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93화 (93/139)

93. 도약

“와, 이거 대박이네.”

작은 스마트폰 속 화면을 보던 남자가 감탄을 터뜨렸다. 황금색 드론과 하얀 새가 함께하는 에어쇼를 펼친 후 이어지는 물뿌리기. 양떼 목장에서 벌어지는 양과 곰의 추격전. 황금빛 트랙터와 굴착기가 펼치는 모터쇼.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쇼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황금 트랙터는 운이 좋으면 시승도 할 수 있는데요. 오늘은 제가 한번 타볼게요.]

최근 아름다운 외모로 가상 너튜버가 아니냐는 얘기가 도는 엘린의 채널에서 이 모든 쇼가 아주 자세히 중계되고 있었다. 남자는 그 화려한 쇼와 엘린의 아름다운 외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 전 부길드장님 수완은 엄청나네요. 어떻게 그 작은 마을을 이렇게까지 만드셨는지. 안 그렇습니까, 길드장님.”

한 비서가 전소민에게 물었다.

“서준이야, 워낙 잘하죠. 항상 잘 지내고 잘 하더라고요.”

통상적인 대답. 그런데 말투가 미묘하게 이상하다.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느낌.

[승차감이 엄청 좋네요. 트랙터라서 쿵쿵거릴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이 차창으로 보는 풍경도 밖에서 보는 거랑 무언가 다른 느낌이네요. 신기하다!]

그러다 너튜브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에 한 비서가 아차 했다. 한 비서는 다급하게 너튜브 영상을 껐다.

“그래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닐 겁니다. 다 나름대로 힘든 점이 있겠죠. 그런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으실는지···.”

“거기 친구 많아요. 새로 사귄 동료도 많고···.”

전소민은 그렇게 말하며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렇게 대답한 전소민은 커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이라···.’

정 회장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 일이 아니더라도 연락 한 번 해보세요. 주변에 여자도 많던데 그렇게 미적거리다 뺏겨요?’

전소민은 알고 있었다. 김서준이 원래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걸.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도 좋았으니까. 요리도 잘하고.’

그런데 김서준이 길드에 있을 때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늘처럼 김서준이 내일도 옆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귄다거나 그런 차원을 넘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어. 의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는 걸···.’

그런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이 한 짓을 돌이켜보니 끔찍했다. 그런데도 IW 그룹과의 주선부터 이번 사태까지. 김서준은 계속 자신을 친구로서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너무 고맙고 미안해. 근데···.’

근데 또 영상에 나온 여자, 직접 보고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던 여자인 엘린을 보고 질투를 하고 있었다.

어찌 질투할 수 있을까. 역시 누군가 말했듯 나는 그냥 가식적인 사람일 뿐인 걸까.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자조감이 들면서도 불쑥 김서준이 보고 싶었다.

“큰일을 앞두고 고민이 많으신가 보군요. 정 걱정되면 김서준 이사님께 한번 전화를 해보시는 게···.”

“아니에요.”

이 마음이 떳떳해지려면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김서준과 했던 약속. 그 약속을 지금과 같은 김서준에게 의지해서가 아닌 스스로 해낼 필요가 있었다.

‘회장님 말대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제 업보겠죠.’

전소민은 신 비서에게 말했다.

“연락은 이번 북한 토벌이 끝나고 할 겁니다. 자, 그럼 어떻게 토벌 준비할지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전소민의 눈은 굳은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확고한 결심이 선 눈빛. 신비서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 눈빛이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

은발의 귀인은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한 손만 천천히 움직였다. 김서준은 전력으로 손과 다리를 흔들었지만, 그저 소매만 겨우 스칠 뿐이었다.

[신농님의 힘은 땅에서 시작됩니다. 좀 더 땅을 느끼고 그 힘을 끌어오세요.]

도리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이어진 명상 속에 김서준도 어렴풋이 땅에서부터 어떤 기운을 느끼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내 힘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르겠어. 몸 안으로 들어온 기운은 통 느낄 수가 없으니까.’

헌터의 방식은 일종의 코딩과 같았다. 예를 들면 ‘눈으로 마력을 모은다.’라는 명령을 몸 안에 내린다고 치자. 그럼 몸이 자연스럽게 그 행동을 하는 방식인 거다. 스스로가 그 마력을 느끼고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즉, 마나를 느끼는 건 스킬을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라는 것.

‘도리의 말을 이해는 하지만 실천하는 건 역시 불가능해.’

김서준은 발바닥 위로는 느껴지지 않는 땅의 기운을 느끼며 표정을 구겼다. 동시에 날리는 주먹은 역시나 허공을 갈랐다.

“흡.”

도리의 입에서 짧은 기합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도리의 손바닥이 김서준의 가슴을 후려쳤다.

“컥.”

김서준의 몸이 공중을 날아 저 멀리 떨어졌다. 몸의 힘이 전부 빠져버렸다. 완전히 지쳐 버린 김서준은 몸에 힘을 풀었다.

“후···.”

김서준은 그대로 대자로 뻗어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하늘을 보며 김서준이 말했다.

“어렵네. 역시 강해지는 건 어려워.”

푸념하듯 이야기하는 김서준에게 도리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하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수련을 이어가면 정진이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 수련은 그만하고 실험을 해보시죠.]

도리의 말에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겨우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련을 바라보는 금발 머리에 엘프가 보였다.

“끝인가요?”

“네. 완전히 탈진입니다. 이제 실험해보죠.”

“네. 받으세요.”

엘린이 김서준에게 빨간 액체가 든 유리병을 던졌다. 김서준은 병의 주둥이를 낚아챘다. 안에 든 붉은 액체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우노는 먹자마자 효과 봤다고 해요. 마시면 바로 효과 오실 거예요.”

“폭주하진 않겠죠?”

“우노도 폭주를 안 했는데 더 차분한 서준 씨가 그러실까. 그리고 폭주해도 어차피 도리 님에는 안 될걸요?”

김서준은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도리를 바라봤다.

‘하긴, 도리를 내가 어떻게 이기겠어.’

김서준은 코르크 마개를 열고 과감하게 액체를 들이켰다. 미트루트 특유의 살짝 비릿한 맛과 텁텁한 맛이 올라왔지만, 생 미트루트처럼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차가운 액체는 목을 넘어 위까지 타고 내려갔다. 이내 몸 안이 살짝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어때요?”

“잠시만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몸이 살짝 뜨거운 거 말고는···. 어?”

순간 근육이 꿈틀했다. 이내 여기저기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켰다. 일순간의 경련은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이럴 수가!”

김서준이 놀라움의 탄성을 터뜨렸다. 순간 밥을 먹은 것처럼 속이 든든해지고 온몸에 활력이 돋았다. 방금까지는 힘이 풀려있던 팔다리도 멀쩡히 움직였다.

“대단한데요?”

아니 평소보다 몸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김서준은 가볍게 앞으로 주먹과 발을 뻗었다. 확실했다.

“속도가 더 빨라졌어요?”

“맞아요. 체력을 회복시키고 상처 회복은 물론, 대략 10분 정도 몸의 기능도 강해져요. 머리는 어때요?”

김서준은 그제야 미트루트의 부작용을 떠올렸다. 그만큼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정신이 더 말끔해진 기분이었다.

“아주 좋아요. 부작용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요.”

“다행이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둘이 한번 다시 대련해볼래요?”

엘린이 물었다.

“좋아요. 전투 중에도 흥분하거나 폭주하지 않는지. 이것만 확인하면 끝인 거죠?”

“네. 맞아요.”

“도리, 괜찮지?”

도리는 가볍게 목을 끄덕였다. 은발의 머리가 햇빛에 빛나며 함께 흔들렸다. 역시나 이렇게 보면 정말 도사 같다.

“자, 그럼 다시···.”

김서준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이전처럼 한 손만 앞으로 내민 도리에게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으음···.”

김서준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옆을 보니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꽤 잤네.”

온몸이 쑤셨다. 도리와 대련을 너무 열심히 한 탓이었다. 미트루트 포션의 부작용 덕이었다.

‘설마 내가 대련을 재밌어하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었다. 아니, 부작용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고 또 다른 약효랄까.

미트루트 포션을 마신 후 전투에 돌입하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피가 끓는다는 게 그런 느낌이었을까. 이성을 잃거나 상대를 찢어 죽이겠다거나 하는 과격한 감상이 아니었다.

‘재밌었어. 마치 스포츠 경기를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그 모든 상황이 재밌었다. 거기에 탁월해진 신체 능력은 더더욱 전투에 몰입하게 했다.

도리는 그 탓에 김서준의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대련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니 좀 미안하네.’

어쨌든 이로써 미트루트 포션은 대성공이었다. 체력과 상처 회복 효과에 탁월하며 미미하지만, 전투능력 상승까지 가능하니 대성공이었다.

‘발매하면 헌터 계가 뒤집어지겠네.’

이제 첫 단계의 성공이었다. 헌터 계는 좀 더 강해져야 했다. 앞으로 어떤 적이 넘어올지 몰랐다. 그건 이번과 같은 크라이시스 일 수도 있지만, 세계수가 말했던 것처럼 불청객일 수도 있었다.

‘그때 지구를 지키려면 헌터들이 강해져야지.’

포션은 그 첫 단계가 될 터였다.

‘거기에 더불어 터전을 넓히는 도구가 되기도 할 거고.’

미트루트 농사를 지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이제는 토종작물 그뿐만 아니라 특수 작물로서 미트루트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미트루트는 고구마처럼 재배가 쉬운 편에다가 포션 제작용으로 쓰일 테니 보급이 더 쉬울 터였다.

“좋아. 조만간 축하파티를 준비해야겠어.”

김서준은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켰다.

“아으···.”

그러다 몸을 움츠렸다. 과도하게 움직인 몸 여기저기서 근육통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이 부작용까지 엘린에게 전달해야 할 성싶었다.

****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김서준은 홍성필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뒤에는 거창한 이름이 쓰인 현수막이 보였다.

[천산군 토종작물 재배지 특화 계획.]

금천면에 토종작물 보급은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홍성필은 단순히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할 거면 제대로 알리고 홍보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저렇게 거창한 이름과 함께 이런 대대적인 행사가 진행됐다. 덕분에 김서준은 군수뿐 아니라 몇몇 도의원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나저나 투자 한 만큼 제대로 본전을 뽑을 생각인가 보네.’

거창한 프로젝트 이름답게 금천면부터 시작한 토종작물을 천산군의 특산품이자 정체성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거창한 만큼 부담을 줄 수는 있겠지만 상관없지. 어차피 누가 안 시켜도 제대로 해낼 생각이었으니까. 터전 화를 위해.’

오히려 좋았다. 더 두둑한 지원금과 지원 정책이 쏟아질 테니 말이다. 토종작물 보급의 날개를 단 셈이었다.

김서준이 할 일은 토종작물이 제대로 자리 잡게 하기만 하면 됐다.

‘지금처럼 말이야.’

토종작물은 순조롭게 시장에 안착했다. 삼동파와 코끼리 마늘은 연일 매진을 기록했고 노랑 당근은 크기가 작고 색이 예뻐서 양식당 위주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의외는 개구리참외였지.’

개구리참외는 추억을 자극한다는 것 외에는 큰 장점이 없었다. 신농의 땅에서 자란다 한들 일반적인 참외 수준의 당도 밖에는 갖추지 못했다.

‘물론 그 정도만 돼도 상품성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다른 토종작물에 비해 너무 무난했어.’

가격도 일반 참외보다 더 비싼데 생긴 것만 독특하다면 경쟁력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변수를 만든 건 다름 아닌 엘린이었다.

며칠 전 엘린은 소위 ‘라방’이라 불리는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즉석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개구리참외를 먹는 엘린을 보고 사람들은 물었다.

-언니, 멜론 좋아하세요?

-누나, 멜론 좋아하시는구나. 멜론 보내드릴게요!

쏟아지는 채팅에 엘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이건 개구리참외예요. 적당히 단 게 먹기 딱 좋아요. 다이어트에도 좋데요.”

여기서 게임은 끝이었다. 그날로 개구리참외는 연일 매진을 달렸다.

‘인플루언서라는 게 정말 21세기에는 대단하긴 하구나.’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게 분명했다. 빠른 시일 내에 다른 대안을 마련하긴 해야 했다. 개구리참외도 소중한 우리 땅의 작물이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나무라려는 게 아닙니다. 좋은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공유해주세요. 이제 우리는 깐부지 않습니까.”

“하하···.”

김서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유머이면서도 은근한 압박이었다.

“약속 꼭 지켜야 합니다. 3년. 그 안에 하나는 꼭 해주셔야 합니다. 농산물과 ‘관광’ 양쪽에서요.”

홍성필은 관광 쪽에 좀 더 어감을 두었다. 토종작물이야 잘하고 있지만, 관광 쪽에서 움직임이 없는 면에 대한 걱정과 경고를 담은 눈치.

“걱정하지 마세요. 관광도 시작했거든요.”

“벌써요? 무엇을요?”

홍성필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김서준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금천면 물이 아주 좋더군요. 아주 좋은 온천을 만들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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