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아리아의 선물
“설마, 그 자존심 강한 주석이 자존심을 굽힐 줄은 몰랐네요.”
중국의 기자회견을 보던 국장이 놀랍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장면을, 그것도 제 임기 동안 보게 된다니 말이죠.”
허철영 대통령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중국과의 물밑접촉은 끝났다.
막대한 비용은 물론이고, 대중제재의 끝과 함께 한국에는 특별한 관세 혜택을 제공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거기에 무기와 각종 자원 계약까지. 반면 우리가 제공할 건 바이올렛 호퍼의 제거뿐이라니.’
남는 장사도 이런 남는 장사가 없었다. 물밑접촉이라 모든 사항에 대해 발표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매번 주도권을 쥐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제멋대로 굴던 중국과 이런 장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서준 씨 때문에 제가 별 호사를 다 누립니다.”
[이번 사태에 중국의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에 따라, 각국과 협의해 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한국이 넓은 아량을 베풀어 현재 중국 내 진행 중인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실수를 인정한다니.
넓은 아량을 베풀어, 도움을 달라니.
그야말로 상상도 못 했던 장면에 허철영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지율이 얼마나 오르려나.’
이번 사태로 지지율은 연일 고공행진이었다. 취임 4년 차 대통령의 지지율이 60%가 넘었다며 해외에서도 조명할 정도.
그런데 오늘 방송을 보고 있자니, 지지율이 더 오를 듯싶었다.
‘복덩이도 이런 복덩이가 없어.’
김서준은 스스로 가진 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적절한 쇼맨십과 이슈화도 만들었다. 거기에 하오위를 이용한 딜까지 해냈다.
‘밥상 다 차려놓고 나와 관련된 그룹의 숟가락까지 올려주는 센스까지 있었지.’
김서준이 이번에 보여준 여러 가지 능력을 고려할 때, 절대 한낱 농부나, 헌터로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상 중국의 전 세계에 대한 사과라는 불가능한 일을 이뤄낸 것도 김서준이 아니겠는가?
‘심상치 않아. 뭘 해도 하나 제대로 할 사람이야.’
이번 기회에 김서준을 확실하게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 양반도 대단하군요. 속이 쓰리다 못해 부글거릴 텐데, 내색 하나 없이 잘 떠는 걸 보면 말이죠. 역시 독재가 아무나 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
허철영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며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어차피 내용은 뻔했다. 모두 합의된 내용이니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허철영이 보고 싶었던 건,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뻐기는 중국의 주석이 사과하고 실수를 인정하는 장면이었을 뿐이었다.
“축배는 좀 이따 들기로 하고, 이제 우리도 할 일을 해야죠? 비서실하고는 잘 이야기하셨어요?”
“네, 보상 관련해서는 잘 협의했습니다. 보상금은 곧 지급될 겁니다. 김서준 헌터의 요청대로 청룡 길드의 활동에도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습니다. 전담 구역도 새로 배정해주기로 했고요.”
“역시 국장님. 일 처리 하나는 정말 빠르셔서 좋다니까요. 그럼 저도 시작해야겠네요.”
허철영은 책상 위에는 ‘토종 작물 먹기 캠페인 운영계획서.’와 ‘금천면 관광도시 사업지원 계획서.’가 놓여 있었다. 두꺼운 서류 두 개를 본 허철영이 웃었다.
“우리 영웅님한테 줄 한번 잘 대봅시다.”
문득 이 캠페인이 대박 나면, 김서준을 농림부 장관으로 김서준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허철영은 그런 상상을 하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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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 오랜만이야.”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가득한 공간.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리아가 먼저 나와 김서준을 반겼다.
“아리아. 잘 지냈지?”
김서준이 오랜만에 보는 금발 머리의 여인에게 대답했다. 연두색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린 드레스를 입은 아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서준이 대단한 일을 해냈으니까. 오늘은 우리 조금 특별한 시간을 보내볼까?”
아리아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넓은 초원에 울려 퍼졌다.
“음? 뭘 한 거야?”
“뒤를 봐봐.”
김서준은 아리아의 말대로 고개를 돌렸다. 우아한 그늘막 아래 잘 차려진 티 테이블이 나타났다.
“가벼운 차와 곁들일 디저트를 준비했어. 먹으면서 우리 천천히 이야기해볼까?”
“좋지.”
씽끗 웃은 김서준은 테이블에 앉았다. 각양각색의 쿠키와 케이크가 김서준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리아는 작은 주전자를 들어 김서준의 잔에 차를 채웠다. 살짝 푸른빛이 나는 차는 페퍼민트와 같은 시원한 향을 풍겼다.
“고마워.”
“마셔봐. 맘에 들 거야.”
아리아가 미소와 함께 자신의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김서준도 조심스레 따뜻한 차를 입으로 흘려 넣었다.
“음···.”
낮은 탄성이 터졌다. 향은 박하 향이지만, 맛은 좀 달랐다. 은은한 박하 맛 앞으로 살짝 단맛이 섞여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맛있다. 이게 무슨 차야?”
“역시 입에 맞네. 사비오 차야.”
“사비오?”
그러고 보니, 사비오는 그 잎으로 차를 끓일 수 있다는 정보를 봤던 게 기억이 났다.
“사비오의 살던 대륙의 현자들은 이 차를 즐겼어. 어때? 서준도 머리가 좀 맑아지는 거 같아?”
아리아의 물음에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 기분이었다.
“사비오 좀 더 크면 자주 해 먹어야겠다.”
“지금도 마실 수 있을 거야. 양이 많지는 않지만. 근데 진짜 대단해. 그 짧은 시간에 사비오를 그렇게 많이 키울 줄이야.”
대략 3주 사이, 사비오는 50억 원어치가 넘는 마정석을 흡수했다. 덕분에 이제는 김서준의 키만큼 자란 어엿한 콩나무가 되었다.
‘사람이 살았다는 전설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
여하튼, 찔끔찔끔 이파리만 겨우 뻗던 사비오는 나름의 급속성장을 이뤄냈다. 과연 돈의 힘이랄까.
“근데 이제는 지금처럼 하면 안 돼.”
아리아가 경고하듯 말했다.
“왜?”
“사비오가 새싹일 때는 무한정 마나를 흡수하지만, 조금 큰 후부터는 하루에 흡수하는 마나가 정해져 있거든. 계속 과다하게 마나가 공급되면 사비오가 버티지 못할 거야.”
역시였다. 김서준은 사비오에 액체로 된 마나를 부은 후, 가루로 만든 마정석을 이파리 주변에 쌓아두는 방식으로 사비오를 키웠다.
‘원래는 하루만 지나면 다 사라졌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가루로 된 마정석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다 흡수할 수 없었던 거구나. 신기하네. 오히려 클수록 적게 먹다니.’
어쨌든 김서준으로서는 희소식이었다. 이제는 오롯이 김서준이 직접 마정석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상금은 두둑하게 받았지만, 돈 쓸 일은 많으니까.’
김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고마워.”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역시나 하이라이트는 바이올렛 호퍼의 이야기였다.
“사비오를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서준은 정말 대단해!”
“다들 좋은 영감을 준 덕분이지.”
이전과 달리 아리아는 김서준이 어떻게 위기를 막았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사태를 처리하는 동안 언덕을 찾지 않아서인가?’
김서준은 덕분에 더욱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아리아가 워낙 눈을 반짝거리며 김서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오히려 이야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침내 이야기를 마친 김서준이 말했다.
“그런데 아리아, 궁금한 게 있어. 이번 바이올렛 호퍼 사태가 드래곤, 크로노스와 관련이 있는 거야?”
크로노스.
도리를 세뇌하고 이용하고 끝내 도리가 재앙이 되도록 만들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크로노스는 자신을 보필하기 위한 부하를 거닐었습니다. 엘리트 바이올렛 호퍼에게서 그중 한 명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바이올렛 호퍼와의 전투를 끝마치고 도리는 김서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도리는 그게 너무 찰나여서 착각일 수도 있다고 했다.
‘과연 착각일까?’
김서준은 오히려 착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렛 호퍼, 아웃브레이크, 게이트 등등. 김서준은 최근 이런 현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중이었다.
‘외부에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있어.’
엘린이 온 라이너스 대륙도.
드워프 삼 형제가 온 벨리르 대륙도 모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아니던가.
게이트 역시 그랬다. 다른 차원에서 온 이들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긴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왜 전부 저렇게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왜 전부 지성이 없는 거지?’
물론 고위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가 꽤 전략적인 면을 보여준 사례도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전락, 전술이지 엘린이나 드워프처럼 문명에 관련된 기술이 아니었다.
심지어 제대로 된 언어도 구사하지 않았다.
‘게이트로는 엘린이나 드워프 같은 지성 체는 넘어오지 못하는 건가?’
엘린은 게이트가 초자연적인 현상일 리 없다고 했다. 자신이 세계수를 통해 이 세계로 연결되었든, 무언가 장치가 있을 게 분명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장치로 지금 이 몬스터만 계속해서 넘겨 보내는 이가 있는 게 아닐까?
김서준이 내린 결론은 그랬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세계에 대한 악의를 가진 사람은 어쩌면 도리가 만났던, 세계와 차원을 넘어 다닐 수 있는 드래곤, 크로노스가 아니겠냐고 김서준은 강하게 의심하는 중이었다.
“크로노스, 아니면 또 다른 드래곤이 혹시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김서준은 아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리아는 눈을 살짝 감은 채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는 김서준을 빤히 쳐다봤다.
“아리아?”
“아, 미안.”
찻잔을 내려놓은 아리아는 생끗 웃으며 말했다.
“방금 물어본 질문에 대해서는 역시 알려줄 수 없어.”
“지난번과 같은 건가?”
“응. 같은 거지. 아직은 말해줄 수 없는 이야기야. 다만 이번 사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기도 하고, 이제는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해준다면···.”
아리아는 김서준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입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아리아의 눈이 묘하게 우울함이 스치는 듯 보였다.
“종종 이런 일이 더 있을지도 몰라. 지금 하고 있듯이 신농으로서 터전을 키우는 만큼, 지키는 데도 조금 노력해주면 좋을 거야. 물론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우울감은 스치듯 빠르게 사라지고 아리아는 평소의 순수하고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보상해 줄게. 이번 보상은 조금 특별할 거야.”
“특별해?”
“응. 아주 특별하지! 특별히 서준 이에게 필요할 만한 아이를 초청했거든.”
“아이···?”
김서준이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상으로 웬 ‘아이’란 말인가?
‘혹시 또 정령인가? 바람이랑 땅 그다음은 불이나 물일까?’
김서준이 기대하며 아리아를 바라봤다. 아리아 옆에서는 황금빛이 정말로 작은 아이만 한 크기로 변했다. 이내 빛이 푸른색으로 변하며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 이건···.”
뾰족한 귀, 작은 몸집. 삐죽 나온 이, 얼굴 반만 한 커다란 뿔테 안경. 정말 아이처럼 귀여운 모습이지만 김서준은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빛은 자취를 감췄다.
이내 아리아가 선물이라고 부른 아이가 꼿꼿이 선 채 눈을 떴다. 김서준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아리아···. 혹시 장난이라면, 이건 도를 넘은 거야.”
피부는 보통과 다른 파란색이지만 확실했다. 아리아가 소환한 건 김서준의 원수, 고블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