띄는 훈련 성과 덕이었다.
“다들 열심히 잘 해줘서 고맙네요.”
전소민이 모두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에픽 길드의 마스터 정현민이 대답했다.
“지난번 사건으로 다들 헌터라는 일의 긍지와 명예를 깨달은 덕분이죠. 그건 돈과는 또 다른 성취감이니까요.”
“맞아요. 정말 다르죠. 이게 많은 헌터들이 변하는 계기가 되면 좋을 텐데요.”
“흠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뒤에 서 있던 백발의 노인이 헛기침을 뱉었다.
“젊은 남녀가 그러고 있으니 보기 좋군. 하지만 한 길드의 장으로서 대화에 좀 끼려는 데 괜찮겠나?”
두 사람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황룡 길드의 대담한 선택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전소민이 웃으며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뭘 대단하다고. 지난번과는 달리 북한 토벌은 이득도 크고 얻을 게 많아서 참여한 거야.”
“그래도 황룡 길드와 어르신의 참여는 많은 헌터들의 귀감이 될 겁니다. 덕분에 더 많은 헌터들이 이번 토벌에 참여할 거 구요.”
전소민은 정현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 길드의 장이자, 가장 나이가 많은 헌터, 동시에 가장 오래된 헌터인 권왕, 강백호. 이미 노년에 들었음에도 여전히 6위의 순위를 유지하고 있는 백전노장의 참전은 이미 큰 화제였다.
‘다른 헌터들보다 몸을 사리는 편이었으니까.’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노년에 그는 안정적이고 수지타산에 맞춰 움직였다. 그랬던 그가 돌연 북한 토벌에 참전했으니, 모두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내가 참전했으니, 떡고물이라도 챙겨갈 겸 오는 어중이떠중이도 많을 거야. 그런 녀석이 많을수록 성공확률은 떨어질 거고. 관리 잘 해.”
“명심하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가벼운 대화를 마친 세 사람은 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헌터에 훈련이라는 건 별다를 게 없었다.
‘던전 돌고, 게이트를 처리하고 간간이 나타나는 몬스터를 토벌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같지.’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그 강도였다. 가장 높은 등급의 던전은 S급 헌터에게도 위험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던전 내 몬스터가 나오지 않도록 관리만 하며 현상 유지에 집중했다.
그러나 훈련 기간에는 다르다. 무리해서 내부 토벌을 진행했다. 극한까지 사람을 몰아붙이고 강해지게 만드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이번 던전 역시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S급 던전이었다.
소위 뱀굴이라 불리는 던전이었는데, 각양각색의 뱀 유형 몬스터가 던전 안에 서식하고 있었다.
‘약삭빠르고 한 마리 한 마리 따로 돌아다녀서 팀웍을 기르기 좋은 몬스터야.’
전소민은 이번 훈련을 몹시 맘에 들었다. 역시 김서준의 오른팔이라 불렸던 한 비서답게 아주 좋은 훈련 코스를 설계했다.
“오늘은 누가 블랙 바질리스크를 잡을 텐가.”
강백호가 물었다.
뱀굴의 보스 바질리스크는 3일에 한 번씩 다시 나타났다. 지난번 바질리스크는 황룡 길드가 처리했다. 그 전은 에픽 길드가 했으니 이번에는 청룡 길드의 차례였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 토벌은 청룡 길드가 하는 거로 하지.”
그때였다.
“잠시만요.”
정현민이 말했다.
“이번에도 저희가 한 번 더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음? 한 번 더 하겠다고? 무엇하러? 좋은 아이템을 주는 것도 아닌데.”
“어, 그건···.”
정현민은 어려서부터 감(感)이 좋았다. 바이올렛 호퍼에서 청룡 길드를 도운 것의 반절은 감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 보스 처리. 뭔가 감이 안 좋아.’
그러나 저 투지에 불타는 여인을 감이 안 좋다는 말로 만류하기는 택도 없어 보였다.
“그냥 저희가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도 꽤 세거든요.”
그래, 이미 수차례 잡은 보스. 별일이야 있겠어. 정현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불안한 마음을 외면했다.
****
“공사다움! 온천이다움!”
“멍! 멍!”
“고-블! 고-블!”
김서준을 따라 온천 공사에 나온 셋은 기분이 좋았다. 노움은 간만에 중장비를 탈 수 있어서 좋았고, 리노는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고블은···.
“기분 좋은 물을 또 마실 수 있겠고-블!”
지극히 물의 정령다운 이유였다. 김서준은 씩 웃었다. 저렇게 세 친구가 귀엽게 걷고 있으니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찰칵.
셔터 소리가 들렸다.
“너무 귀여워서 그만···.”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은 엘린이 혀를 빼꼼 내밀었다.
“아녜요. 그럴만하죠. 진짜 귀엽네요. 저렇게 셋이 같이 있으니.”
“그러니까요. 다들 정말 앙증맞다니까요.”
엘린이 배시시 웃었다.
‘진짜 요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밝아졌네.’
너튜브에서 엘린은 연일 화제였다. 영상 너머로 엘린의 좋은 기운이 전달된 건지, 댓글도 선플 만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엘린은 이전보다 더 활짝 웃는 일이 많아졌다.
“근데 오늘 영상 찍는데 레깅스를 입었네요? 어제 드라마에서 레깅스 나왔어요?”
“아뇨. 댓글에 레깅스 한번 입어달라는 말이 많아서 한번 입어 봤어요. 어때요?”
엘린이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았다. 김서준은 볼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슬며시 눈을 피했다.
“예, 예쁘네요. 하하···.”
“다행이네요.”
“빨리 오시라움! 뭐하냐움!”
어느새 저 멀리 앞서가던 노움이 두 사람을 불렀다. 둘은 웃으며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이름 없는 야산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할 일은 오솔길을 만드는 일이었다. 손님은 물론, 공사를 위해 김서준과 일행들이 다닐 길이 필요했다.
‘어려울 건 없지.’
노움과 엘린은 마법으로 쌓여있는 낙엽과 죽은 나뭇가지를 길 밖으로 밀어냈다.
‘케레스의 농기구, 낫!’
김서준도 낫을 소환해 잡초를 제거하며 길을 만들었다. 황금빛 낫은 막힘없이 깔끔하게 잡초를 밀어냈다.
“고-블!”
“멍!”
고블과 리노는 잘라낸 잡초를 밖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그들은 빠르게 산속에 길을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서 사람의 흔적을 입혀 길을 굳히고 주변 나무는 나중에 정리하면 되겠지.’
트랙터로 땅을 갈아엎고 나무를 전부 뽑는 건 어려운 일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아예 사람이 만들 길과 자연 속에 사람의 자취를 묻힌 길은 다르다.
‘그 두 길이 주는 자연의 정취 또한 완전히 다르고.’
그래서 조금 번거롭지만, 천천히 매일, 이 작업을 반복할 계획이었다.
“오랜만에 몸을 쓰니 재밌고-블.”
“멍멍!”
“맞고-블. 나도 아침 산책을 해야겠고-블.”
“좋은 생각이다움!”
아이들도 이 일을 꽤 재밌어했다. 다행이었다.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면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 됐으리라.
“거의 다 왔으니까 엘린은 이제 촬영해주세요.”
“네.”
온천을 만드는 그것만큼 홍보도 중요했다. 그래서 김서준은 한 번 더 엘스가든의 힘을 이용하기로 했다.
‘만드는 과정을 너튜브에 다 올리는 거지.’
최근에는 이런 류의 영상을 보는 사람도 많았기에 충분히 좋은 홍보수단으로 보였다.
‘우리 추억도 남길 수 있고.’
훗날 이 시절의 영상을 보면 다 같이 이때를 추억할 수 있어 좋을 듯했다. 엘린은 작업에서 조금 더 뒤로 물러나 셀카봉에 휴대폰을 꽂았다.
“안녕하세요. 엘스가든의 엘린입니다. 오늘은 금산마을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을 찍으려고 하는데요···.”
김서준이 능숙하게 녹화를 시작하는 엘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튜브를 하는 엘프라니.’
어디 웹 소설에나 나올 법한 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자니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서 대나무 숲에 들어가 ‘엘린은 엘프예요!’라고 소리치는 상상이 떠올랐다.
“풋.”
김서준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자 엘린이 살짝 눈을 흘겼다. 눈빛을 본 김서준이 뻘쭘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와, 진짜 물이 나오네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노움이랑 리노도.”
“알겠다움!”
돌 틈 사이에서 여지없이 온천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쪼르르 흘러나오는 가녀린 물줄기 위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고블은 대뜸 그 물에 손가락을 찍었다.
“뜨겁다움!”
“괜찮고-블! 물은 나를 해치지 않는 고-블.”
고블은 그렇게 말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참 좋은 물이고-블···.”
금세 녹아내릴 거 같은 표정을 짓는 고블. 그런 고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김서준이 말했다.
“고블. 오늘은 고블의 역할은 중요해. 알지?”
“물론이고-블! 공사가 물에 영향을 끼치지 않게 잘 보겠고블.”
고블의 표정이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오며 대답했다. 김서준은 환한 미소로 고블의 말에 대답했다.
“자, 그럼 시작할까?”
“좋다움!”
“멍멍!!”
김서준은 모두가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번에 강해지면서 소환이 더 정밀해졌지. 한번 해볼까.’
그리고 손을 들고 외쳤다.
“소환.”
-쿵. 쿵. 쿵. 쿵.
순간 하늘에서 황금색 굴착기와 트랙터가 쏟아졌다.
“저, 저건...”
노움이 놀라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