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67화 (67/139)

67. 봄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신동원은 반가워 하며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엄민호와 옆에 선 남자는 기꺼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 셨나 보네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김서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설마 신동원 씨인가?’

열심히 노력한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종종 편지로 자신에게 은인이 불렀던 남자이니 신뢰도 충분하다.

‘하지만, 능력은 다른 문제야.’

어쨌든 아직 1년 차 요리사이자 가온 뫼의 막내가 아니던가?

‘식당의 의미가 그 정도로 가볍지 않다는 걸 엄민호 셰프도 알고 있을 텐데···.’

그때, 옆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가온 뫼의 수 셰프(Sous chef) 강하진이라고 합니다.”

하얀 조리복을 차려입은 짧은 머리의 남자는 예를 차려 인사했다. 단정한 용모에 차분한 목소리까지 첫인상이 좋은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김서준입니다.”

김서준 역시 가볍게 묵례로 인사했다. 두 사람은 엄민호 셰프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 두 사람이 셰프님이 말씀하신 레스토랑을 차릴 분들입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엄민호가 웃으며 말했다.

“레스토랑은 강하진 셰프가 열겁니다. 수제자 중 한 명이기도 하고, 수 셰프라곤 하지만 헤드 셰프에게도 밀리지 않을 실력을 갖췄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강하진은 겸손한 태도로 김서준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했다.

“하지만 여기 신동원 군은 아닙니다. 동원 군은 식당을 이끌기는 부족하니까요. 오늘 동원 군은 강하진 셰프를 지원할 직원이자 투자자입니다.”

“투, 투자자요?”

김서준이 놀라 바라봤다. 엄민호 셰프가 말을 이었다.

“본래 아까 말씀드린 이유로 저는 분점을 내는 걸 좀 더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동원 씨가 나서더군요.”

“동원 씨가요?”

“자신이 모아둔 돈을 전부 투자할 테니, 분점을 내줄 수는 없겠냐고···.”

김서준이 신동원을 바라봤다. 신동원은 멋쩍은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어차피 사업을 하려고 모은 돈입니다. 투자하는 데 사용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요.”

김서준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이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신동원 씨와 제가 반반 투자한 새로운 브랜드 ‘가온 길’을 런칭 하기로요. 그 첫 지점을 금산마을에 내고 싶습니다.”

계약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김서준은 좀 전의 계약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가온 길이라···.”

가온 길은 가온 뫼와는 다른 케쥬얼 다이닝(Casual-dining)으로 퓨전 한식을 다루기로 했다.

김서준이 요청했던 그대로였다.

이번 분점의 총주방장을 맡을 강하진 셰프는 딱 거기에 알맞은 인재라고 했다.

‘요리 스타일부터 본인이 꿈꾸는 식당 자체가 그랬다고 했지. 게다가 산을 좋아한다니 금상첨화지. 진짜 고맙네.’

도전, 홀로서기. 그 멋진 단어들이 가지는 무게는 상당하다. 실패가 오롯이 자기 삶의 몫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강하진 셰프는 그 무서움 때문에 엄민호 셰프의 제안을 망설였다고 했다.

‘그때 설득해준 게 신동원 씨라고 했지.’

엄민호 셰프에 이어 강하진 셰프까지. 이번 계약은 신동원의 역할이 컸다.

‘진짜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네.’

그야말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였다.

****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트리 위.

겨울의 한파가 마법으로 훈풍으로 변하며 트리를 통과한다. 동시에 쭉 뻗은 도리의 은발과 하늘하늘한 도포가 휘날린다.

[더 천천히.]

도리가 눈앞에 남자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김서준은 좀 더 천천히 아까 도리가 했던 동작을 따라 했다.

드워프들과 고된 운동이 익숙해질 때쯤. 김서준의 아침 일과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도리의 무술 수업이었다.

‘무술이라기보다는 명상 시간에 가깝지만.’

그도 그럴 게, 격한 운동이 아닌 아주 정적인 무술이었다. 마치 어렸을 적 영화에서 본 태극권과 흡사했다.

[내부의 힘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스스로에게 집중하세요.]

도리의 전언에 따라 김서준은 천천히, 들숨과 날숨, 손 사이 느껴지는 바람의 흐름, 옷의 촉감과 대기의 온도 등에 집중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후···.”

도리는 김서준이 마나를 깨우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건 결국 몸 안에 마나가 있다는 의미라고 했지.’

도리는 스킬이라는 세계의 배려로 그저 몸이 그 사용법을 잊었을 뿐이라고 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좋겠지. 마나를 느끼고 다룰 수 있게 되면, 엘린의 마법이나 트레스의 마법 공학 등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마나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 시간 자체가 좋으니까 말이야.’

세계수의 앞에서 하는 명상은 치유를 받는 기분이었다. 세계수의 생명력이 따뜻하게 마음을 보듬는 기분에 가까웠다.

반면 도리와의 무술 시간은 마음을 비우는 시간 같았다. 머릿속 고민으로부터 빠져나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기분이 좋았다.

“움!”

“멍!”

김서준이 문뜩 튀어나온 기합에 시선을 돌렸다.

노움과 리노가 나름대로 애를 쓰며 도리를 따라 하는 게 보였다. 둘은 유사시 김서준을 지켜야 한다며 훈련에 참여하고 있었다.

‘참 귀엽다니까.’

김서준이 피식 웃는 걸 본 도리가 말했다.

[집중하셔야 합니다. 신농님]

“아, 미안. 하하.”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1시간.

식은땀을 흘리며 김서준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히, 힘들다움!”

“멍!”

리노와 노움도 김서준 쪽으로 뻗어 버렸다. 김서준은 두 귀여운 녀석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게 왜 힘든 거지? 편하게 한 거 같은데···.”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건 본래 어려운 일입니다.]

도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렇게 이야기했다.

[곧 힘을 느끼시면 수월해지실 겁니다.]

도리의 말에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을 마친 김서준은 잠깐의 휴식 후, 곧장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드워프의 훈련을 처음 받았을 때는 진이 빠졌다. 덕분에 한동안 아침 산책 대신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도리와 수업까지 전부 다 마치고도 바로 산책하러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적응됐다.

“산책이다움!”

“멍멍!”

오랜만에 산책을 나선 둘은 즐겁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김서준을 따랐다.

“도리는 어때? 산책 괜찮아?”

“꽥!”

오늘부터 도리도 함께 산책하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마을에 대해 보기 위해서였다. 임종철과 김서준의 밭에서 토리는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제 개체 수도 충분했다.

‘슬슬 마을에 보급할 차례지.’

그 전에 도리에게 마을을 보여줘야 했기도 하고, 반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도리와 토리를 익숙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최 형. 여기 머리만 똑, 따면 된 다니께.”

“아하, 실수한겨. 실수. 기다려 봐.”

가장 먼저 향한 건 임종철의 밭이었다.

‘어르신들 성실하네.’

여지없이 아침부터 호산마을 촌장 최 씨에게 토종작물 농사를 짓는 방법에 대해 전수 중이었다.

“이거 줄기 또 나갔잖여. 이럴 거면 그냥 가위 쓰라니까!”

“아, 미안혀.”

김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셔서 다행이네.’

호산마을과 금산마을은 계약서의 도장을 찍었다. 이제 한 영농조합으로 합쳐져 있었다. 이후 김서준은 계획대로 서로의 노하우를 교류하기로 했다.

촌장들부터 솔선수범해서 나서니, 두 마을은 자연스레 노하우를 교류하고 있었다.

‘감사한 일이지.’

이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해진 두 사람의 수업은 열정이 넘쳤다. 김서준은 방해될까 조용히 그 옆을 지나갔다.

“서준이 아녀!”

임종철의 옆집에 사는 신 씨가 김서준을 보고 인사했다.

“아, 어르신. 안녕하세요.”

“노움이랑 리노도 왔구먼!”

“좋은 아침이다움! 멍!”

“그려그려. 근데 이거는 뭐여? 오리도 아니고 닭도 아닌 게 묘하네.”

신 씨는 옆에 있는 도리를 신기하다는 듯 요리조리 살폈다.

“토리족이라는 정령들이에요. 앞으로 저희 농사를 도와줄 거예요.”

토리는 굳이 따지면 리노와 같이 동물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닭이라고 생각하고 잡아먹으실지도······.’

그런 참사를 막기 위해 김서준은 토리족 모두를 정령으로 부르기로 했다.

“농사를?”

“네, 이 친구들이 잡초랑 벌레를 기가 막히게 잡거든요.”

“그 무슨 오리농법 같은 건가?”

“비슷하죠. 아마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이거 지금도 고마운데 자꾸 이렇게 도와주면, 뭘 해줘야 하나.”

“열심히 농사만 지어주시면 됩니다.”

한참을 호탕하게 웃은 김서준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근데 김 씨 아저씨는요?”

“오늘은 좀 늦게 온디야. 손님이 있다고.”

촌장과 함께 불법 산행을 했던 김 씨는 호산마을에서 가장 큰 체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영농조합의 전반적인 수익이 떨어지는 와중, 그나마 버틴 것도 김 씨의 체험 농장 덕이었다.

김 씨는 그 노하우를 아낌없이 금산마을에도 전수 중이었다.

“체험농원 준비는 할 만하세요?”

“그려. 김 씨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알려주고 있구먼. 누가 보면 자기 사업인 줄 알겠어.”

김서준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지.’

그들에게 이건 기사회생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행이네요.”

“얼른 잘 가꿔서 우리 손주들 먼저 부르고 싶구먼. 하여튼 진짜 고마워. 자네 아니었으면 이런 건 꿈도 못 껐을 겨. 그냥 얌전히 늙어 죽을 셈이었는디, 요즘은 아주 회춘한 거처럼 열정이 넘치는구먼.”

“어휴. 그런 말 마세요. 아직 정정하신데요. 오래오래 마을에서 함께 살아야죠.”

“맞다움! 그러기 위한 터전이다움!”

“그려그려. 껄껄껄.”

김 씨는 노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마을을 다 돈 김서준은 여느 때처럼, 세계수의 언덕이 있는 산으로 향했다. 길은 일부러 비포장도로로 만들어 흙을 직접 밟을 수 있게 했다.

양옆으로는 신갈나무를 심었다.

‘이러면 동물들과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겠지.’

이 산의 동물들은 리노와 김서준의 영향을 받아 낯가림이 심하지 않았다. 신갈나무의 도토리를 먹기 위해 온 동물들과 사람들이 자연스레 교감하길 바랐다.

‘내가 어렸을 때 다람쥐만 보면 좋아했던 거처럼 말이야.’

김서준이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도리 공! 리노 공! 어떻습니까움! 도로가 깔끔하지 않습니까움!”

“꽥!”

“이거 저와 신농님이 만든 겁니다움!”

“꽥꽥!”

“멍!”

“엣헴!!”

둘이 칭찬이라도 한 건지 노움이 가슴을 내밀며 떵떵거렸다.

‘하긴 저 말이 맞지.’

낮에 농사를 마치고 오후가 되면, 노움과 움은 곧장 이리로 향했다. 다들 중장비 모는 재미에 푹 빠져서 길 만들기에 중독된 수준이었다.

‘하긴 나도 그랬을 정도로 재밌긴 해.’

그 덕에 도로는 이미 모두 완성되었다. 이제는 그 완성도를 조금씩 높혀가는 단계였다.

“다들 보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하라움! 이 노움님이 다 만들어놓겠다움!”

“멍!”

“꽥!”

그렇게 길을 따라 오르니 금세 정상에 도착했다.

“오, 서준!”

“왔구먼! 클클클!”

아침부터 양조장 건축에 여념이 없는 드워프 삼형제가 보였다.

“잘 돼 가요?”

“외관은 그대의 요청대로 준비하고 있네. 내부는 좀 더 걸리겠어. 특히 와인 쪽이 쉽지가 않구먼. 재료가 워낙 많이 필요해서 말이야. 클클클.”

이제 목 자재로 골격이 만들어진 양조장은 아직 완성까지는 멀어 보였다. 김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 천천히 하셔도 돼요. 부탁드린 대로 외관만 조금 빠르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지. 클클클.”

김서준은 주변을 돌며 부지를 확인했다. 들판 위에 지어진 양조장. 그 옆에 들어설 레스토랑. 상상만 해도 멋졌다.

‘잘 되면 그 옆에 카페도 지어볼까.’

김서준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뒤를 돌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엘린! 아닙니다. 그냥 잠깐···. 근데 무슨 일로 아침부터 여기 왔어요?”

하얀색 롱 패딩을 입은 엘린을 보며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도스가 말했다.

“서준. 엘린은 내가 불렀네!”

“도스가요?”

“그래. 둘 다 이리 와보게. 귀한 걸 줄 테니!”

엘린과 서준이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도스의 뒤를 따랐다. 우노와 트레스가 목 자재를 의자 삼아 앉아있었다.

“서준! 엘린! 얼른 오시게! 트레스!”

트레스가 우노에 신호에 맞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나무통 하나와 맥주잔들이 튀어나왔다.

우노는 나무통에 달린 레버를 돌려 잔에 정체불명의 음료를 담아 모두에게 한 잔씩 돌렸다.

“이건···?”

“얼마 전 자네가 딴 첫 사과로 만든 사과 사이다(Cider)네! 한번 먹어보게나!”

첫 사과는 상품용이 아니었다. 나무가 자리를 잡고, 영양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적 의도가 컸다. 그렇다고 못 먹는 것도 아니고, 신농의 땅에서 자랐다보니 상태가 나쁘지 않아 여기저기 나눠줬는데.

‘그걸로 술을 빚을 줄이야.’

김서준은 기대가 되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모자란 사과로 만든 술이니 그만큼 맛이 떨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첫 드워프가 주는 술인데 말이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자자, 얼른 들라고!”

우노의 재촉에 엘린도, 김서준도 잔을 들었다.

‘이, 이건···.’

감기는 탄산 속에 퍼지는 단맛과 농후한 사과 향. 김서준은 자신의 혀를 의심했다.

“엄청 맛있네요?”

시제품으로 나온 어지간한 사과 사이다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니, 웬만한 고급 술보다도 향과 감칠맛이 좋았다.

“클클. 사과가 좋았던 거도 있지만, 드워프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대, 대단해요!”

김서준은 제대로 기른 사과로 먹었을 땐 얼마나 맛있을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와인 양조장을 만들기 전까지는, 아쉽지만 사이다로라도 즐기자고. 사이다 양조장 정도는 봄이면 완공할 거요. 클클클!”

도스가 자랑스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트레스와 우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라···.”

김서준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올봄은 진짜 기대되네요.”

그렇게 말한 김서준이 활짝 웃으며 잔을 들었다.

“우리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며 건배할까요?”

-짠!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금수산 정상에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드디어 금산마을에 봄이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