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바이올렛 호퍼
전소민은 참고를 위해 더 많은 사진과 자료를 첨부했다. 다음 날, 엘린과 김서준은 다른 일을 제쳐두고 거실에 앉아 사진과 자료를 검토했다.
“확실하네요.”
그리고 엘린은 다시 한번 말했다.
“바이올레 호퍼라니···.”
그렇게 말하는 엘린이 골이 아프다는 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왜요? 심각한 마물인가요?”
“심각하죠.”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엘린은 프린트한 자료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 써놓은 자료는 대부분 맞아요. 사람이나 동물은 공격 안 하지만, 생존율도 엄청나고. 번식도 아주, 아주 빠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식성이에요.”
“식성이요?”
“바이올렛 호퍼는 자는 시간과 이동시간을 제외하면 전부 먹는 거로 시간을 보네요. 금수산 정도는 다 먹는 하루도 안 걸릴 거에요. 게다가······.”
무리로 날아다니는 사진을 하얀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렇게 절대, 큰 무리로 키우지 않아요. 일정 규모가 되면 무리를 나누죠. 더군다나 한 마리만 살면 금방 다시 무리를 만들어내요.”
“잡기도 엄청 힘들다는 거네요.”
“그게 핵심이죠. 라이너스 대륙에도 처음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 숲과 엘프 마을이 몇 개가 사라졌는지 몰라요. 한 개체는 최하급이지만, 그 행태만 보면 재해 수준이에요. 그 강하다는 키메라도 바이올렛 호퍼 사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엘린은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세계수가 말한 위기는 역시 이거였나.’
거의 확실했다. 초반 대처가 조금만 잘못되면 금세 세계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는 점에서 그랬다.
“근데 라이너스 대륙은 멸망하지 않았잖아요”
“맞아요. 겨우 막아냈죠. 녀석들의 특징이 있었거든요.”
“특징이요?”
엘린은 현재 헌터들의 대처에 관한 자료를 보며 말했다. 그 중, 마을 하나를 봉쇄하고 전체를 다 태워버린 사례를 보며 말했다.
“한 마리라도 살아남으면 다시 살아난다고 했죠? 이런 식으로 사냥하는 게 맞긴 맞아요. 하지만 불은 피해도 크고, 나중에는 통하지 않게 될 거에요. 점차 불이 나면 땅속으로 숨어들 거거든요.”
“메뚜기가 땅속으로도 들어가나요?”
“녀석들은 몬스터지 메뚜기가 아니니까요.”
바이올렛 호퍼는 발달 된 앞다리와 턱으로 흙을 팔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버티는지 알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물에 뛰어들기도 하고. 다른 사체에 숨어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동족이 희생해서 한 마리만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죠.”
이 말인즉슨, 단순한 벌레나 몬스터가 아니라는 소리.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고 생존본능이 뛰어나 보였다. 마치 바퀴벌레처럼.
“그래서 결국 방법을 바꿨어요. 직접 때려잡는 게 아닌, 미끼와 함정을 이용하기로.”
“그리고 라이너스 대륙이 막았다는 건 미끼를 찾았다는 거고요.”
“맞아요. 확실한 미끼가 있어요. 바로 마나에요.”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지만, 마나에는 마법사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주파수가 있다고 한다.
“마나 주파수 중에 녀석들이 좋아하는 주파수가 있어요. 마나 먹은 풀이 발산하는 주파수죠.”
“그럼 마나 먹은 풀을 미끼로 쓴 건가요?”
엘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나 먹은 풀이 발산하는 마나는 너무 미미해요. 미끼로 쓰는 게 쉽지 않아요. 대신 직접 주파수를 만들었죠.”
“어떻게요?”
“인간 계 대마법사와 엘프족의 대 장로님이 힘을 합쳤죠. 두 분의 어마어마한 마나를 드워프 족의 장치로 주파수를 바꿔 온 대륙에 발산했죠. 그리고 모인 녀석들을 단숨에 일망타진할 수 있었죠.”
“흠···.”
김서준은 낮은 신음을 토했다.
‘대마법사와 엘프족 대장로라니..’
능력 좋은 헌터는 많다. 어쩌면 그들이 대마법사만큼 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완전 꽝이었다.
‘마나라는 걸 우리는 스킬을 쓰기 위한 장치로만 알고 있으니까.’
스킬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건, S급 헌터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치는 만들 수 있어요. 망치의 후예들과 힘을 합치면 충분히. 문제는 저 정도 규모의 마나를 어디서 구하냐인데···.”
“엘린의 마나로는 어렵겠죠.”
“네. 제 마나만으로는 어려워요. 마정석을 이용하는 게 최선일 거 같긴 한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마정석이라.
하긴 마나를 머금은 돌이 마정석이지 않은가. 그 안에 든 마나를 발산할 수만 있다면 가능해 보였다.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마정석은 제가 필요한 만큼 구해드릴게요.”
마정석은 비싸다. 김서준에게도 부담이 될 만큼. 하지만, 아마도 국가적 차원의 재난이기에 방법만 마련한다면, 나라나 길드에서 지원받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트레스와 이야기해볼게요.”
*****
“후, 춥네.”
이제 봄이라지만, 바닷가를 낀 영광군 홍농읍에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전소민은 외투를 여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고생이네.”
헌터와 경찰들은 마을 전체를 봉쇄하고 있었다. 바리케이드 뒤에선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착잡했다.
방금, 마을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켰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마을을 전소(全燒)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민들은 누군가는 분노를, 누군가는 눈물을 보였다.
‘방법이 없어.’
현재로서는 그랬다. 최초의 발원지인 중국 역시 이렇게 퇴치하는 중이 아니던가.
‘제아무리 대단한 S급이 있다 해도 의미도 없고. 뭐 이런 마물이···.’
전소민은 착잡한 신경을 애써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상황은 벌어졌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야. 누군가 강제로 희생을 당한 만큼 더 제대로 해내는 게 최선이야.’
봉쇄선은 이제 완성되었다. 저 멀리서부터 완료 신호가 오고 있었다.
“자, 이번에도 잘 해보자고!”
빨갛게 물든 인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또 다른 S급 최석현이 다가와 전소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네. 잘 해보죠.”
그 손을 거칠게 밀어낸 전소민은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의 날개는 전소민을 태우고 하늘로 부유했다.
“귀엽기는···.”
라고 말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는 애써 무시했다.
[준비되셨습니까?]
인 이어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작전의 지휘관이자 헌터 계의 신사, 정현민의 목소리였다. 전소민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준비됐습니다.”
[이쪽도 준비 완료.]
[그럼 시작하시죠.]
[오케이!]
대답과 함께 바닥에서 화마가 시작됐다. 마치 용처럼 불꽃이 꿈틀거리며 온 사방을 휘젓기 시작했다.
-팟! 팟!
열심히 나무, 논, 밭 등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던 바이올렛 호퍼 들이덮쳐오는 뒤늦게 화마를 피해 점프 뛰기 시작했다.
“흡!”
전소민은 불이 다 빠르게 번질 수 있게 적당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메 쾌한 연기가 뿌옇게 올라왔다.
-팟! 팟!
동시에 바이올렛 호퍼들도 연기와 함께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올라갑니다!]
전소민은 바람의 장막을 펼쳤다. 닿는 물체는 전부 바람의 칼로 베어버리는 전소민만의 결계 술은 자비가 없었다.
공중에서 수없이 많은 바이올렛 호퍼들이 분쇄되었다. 그것들의 보라색 피가 비처럼 바닥으로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바리케이드 쪽으로 도망가려는 바이올렛 호프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나 장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빠르게 마무리하시죠!]
[오케이!]
신호와 함께 화염은 더욱 맹렬히 몸부림쳤다. 전소민의 바람도 기세를 끌어올렸다. 화염 폭풍은 마을을 완전히 뒤덮었다. 이 안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휘잉
마침내 마지막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따라 짙은 연기는 희석됐다.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마을이 시계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전소민은 마을 주민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보내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잿가루가 바람에 날게 휘날렸다.
“캬. 싹 잘 탔네.”
이 속 없는 사내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지, 스스로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전소민은 무시하고 지휘실로 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정현민이 마중 나와 인사했다. 전소민은 고맙다고 이야기하며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피곤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서준이 보고 싶네. 서준이는 다른 대책을 찾았을까.’
그때였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거긴···! 알겠어. 일단 일대를 봉쇄하라고 해.”
정현민이 일그러진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예요?”
전소민이 물었다. 그러자 정현민이 부들거리며 대답했다.
“신안에 녀석들이 또 나타났다고 합니다.”
“네? 거긴 2일 전에 완전히 소각했잖아요?”
“...살아남았던 녀석이 있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전소민은 부째를 꾹 쥔 손을 부들거렸다.
‘이래서는···.’
그때 머릿속에 김서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책을 찾아보겠다고 했던 김서준. 이제 이 사태를 해결할 희망은 김서준뿐이라고 전소민은 생각했다.
*****
엘린의 공방 안.
트레스와 우노, 도스까지 모든 형제가 모였다. 엘린과 김서준의 계획을 들은 드워프들은 지혜를 짜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엘린 공이 말하는 장치는 만들 수 없네.”
“어, 어째서죠?”
“마정석으로는 그만한 마나를 만들 수 없네. 온 대륙에 퍼질 정도로 강한 마나를 마정석으로 모으려면 모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겠지. 우리에게는 그런 장치가 없어.”
“그런 장치부터 만들면 되지 않나요? 시간은 아직 충분히···.”
김서준이 물었다. 그러자 트레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번에 엄청난 양의 마나를 전부 모으는 일이야. 일종의 깔때기가 필요한 거라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양의 마나를 모을 정도로 강한 도체라면 드래곤의 심장쯤은 되어야 하오.”
트레스는 종이 하나와 펜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보면 되오. 라이너스 대륙의 방식은 이렇소. 이미 강한 마나가 마나를 발하고 있었소. 거기에 주파수를 바꾸고 송신범위를 늘리는 일이었지.”
트레스는 대충 그린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안테나를 그렸다.
‘저 안테나를 만드는 일이었구나.’
안테나는 흐르는 마나의 길만 잡아주는 식. 즉 다량의 마나를 감당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두 사람의 계획은 이 두 사람을 대신한 동력을 만든다는 거지. 그러기 위해 많은 마나를 끌어모은다는 이야기고. 문제는 이렇게 마정석으로부터 마나를 모으고 버텨줄 만한 개체가 없는 거지.”
트레스가 아쉽다는 듯 안테나에 동그라미를 연신 그리며 말했다.
“이 안테나만이라면 만들어볼 법한데, 마나를 견디는 건 창작의 영역이 아니라 힘들겠소. 미안하오.”
“..어쩌죠?”
엘린이 낙담한 얼굴로 김서준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엘린의 잔뜩 굳은 얼굴. 식물을 사랑하고, 이미 바이올렛 호퍼와 사투를 벌였던 엘린인 만큼 훨씬 더 사안에 심각함을 느끼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김서준은 궁리했다. 관건은 마정석의 마나를 모으는 깔때기가 필요한 셈.
‘마정석의 마나를 모은다, 마정석? 마나를 모아? 잠깐만 이거···.’
김서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혹시 그거 사비오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