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 날의 진실
김서준은 다시 한번 아리아 옆에 선 존재를 바라봤다. 익히 알던 고블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긴 했다.
‘초록색 피부도 아니고, 괴팍하게 생기지도 않았어.’
얼굴부터 동그란 게 굳이 따지면 귀여운 측에 가까웠다. 하나, 풍기는 분위기, 뾰족한 코와 귀는 얼핏 귀여워 보이는 녀석이 고블린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메시지 창도 그렇게 보여주고 있어.’
파란 머리 위로 뜬 작은 정보창에도 ‘블루 고블린’이라는 종족 명과 그 종족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김서준은 안내창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아리아를 바라봤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아리아가 다급하게 김서준을 보며 소리쳤다.
“잠깐만, 서준! 오해하지 마!”
“뭘 오해한다는 거지?”
“고블린에는 다양한 종족이 있어. 서준이 알고 있는 그 고블린과 고블이는 달라!”
“고블이···.”
아마도 옆에 있는 고블린의 이름인 듯했다. 귀여운 애칭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아리아의 태도로 보아하니, 옆에 있는 고블린 역시 정령들처럼 세계수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면 고블린의 모습을 한 정령인가?”
도리 역시, 토리족이었지만 정령이 되었다. 고블린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충분히 가능했다.
아리아는 김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고블이는 내가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와 상의해서 임명한 물의 정령이야. 원래는 고블린이었지, 지금은 완벽한 물의 정령이지.”
“그렇다 해도 내 원수인 고블린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아.”
김서준이 어느 때보다도 냉정한 눈으로 아리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의 분노는 이해해. 하지만 서준의 분노는 오해야.”
“오해라고? 아까부터 뭐가 자꾸 오해라는 거지?”
“서준이 그랬지. 10년 전, 나를 불태우고 서준의 아버지를 죽인 고블린이 있었다고.”
아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팔이 뻗은 자리 너머로 고목 하나가 나타났다.
“저건?”
어딘가 낯이 익은 고목. 김서준은 그게 세계수의 언덕에 있던 고목 중 하나라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저 아이의 기억을 확인했어.”
“저 아이라면···?”
“그 날의 기억.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
김서준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가능한 거야?”
“서준을 위해 내가 준비한 또 다른 보상이야.”
고블린의 습격으로 집부터, 추억 그리고 아버지의 생까지. 모든 게 불탄 그 날의 기억. 괴롭지만 김서준이 꼭 보고 싶었던 날이었다.
‘도대체 왜, 아버지는 죽었던 걸까.’
신농이 아니었기에 허무하게 죽었던 걸까. 세계수가 아니었기에 숲이 그렇게 불타 버린 걸까. 내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내가 있었다면 구할 수 있었을까?
끊임없는 의문과 자책으로 김서준을 구렁텅이로 빠지게 했던 그 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김서준의 온몸이 떨리는 건 당연했다.
“이걸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무엇을 오해했다고 말하는지.”
“...”
아리아는 김서준을 바라봤다. 그녀는 묘하게 슬픈 눈동자로 김서준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어. 보기 싫다면 중요한 부분만···.”
“아니. 보여줘. 봐야만 하겠어. 전부.”
아리아는 김서준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김서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 순간, 김서준은 의식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키륵!]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붙는다. 바닥에서도 잘 마른 낙엽을 장작 삼아 빠르게 불이 커져만 간다.
[키륵!]
그 가운데에는 고블린 들이 서 있었다. ‘고블’과는 다른 초록색 피부에 뾰족한 인상을 지닌 고블린들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퍼져 달려나갔다.
[키륵!]
무리를 이끄는 이는 고블린 주술사. 그 괴물은 지팡이로 불을 피우는 동시에 밑에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김서준은 이 장면을 위에서 보고 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김서준은 시선을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관없어. 제대로 보기만 하면 되니까.’
시야는 마나를 눈에 모은 것처럼 선명했다. 검게 올라오는 연기 사이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김서준은 그저 보이는 현장에 모습에 집중했다.
[키륵!!]
고블린 주술사가 한 번 더 소리쳤다. 그러자 고블린 들이 벌벌 떨며 행동을 재촉했다.
‘뭐지?’
겁에 질린 듯 돌아다니는 고블린을 보며 김서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수풀 사이에서 5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사람···?’
고블린의 뒤에서 나타난 검은 복장의 사람들. 그들을 본 고블린 주술사가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가···?’
그 모습을 본 김서준은 경악에 질렸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몬스터라니.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고블린이 게이트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는 건가?
경악도 잠시.
-화륵!
거칠게 치솟는 불길에 김서준이 깜짝 놀랐다.
‘아버지!’
소리치고 싶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불기둥이 치솟은 곳은 다름 아닌 김서준의 집이었다.
고블린 주술사와 인간들이 놀라 그곳을 바라본다.
[뭐지? 이 마을에 헌터라도 있었던 건가?]
[모르겠습니다. 사전 조사에서는 모두 농부뿐이라고 했는데···.]
[확인해봐.]
[넵!]
명령을 받은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갔다. 그러자 명령을 내렸던 이는 고블린을 보고 말했다.
[세계수는 아직도 못 찾은 거냐?]
[키륵!]
[그래? 그럼 그리로 가자.]
남자는 고블린의 안내를 받아 불길이 가득한 산을 빠르게 가로질러 세계수의 언덕으로 향했다. 김서준의 시야 역시 함께 움직였다.
[정말이었나?]
김서준의 기억처럼 거대한 자태를 뽐내는 세계수의 나무가 나타났다. 지금의 세계수도 꽤 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이제···.]
[잠깐!]
남자가 세계수에 다가가려는 순간 하늘에서 유성처럼 불덩이 하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 폭발에 휘말려 사람들을 안내한 고블린 주술사는 묵사발이 되어 절명했다.
-화륵!
일순간 큰 불꽃을 일으키며 화기가 사라지고, 불덩이는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아버지!’
김서준이 그리운 이의 얼굴을 보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소리를 무시한 채 말했다.
[세계수는 줄 수 없다.]
김서준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좀 전에 달려나간 이의 사체를 던졌다. 사체는 온몸이 불에 타 까만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받아 갈 생각이 아니었어. 빼앗아 갈 거였지. 처리해.]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이들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흉흉한 기운이 온 사방으로 퍼졌다.
‘기운만 보면 A급 이상이야.’
김서준의 아버지는 양손에 불꽃을 일으켰다. 그 역시 만만치 않은 화력. 김서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헌터였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세계수를 안다는 사실도, 아버지가 헌터라는 사실도. 더군다나 실력만 보면 A급, 아니 S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꽤 하는군.]
뒤에서 장면을 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남자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아버지! 안 돼요!’
김서준이 묘한 낌새를 눈치채곤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는 뱀처럼 스멀스멀 바닥을 기어 아버지의 그림자와 연결되었다.
[이건!]
그 순간 아버지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정체불명의 괴인들이 들고 있던 검 세 자루가 아버지의 몸에 꽂혔다.
[안 돼!]
김서준은 들리지 않는 절규를 내뱉었다. 반면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담대했다.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를 죽인다 한들, 원하는 걸 얻어갈 수는 없을 거다.]
아버지의 온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검을 꽂고 있던 이들은 차마 몸을 빼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였다.
“으악!”
“살려줘!”
그들은 바닥에 몸을 구르고 어떻게들 몸에서 불을 꺼버리려 했지만, 화마는 순식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젠장!]
괴한의 두목으로 보였던 이는 아쉽다는 듯 몸을 돌렸다.
‘가지 마!’
김서준의 온몸을 검게 둘러싼 괴한에게 소리쳤다. 당장 잡아서 원수를 갚고 싶었다. 하나,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힌트라도 얻기 위해 유심히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그 사이, 불은 김서준의 분노처럼 온 사방으로 퍼지며 세계수부터 금수산, 나아가 마을까지 태우고 있었다.
이미 아버지의 몸은 화근(禍根)에서 잿가루가 됐는지 그 형체를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
소리 없는 비명이 공허하게 울렸다. 그리고 김서준은 다시 한번 의식을 잃었다.
“아버지···.”
김서준은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아리아가 김서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아리아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아 냈다.
“미안.”
“아니야.”
김서준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리를 털며 아리아에게 물었다.
“내가 본 게 정말 사실이야?”
“저 아이의 기억을 그대로 보여줬어. 전부 사실이야. 나 역시 저 아이의 기억을 보고 서준에게 ‘고블’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거고.”
“그들은 세계수를 찾아왔어. 그들은 누구지? 왜 아버지는 세계수를 불태운 거지?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째서 세계수를 지키려 하신 거지, 정체까지 숨기시고···.”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내가 본 건 기억뿐이야.”
“아버지에 대해서도?”
“미안해···.”
아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그래, 아리아 역시 자고 있었다고 했지. 아리아의 잘못이 아니야.’
모든 일은 지구, 한국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는 자신이 직접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김서준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고마워. 좋은 선물이었어. 덕분에 그날의 일에 대해 좀 더 마음이 가벼워졌으니까.”
김서준은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아가 숙녀만큼 큰 이후로는 오랜만이었다. 아리아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다행이야.”
“고블도 선물이라고 했지?”
김서준은 옆에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고블린을 보고 말했다. 다행히도 일반 고블린과는 완전히 다른 묘하게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생김새, 그리고 좀 전에 알게 된 진실 덕에 이제는 고블을 하나의 정령으로 볼 수 있었다.
“응. 꼭 도움이 될 거야. 특히 이제 사업을 해야 하는 서준에게는 말이야.”
“사업이라. 그치. 이제 사업을 해야지.”
금산농장과 금호 영농조합을 키우고, 터전을 넓히려면 토종 작물에 감자, 사과 농사, 농장 운영, 양조 등등 할 게 많았다.
“기대할게.”
“기대해도 좋아.”
“그럼 다음에 보는 건 터전이 넓어진 다음인가?”
“아니···.”
아리아가 아쉽다는 듯 고개 숙였다.
“고블이를 부르면서 힘을 많이 소진했어. 아무래도 잠깐 더 자야 할 거 같아.”
정령이 정령계에서 이 세계로 넘어오는 데도 힘이 필요했던 건가. 김서준은 처음 고블을 거부하려 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터전을 넓히면 서준의 힘은 계속 강해질 거야. 나와 아이들도, 그리고 이 세계도 점점 행복해질 거고.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해!”
“알겠어.”
김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김서준은 다시 세계수의 언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음···.”
“신농님!”
“멍!”
김서준이 눈을 뜨자 노움과 리노가 김서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계속 신음하셔서 뭔가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움! 괜찮으십니까움?”
“멍멍!”
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서준을 올려다 보았다. 김서준은 방긋 웃으며 그 귀여운 녀석들을 쓰다듬엇다.
“물론이지. 그리고 새 친구도 생겼고.”
“새 친구입니까움? 그게 누굽니까움!”
“멍!!”
김서준이 웃으며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소환. 고블!”
순간 까랑까랑 한 음성과 함께 파란 고블린이 나타나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고-블! 고블이라고 한다고-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