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다가오는 위기
끝을 모르는 평야가 눈 앞에 펼쳐진다. 그 위로 부는 산들바람에 잔디가 하늘하늘 흔들린다.
“오랜만이네.”
그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기분 좋은 공간에서 김서준이 눈을 떴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초록색 드레스에 이제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가진 아리아가 환한 미소로 김서준을 반겼다.
“못 본 사이 더 성장한 거 같은데?”
그 말대로였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의 느낌이 났다. 입고 있던 드레스도 화려하고 훨씬 어른스러워졌다.
“물론이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까. 서준 덕분에.”
“다행이네.”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인 정도가 아니야. 서준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니까. 이거 봐. 이 언덕에 2개월 만에 돌아왔잖아.”
“그런가?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물론이지! 서준이 말했던 대로 사람들의 행복도와 안정도가 엄청 올라갔어. 아이들도 집을 잃을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났는걸!”
하긴, 오락가락하던 주민들의 마음이 최근 들어 많이 안정화가 되긴 했다. 영농조합부터 김서준의 지원, 계약 체결 등 수익이 안정화되고 시설이 들어서고, 마을 전체가 활기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밖에서 유입도 서서히 조짐이 있고.’
어르신들의 친인척들을 중심으로 귀농 이야기도 나왔다. 임종철은 마을 촌장을 역임한 이래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진짜, 이번 신농은 제대로 뽑았다니까!”
“이렇게 칭찬해주면 더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이거보다 더 잘하면 얼마나 잘하려고?”
“하하.”
농담을 주고받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김서준이 물었다.
“근데 이번 시험은 뭐야?”
김서준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아리아의 입에서 ‘흠···.’하는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이번 시험이 그렇게 어려운 거야?”
“그게 아니야.”
한숨을 푹 내쉰 아리아가 말했다.
“너무 쉬워서 그래.”
“너무 쉽다고?”
“왜냐하면, 이미 서준이 하고 있거든. 두 번째 시험은 터전을 넓히는 일이야.”
영농조합을 만든 후, 사실상 호산마을과 금산마을은 하나의 마을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호산마을에서 키우던 마늘 품종도 기존의 수입 종자에서 김서준이 개량한 코끼리 마늘로 변경했다.
‘거기에 추가로 다른 토종작물도 키우고 있고.’
더군다나 같이 사업하면서 두 마을의 유대는 점점 커지고 있으니, 아리아의 말대로였다.
“물론 지금 터전 화하고 있는 마을 너머 더 넓게 터전을 넓혀야 하겠지만 말이야.”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터전 화라는 게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거야?”
“서준과 내가 이야기했던 곳으로 만드는 거지. 원래 이 땅에 살던 아이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들이 행복해져서 모두가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말이야.”
“이번처럼 토종작물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아니면 사비오나 미트루트처럼 집을 잃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집을 찾아줘도 좋고.”
김서준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미트루트···?”
라이너스 대륙에서는 아주 귀한 식물이라고 하긴 했다. 망치의 후예들이 온 벨리르에서도 미트루트는 전설 속 식물이었다.
‘하지만, 리노와 같이 아랑족을 키우는 모크 족은 미트루트를 사료로 쓴다고 하지 않았나?’
가축의 사료로 쓰이려는 식물이 멸종위기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아니야. 미트루트는 실수!”
“아리아?”
아리아가 다급하게 무마하려 했다.
“진짜로 실수라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김서준의 머리에는 이 상황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아리아?”
“아, 정말! 안 돼. 이건 아직 말해줄 수 없어. 서준이 더 성장해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아리아가 먼저 이야기했잖아. 말을 하다 마는 게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거라던데···.”
김서준이 짐짓 삐진 척 연기했다. 그러자 아리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후···. 좋아. 이건 내 실수니까. 대신 다른 일을 도와줄게.”
“다른 일?”
“곧 이 세계 위기가 닥칠 거야.”
“위기? 크라이시스 같은 거?”
아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준이 생각하는 거랑은 좀 다른 방식의 위기일 거야. 특히 우리 아이들이 불안에 떨게 될 거고.”
아리아는 이내 말을 끊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원래는 이 세계와 서준이 알아서 헤쳐나가야 할 시련이지만···.”
그러자 김서준의 눈앞에 쪽지창이 나타났다.
[다가오는 위기]
미지의 위기를 해결합니다. (신농이 위기를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이건?”
“그 위기를 퀘스트로 부여할게. 서준이가 위기를 극복하면 그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그리고 추가로 힌트도 주고.”
아리아가 퀘스트 창을 보며 말했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구가 힌트라는 거네. 내가 인지해야 한다는 건,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게 시작한다는 이야기인가?”
“역시 서준이야. 맞아. 그게 내가 주는 힌트야. 자, 이 정도면 됐지?”
그렇게 말하며 아리아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더 크게 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긴 한데···. 이런 정보를 줄 만큼 그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인가? 싫다고 하고 더 캐물어 봐야 할까?’
김서준이 아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아리아가 소리쳤다.
“안 돼. 이게 끝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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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자격시험 2]
신농의 터전을 금천면 전체로 확장하라
보상
- 신농의 힘 대폭 확대.
- 세계수의 가호 강화.
- 안전지대 확장.
김서준은 다시 한번 받은 퀘스트를 확인했다.
‘금천면 전체라. 세계수 답네.’
금천면은 딱히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시골 동네 중 하나. 금천면에 있는 모든 마을이 금산마을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당연했다.
‘잘만 풀리면 토종 종자 보급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어쩌면 이 땅에 맞는 더 많은 토종 종자들을 보급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토종 종자들에게는 새로운 집을, 금천면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먹거리가 되어 양쪽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아마 그런 상황을 의도한 거겠지.’
세계수는 아마도 이 과정에서 김서준이 얼마나 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나아가 더 넓은 터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듯 보였다.
‘이미 호산마을에 전파하는 걸 보고 반쯤은 인정한 거 같지만 말이야.’
아리아의 반응을 다시 떠올리며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김서준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좀 더 사소한 뉴스까지 챙겨봐야 할까. 아니면, 마을에 사소한 징조나 변화가 있는지 찾아봐야 할까.
‘소민이와 노을 씨에게도 부탁해놓자. 사소하지만 이상한 일 있으면 말해달라고.’
계기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뒤집으면 계기는 분명 자신의 소식통을 스친다는 이야기였다.
김서준이 할 일은 그 ‘어떤 계기’가 자신의 소식통에 닿았을 때, 놓치지 않도록 촉을 바짝 세우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회장님이 좀 늦으시네.”
김서준이 휴대폰에 적힌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10분 정도 일찍 오셨을 분이 5분여가 남은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
김서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옆으로 보이는 통유리창으로는 금산농장과 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풍경이 너무 좋네.’
김서준이 있는 곳은 가온 길 2층에 만든 개인실이었다. 1층은 금수산의 풍경이 조금 더 중심이고 그 뒤로 마을이 배경처럼 펼쳐져 보였다.
반면, 높이가 좀 더 있는 2층은 마을과 금수산의 풍경이 좀 더 조화를 맞추고 어우러져 있는 거처럼 보였다.
‘이런 풍경이면 카페를 지어도 좋겠는데.’
김서준은 차기 사업 계획을 구성하며 푸른 풍경을 감상했다.
“어, 리노?”
수풀 사이 아주 작은 솜뭉치가 굴러다니는 것 같은 모양. 분명 리노였다. 한참 순찰을 한 바퀴 도는 거처럼 보였다.
리노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서준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리노, 수고해.]
[멍!]
커넥션 링으로 대화를 하고 있자 밖에서 바쁜 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오셨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똑똑’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김서준의 대답에 문이 ‘드르륵’ 옆으로 열렸다.
“잘 지냈나.”
오늘도 정 회장은 평범한 마을 주민처럼 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행차했다. 김서준은 그 편한 모습에 미소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제 대등한 계약자인데, 그렇게 고개 숙여 인사 안 해도 된다니까.”
“이건 예절의 문제니까요.”
김서준이 웃으며 의자를 뺐다. 자리에 앉자 강하진이 직접 차를 내왔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자네가 이곳 셰프가 됐군.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강하진은 음식을 내오겠다고 인사하며 방을 나섰다. 차 한 모금과 함께 잠깐 숨돌린 정 회장이 김서준을 보고 말했다.
“일단 사과 먼저 해야겠군. 늦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회장님. 약속 시각에 딱 맞춰오셨는데요.”
“10분 먼저 오는 게 비즈니스 매너 아니겠나. 본래 그러려고 했는데, 산이 너무 좋더군. 외국에 물 맑고 공기 좋은 데 다 가봤지만 이만한 산을 본 적이 없어.”
정 회장이 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말했다.
“더군다나 산책로랑 중간중간 보이는 밭이나, 들판도 깔끔하고 예쁘게 잘 해놓고 말이야. 최근에 힐링이 젊은이들 사이 유행이라던데, 여기오면 다들 좋아할걸세.”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김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테이블 분위기가 훈훈해지자 정 회장은 곧장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송이버섯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수출 건이 좀 묘하게 풀렸네.”
“묘하게요?”
“아랍의 그 왕자님이 말이야. 송이버섯을 아주 맘에 들었나 봐. 경매하는 것도 귀찮다고 정기적으로 수입할 방법은 없냐고 묻더군.”
여기까진 예상했던 바였다.
‘최근 경매 낙찰자가 전부 셰이크 왕자였으니까.’
더군다나 셰이크 왕자는 최근 후계를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한참 송이버섯의 힘이 필요할 시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소식을 들은 주변 중동 국가의 대부호들이 항의를 해왔네.”
“네?”
“자네는 몰랐겠지만, 최근 중동의 부자들 사이 자네 버섯이 아주 유행이야. 셰이크 왕자에게 소개받은 이들이 다들 반한 거지.”
정 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안 반하는 게 이상하지. 숲을 그대로 담은 듯한 맛과 향에, 효과도 말이 안 되니까. 덕분에 나도 요즘 힘이 넘친다네.”
“하하.”
괜히 부끄러워 어색하게 웃은 김서준은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
“경매가가 계속 오른 것도 그래서고. 최근에는 소문이 점점 나기 시작해서, 원래도 송이버섯에 관심이 많았던 일본이나 중국부터 미국, 캐나다 쪽에서도 경매에 참여하기도 하고 있고. 아마 소문이 커지면 중동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항의가 오겠지.”
정 회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송이버섯은 정 회장에게 있어 이렇게 복잡하게 고민해야 할 만큼 대단한 사업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대충 처리하면 되겠지만, 너무 많은 VVIP가 엮여 버렸어.’
자칫하면 중동 거래처들과의 사이가 전부 틀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곤란한 상황이네. 경매를 계속하자니, 셰이드 왕자와 관계가 틀어질 게 불안하고. 경매를 안 하자니 다른 사람들이 문제가 되고 말이야.”
“저야 버섯을 아주 비싸게 팔 수 있는 좋은 상황인데, 회장님이 곤란해지셨네요.”
김서준의 말에 정 회장이 괜히, 헛기침했다.
“흠흠. 사실은 그런 상황이지.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겠는가?”
김서준이 씽긋 웃었다. 창밖을 바라봤다. 연녹색으로 가득 찬 산이 보였다. 그래. 봄이니까.
“있을 거 같아요. 마침 봄이 왔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