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군수방문
아리아와의 티타임에서 김서준은 사비오 잎으로 만든 차를 마셨다. 정신을 차분하게 해주고,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사비오.
‘사비오의 효과는 미트루트와 정 반대지.’
사비오가 어떻게 정신을 안정시키는지에 대해서는 김서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비오가 만약, 미트루트의 효과를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진정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그러면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서준은 자신의 이론에 꽤 자신이 있었다. 본인이 직접 그 진정 효과를 느껴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힘들 거 같아요. 찻잎은 약도 포션도 아니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로즈마리나 페퍼민트 차는 분명 집중력에 도움이 된다지만 그 효과가 미비하지 않소?”
“블렌딩 기법이라는 건 사실 포션 제조보다는 음식, 커피나 술을 만들 때 쓰는 기법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사비오 차의 효과를 모르는 두 사람으로서는 타당한 의견이었다.
‘약효를 차로 방지하자는 느낌이겠지.’
그러나 아니었다. 김서준이 맛본 사비오 차의 진정 효과는 어지간한 약제 이상이었다. 아니, 안정제는 사람을 가라앉고 나른하게 하지만, 사비오는 머리를 더 맑고 집중력을 높여줬으니 그 이상이랴.
그러니 김서준은 더욱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한번 믿어보세요. 생각보다 효과가 좋거든요.”
“설마, 사비오 차를 드셔 보신 거예요?”
김서준은 씩 웃으며 말했다.
“신농의 특권이죠.”
“세계수님의 초대를 받았다더니! 거기서 마셨나 보군!”
“맞습니다. 그리고 효과를 직접 경험했죠. 미트루트의 부작용을 경험한 건 아니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일 거예요. 마침 사비오도 많이 컸고요.”
사비오는 이제 묘목이라 부를 만큼의 크기까지 큰 상황. 이파리만 따는 일이라면 크게 부담이 되지 않을 터였다.
“서준 씨가 직접 경험까지 해보고 하는 말이라면···.”
“실험해볼 가치가 충분하오. 한번 미트루트와 블렌딩 해보리라!”
엘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서준은 믿음직스러운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미트루트로 만든 포션이 점점 중요해질 거 같거든요.”
김서준은 도리가 말한 드래곤에 대해 떠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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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이구먼.”
임종철이 새벽부터 몰려드는 트럭을 보며 말했다. 전부 토종작물을 받아 가기 위한 트럭들이었다.
“잘 돼야 할 텐디.”
“잘 될 겁니다.”
옆에 있던 김서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김서준은 토종작물을 소위 밭떼기 형식으로 계약했다. 계약 업체도 엄중하고 면밀히 조사한 선별된 업체와만 계약했다.
‘가격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지.’
김서준은 토종작물을 개량했다. 이건 경쟁 업체가 없다는 이야기. 시장에 자리만 잘 잡는다면 부르는 게 값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작물 경매에 올라가면 어떻게 될까?
‘경쟁 업체들에 주도권이 넘어갈 수 있어.’
농산물 경매는 완벽히 공정한 시스템이라 말할 수 없다. 경매자와 물건을 사는 자 사이에 커넥션은 분명히 존재했고 때때로 이 커넥션이 자기들 마음대로 가격을 휘두를 수 있었다.
‘분명 경쟁 업체에서 대파에 밀린다, 마늘에 밀린다.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로 가격을 후려치겠지.’
당연했다. 토종작물의 종자는 김서준만 가지고 있는 상태. 견제하면 했지, 호의를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가격대가 형성되면 바꾸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럼 IW그룹의 하늘 농원에도 영향이 갈 테고.’
김서준의 작물은 모두 하늘 농원에 납품되고 있었다. 그런데 금산마을의 작물이 가격대가 낮게 설정된다면 김서준의 작물도 가격 경쟁력을 잃을 터.
결국, 강제로 가격을 내리게 될 테고 이건 김서준과 하늘 농원 모두에게 손해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하늘 농원과 같은 유통 업자들과 손을 잡는 게 나을 테지.’
현재 정부는 토종작물을 먹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각종 지원금이 쏟아지고 토종작물 농사가 전국 각지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한 곳은 금산마을과 호산마을 외 아주 소수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래서 김서준과 세계수가 나섰던 게 아닌가.
‘아마 그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우릴 환영할 테지.’
김서준의 예상은 적중했다. 김서준의 작물만큼은 아니지만, 금호 영농조합 아래에서 재배된 작물은 전부 좋은 가격을 보장받았다.
‘마트, 시장, 식당 전부 말이지.’
그리고 오늘 마침내 금산마을의 모든 작물이 시장에 풀리는 날이었다.
“하늘 농원에서 제가 파는 토종작물도 매번 매진입니다. 감자처럼 2주에 한 번 납품하는 데도 말이죠. 분명 다른 분들의 작물도 잘 팔릴 겁니다. 어르신의 작물도요.”
“머리는 아는 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심장이 떨리는구먼.”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이사님 말대로 잘 될 겁니다.”
임종철과 함께 농사를 지은 박보현이 웃으며 거들었다. 그러자 임종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오늘 금천면장하고 최종 협의한다고?”
“네. 토종작물에 대해서 관심이 많더라고요.”
“근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지금 우리 땅 농사도 쉽지 않은 상황이잖여.”
임종철이 지난번 귀농인을 뽑았던 행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농작물 질 유지하려고 면접까지 봤는디, 금천면에서 나오는 작물을 괜찮을지.”
“맞아요. 게다가 거긴 농사를 알려주고 감시할 사람도 없고. 심지어 세계수의 가호나 아쥴도 없고요. 훨씬 힘든 농사일 텐데요···.”
박보현 역시 임종철의 말을 거들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김서준의 작물부터 토종작물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그런데 순간의 조바심이나 욕심으로 자칫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안전장치들을 준비했어요.”
“장치?”
“네. 그리고 모든 장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아마도 이 계약은 무효가 될 겁니다. 물론, 그럴 일은 희박하겠지만요.”
“설마 이 마을이 이렇게까지 컸을 줄이야.”
홍성필은 가까워지는 마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워낙 구석에 있고 인구도 적다 보니, 군수 선거 시절 딱 한 번 방문한 게 전부였던 마을.
그나마도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을 정도로 정말 특색 없는 소멸해가는 마을이었다.
‘거길 군수 4년 차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게다가, 그냥 민심잡기용 방문도 아니었다. 어쩌면 군수 2선을 위한 중요한 변곡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지사님이 말할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대통령이 주목하는 도시가 됐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군수인데. 나보고 오고 가라니 말이야.’
물론 회견과 제안을 먼저 한 건 군수 측이었지만, 설마 바쁘다고 마을로 불러들일 줄은 몰랐다.
“군수님 다 왔습니다.”
그 유명한 거대 트리 앞에 차를 댄 기사가 말했다. 군수는 조심스레 차 밖에 내렸다. 맑고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공기는 엄청 좋네.”
마을은 환하게 웃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농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들 다수가 밭에 있는 것도 보였다.
“관광객도 많고, 체험농원도 활발히 진행 중이고. 보고 받은 그대로긴 하고만. 도 단위에서 밀어주려는 이유는 알겠어.”
군수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도 입장에서는 도 전체의 경제 상황이 중요하다면 군수는 아니었다.
군 단위에서 중요한 건 인구 정책, 쉽게 말해 인구수를 늘리거나 유지하는 일이었다.
‘인구수의 여유가 있는 시들과 달리 군은 마을 소멸을 걱정하는 면들이 수두룩하니까.’
군수들의 공약이 대부분 출산과 관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오죽하면 어느 군에서는 지원금뿐 아니라, 없는 예산을 짜내 한우를 보내주지 않던가.
‘뭐 우리도 산양삼을 보내 주고 있어서 할 말은 없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군수는 관광보다는 토종작물에 관심을 가졌다. 더 많은 농부를 우리 군으로 끌어들이고 농촌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군수님. 이쪽입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던 군수에게 비서관이 말했다. 군수는 비서관을 따라 금호 영농조합의 사무실로 향했다.
“신기하긴 하군.”
처음 보는 형태의 작물들, 마을 전체를 배회하며 농사를 돕는 하얀 새들. 거기에 난쟁이인지 정령인지 모를 생물체들이 농사를 짓고 있으니 어릴 적 동물원에 놀러 온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내심 무엇보다 맘에 드는 건 마을에 분위기였다.
‘다들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관광객은 물론, 전혀 상관없이 농사를 짓는 주민들 역시 모두 희망차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군청 내 모든 직원은 일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중간중간 웃고 있지만, 눈 밑에 다크서클과 간간이 들리는 한숨 소리는 그들의 고충을 여실히 보여주곤 했다.
그뿐일까.
농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지역의 농촌 역시 근심으로 주름이 깊은 분들이 많았다.
“군수님. 저희 마을은 무슨 지원 없나요?”
“개발 계획은 없나요?”
그렇게 묻는 주민도 많았다. 마을의 존립이나 생계의 문제로 불안했기 때문이다. 군수는 그때마다 가식과 거짓으로 애써 대답해야 했다.
‘그런데 여긴 정 반대니까. 왜 도지사님이 여길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겠어.’
물론, 군수에게는 딱 그 정도였다.
그는 도지사와 달랐다. 군수가 하는 일은 외부로 드러나는 성과와 직결된 일에 집중했다. 그에게 군수는 일이고 직책이고 권력을 가질 장치였지, 민의나 대의를 위한 게 절대 아니었다.
“반갑고-블!”
마을을 가로질러 도착한 마을 회관 건물,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파란 피부의 꼬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김서준 신농님의 정령 고블이라고 하는 고-블.”
“정령···?”
비서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정도가 있지. 군수님을 오라고 한 것도 모자라 정령이 마중을 나오는 게 무슨! 얼른 네 주인 나라고 해!”
“고블은 정령이자 비서인고-블. 이 정도도 충분한 예의인고-블. 그리고 서준 님은 지금 전화로 회의중인고-블. 부를 수 없는 고-블.”
파란 인간 모습의 정령은 따박따박 비서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분을 참지 못한 비서관이 경비원을 바라봤다. 헌터 출신의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서려는 데 군수가 손을 들었다.
“됐네. 네가 비서라는 거지. 좋아. 안내해주게.”
이미 이곳까지 불려왔을 때, 이 정도 자존심은 버렸다. 정말 중요한 건 하나.
‘과연 2선을 위한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오늘 그런 계약을 만들 수 있을까.’
모든 문책은 그걸 확인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에 스케줄이 있어서 나가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김서준은 군수를 맞이했다. 60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얼굴과 딱딱한 인상. 듣던 대로 이성적이고 차가워 보였다.
“고블, 커피 두 잔만 내려다 줘.”
“고-블.”
고블은 인사와 함께 커피를 내리러 나갔다. 방안에 덩그러니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김서준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여행 온 거 같고 좋네요. 마을을 정말 잘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왜 그렇게들 금산마을에 직접 가보라고 했는지 알겠더군요.”
“감사합니다.”
홍성필 군수는 의외로 말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딱딱하지만 격의 있는 어조로 그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잠시 후, 고블이 갓 내린 커피 두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그윽한 커피 향이 방안을 채웠다. 짧게 한 모금을 홀짝인 군수가 말했다.
“사실 전 믹스를 좋아하지만, 이것도 꽤 괜찮군요. 이것도 직접 재배한 커피는 아니겠죠?”
“설마요. 캡슐커피고 별다방 겁니다. 하하.”
가벼운 농담과 함께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다시 한번 커피를 홀짝인 후 군수가 말했다.
“그럼 토종작물 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보내드린 자료는 전부 보셨습니까?”
맞은 편에 앉은 홍성필에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마치 전투에 임하는 느낌.
‘좋아. 역시 듣던 대로 합리적이고 사업가 같은 스타일이야. 오히려 이야기가 더 잘 풀리겠어.’
김서준은 웃으며 자료를 꺼냈다.
“물론입니다. 조건은 전부 맘에 들었습니다. 종자를 정부가 지원해서 비싸게 사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금천면 전체를 토종작물 특구로 지정해주시는 부분까지 전부 다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일을 진행하면 되겠군요.”
“하지만 걸리는 게 있습니다. 품질 유지 부분이나, 재배 방식에 대한 부분이죠.”
“그 부분까지 통제하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상품의 차등을 두는 게 좋다고 판단했는데요.”
군수 측의 제안은 일리가 있었다. 김서준의 작품을 최상, 금산마을과 호산마을을 중, 그리고 나머지 지역을 하품으로 두는 방식은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선책도 아니었다.
“그 방법은 자칫 토종작물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만들 수도 있고, 토종작물을 하품으로 키워내면 일반 작물과 비교우위에 설 수도 없으니까요.”
자칫 맛은 우월하지 않는데 가격만 비싼 작물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김서준은 그 점을 경계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있습니다. 마을의 손해가 좀 생기겠지만요.”
김서준은 자신의 해결책을 말하며 덧붙였다.
“대신 금천면에 땅에 있는 개발 권한을 제게 위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