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영농조합
큰 유리창 너머 새하얗게 변한 마을 설경이 보였다. 김서준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한 잔을 정취와 함께 들이켰다.
“...흠 그러니까 호산마을과 금산마을을 하나의 영농조합으로 묶겠다는 겨?”
맞은 편에 앉아 녹차를 홀짝이던 임종철이 물었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산물이 생기고.
확실하게 거래처와 엮어서 마을 사람들이 가격에 대해 근심하지 않고.
관광 상품이 생겨 마을에 활기가 돌고.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점점 커지는 터전.
김서준이 그리는 이상은 나라에서 제시한 6차 산업 모델과 유사했다. 김서준이 6차 산업에 관심을 가진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세 가지였지. 돈과 마을 주민들의 신뢰, 그리고 내가 너무 6차 산업에 무지하다는 점.’
그러나, 호산마을의 영농조합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김서준은 이런 이야기를 곧장 금산마을의 촌장인 임종철에게 이야기했다.
“호산마을이 영농조합을 만들고 이것저것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디....최근에 좀 시들하다던 디 아녀?”
“맞습니다. 실은 반쯤 망한 수준이라고 하시더군요.”
임종철이 화들짝 놀랐다.
“마, 망했다고? 그 양반들 뉴스도 나왔잖여!”
김서준은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임종철에게 말했다. 임종철은 놀라워하며 안타까움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근디 자네 말대로면 결국 망한 일을 우리 마을에서 다시 할 이유가 있을까?”
“네, 있습니다.”
김서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첫 번째는 망한 이유입니다. 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무리한 확장과 지역 의존도죠.”
호산마을의 지역 의존도는 과했다. 금월 시 외에 거래처가 너무 적었다. 충남을 넘어가면 거래처가 아예 없었다.
‘온라인 쇼핑몰이 있었지만, 제대로 관리를 못 했지. 어르신들이 직접 관리를 했으니 말이야.’
이 상태로 무리하게 사업 분야도 확장했다. 지자체 지원이 사라지고 독점 구조가 깨지니 몰락하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나라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
이미 정 회장을 통한 전국 유통망을 가지고 있었다. 엄민호 셰프나 다른 거래처를 활용할 수도 있을 터였다.
“확장도 마찬가지죠. 제가 직접 조율해서 천천히 성장시키면 됩니다.”
“하긴, 자네 수완이면 가능하겠지···.”
임종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홀짝였다. 김서준은 여세를 몰아 곧장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마을 사람들이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불안에서 벗어난다고?”
“농사를 지을 때 가장 큰 불안은 뭘까요?”
“흠, 아무래도 가격이지. 풍년이 와도 가격이 너무 낮으면 다 갈아엎는 경우도 있으니까.”
“맞습니다. 노력이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경우죠. 사실 아무리 좋은 작물이라도 경매가를 얼마 받을지는 수확 때까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임종철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 불안에서 어르신들을 꺼내주고 싶었습니다.”
“알지. 이번 계약도 그래서 최저 가격제를 넣어 줬잖아. 다들 그래서 고맙다고 했었지.”
얼마 전 엄민호 셰프를 시작으로 하나둘 납품 계약을 체결 중이었다. 김서준은 여기서 모두 최저 가격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하지만, 부족해요. 지금이야 토종작물이 워낙 희귀하지만, 언제 어떻게 대체품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하긴, 토종작물의 종자는 네가 쥐고 있더라도 다른 방식의 대체품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여.”
“그래서 생각한 게 2차 산업, 가공품이었어요. 작물과 달리 가공품은 쉽게 가격이 변하지 않으니까요.”
임종철이 그 순간 손뼉을 쳤다.
“그렇구먼. 일정량을 가공품으로 바꿔서 지속적으로 판매할 수 있다면, 불안할 이유가 없겠구먼!”
“하지만 여기도 문제는 있습니다. 일단 공장이 너무 비싸요. 초기 투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죠. 하지만···.”
“설마 호산마을은 가공품 공장까지 있는 건가?”
김서준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껄껄 웃은 임종철이 말했다.
“....그 양반들 과감했구먼. 그 설비를 싸게 사겠다는 거로군.”
“네. 거기에 농사를 마친 어르신들이 직접 일을 한다면, 농사일 말고도 추가로 수익이 생길 테죠. 그럼 더더욱 농사를 지으면서도 불안해하지 않으실 겁니다.”
동시에 마을에 대한 애착과 안정감은 커질 터. 어르신들이 행복하게 되면서도 김서준은 터전을 더 안정적으로 크게 키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세계수와 이야기했던 대로 모두가 행복하고 누구도 떠나지 않는 터전의 기반이 되어 줄 거야.’
그리고 그건, 이 땅에 뿌리내린 작물들의 안정적인 터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이뿐 아니라, 체험농원이나 식당 같은 일에 대해서도 노하우를 얻을 수 있을 테고요.”
“좋은 이야기여. 성공만 한다면 대단하겠지. 하지만, 한 가지. 실패했을 경우 전부 리스크로 돌아올 걸세. 마을 사람들이 그 리스크를 넘어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부분도 중요했다. 사실 영농조합이 출범하려면 최초 5명 이상 농부에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6차산업 심사도 있고.’
하지만, 호산마을의 영농조합을 받는 것으로 이 문제 역시 김서준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초기 리스크는 제가 다 지겠습니다. 제 돈을 전부 투자해서 조합장이 되겠습니다. 이후 조합인 만큼 지분 투자를 받는 식으로 운영하고요. 하지만···.”
김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빨리 투자할수록 당연히 얻어가는 게 많지 않을까요?”
“껄껄. 자신감이 넘치는구먼. 좋아! 좋아! 그럼 내가 첫 번째 투자자가 돼야겠구먼!”
****
쌀쌀함 겨울 아침. 김서준은 오늘도 엘린과 함께 아침 일찍 나왔다.
“날씨 좋네요.”
“그러게요. 운동하기 딱 좋은 날이네요.”
김서준의 말에 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예요.”
“유명한 영화 대사예요. 리노!”
김서준이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리노를 들어 안았다. 리노는 김서준의 볼을 핥으며 인사했다.
“저도요!”
엘린이 뺏어가듯 리노를 데려갔다. 그리곤 털에 볼을 비비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리노 역시 싫지 않은지 꼬리를 흔들었다.
‘진짜 완전히 친해졌네. 예전에는 무섭다더니.’
김서준의 시선을 느낀 엘린이 웃으며 리노를 내려놓고 말했다. 함께 집 밖으로 나온 김서준은 엘린과 김서준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럼 오늘도 고생하세요.”
“네. 좀 이따 봐요.”
어제까지는 함께 마을을 산책한 후, 세계수의 언덕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아니었다. 이제 아침 일과에 하나 더 할 일이 생겼다.
“훈련이라, 오랜만이네···.”
도리가 넘어왔을 때, 욕심 넘치는 드래곤이 세계를 멸망시킨 이야기를 했다. 아리아는 외부에서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불청객이 넘어올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대비를 해둬서 나쁠 건 없지.’
몬스터를 먹는다는 사비오를 키우는 것부터 하나씩 언제 넘어올지 모를 것들에 대해 김서준은 하나씩, 천천히 준비 중이었다.
훈련은 그중 하나였다.
‘미약한 전투력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을 테니까.’
거기에 드워프들도 도리도 나서서 김서준을 훈련시키고 싶어 한 점도 한몫했다.
‘전사의 기질이 보인다고 했나.’
“서준! 왔구먼!”
“어서 이리 오게!”
통나무를 어깨에 메고 스쿼트를 하던 우노가 김서준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양쪽에 거대한 추를 단 수제 역기로 벤치프레스를 하던 도스가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한세트만 더 하고 바로 챙겨주겠네!”
“클클, 도스. 걱정 마. 내가 바로 시작할테니까.”
안경을 낀 채 운동하던 트레스가 웃으며 김서준에게 다가왔다.
“준비는 되었나?”
어깨동무한 트레스가 웃었다. 그 미소가 그만큼 섬뜩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홉...!"
"끄윽!"
"열..! 열..! 열..! 열..!"
"크악! 왜 열이 끝나지 않는 겁니까!"
"그만. 클클."
김서준이 들고 있던 무식하게 큰 역기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대짜로 뻗었다.
“와...”
헌터가 되고 나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근육통을 넘어 근육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운동을 한다고?’
김서준이 쓰러지며 허리에 찬 벨트를 바라봤다.
[작은 거인의 벨트]
등급조차 알 수 없는 마도구는 그야말로 사기급 헬스용 마도구였다.
‘운동하는 내내 최대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니. 뭐 이런 마도구가 다 있지?’
게다가 근육이 무리해서 파열될 거 같으면 곧장 몸을 마비시키는 안전장치 기능도 탑재하고 있었다.
“클클 고생했소.”
우노가 김서준의 벨트를 풀었다. 그러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더니 근육통이 몰려왔다.
‘꼼짝도 못 하겠네.’
완전히 뻗은 김서준을 보며 우노가 말했다.
“내일은 더 무겁게 해보자고! 클클클!”
“...그러다 죽으면 어쩌죠?”
“서준, 걱정하지 마시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굴려줄테니 말이오. 클클.”
“하하, 네...”
김서준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근데 이건 훈련이 아니라 그냥 헬스 아닌가? 체력 단련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 말은 너무나도 뿌듯해하는 드워프 삼형제를 보며 속으로 삼켜야 했다.
“후, 다음에는 이런 일정 있으면 좀 봐달라 고 해야겠다.”
김서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이끌고 집 밖으로 나온 김서준은 차를 몰아 엄민호 셰프의 식당으로 향했다.
한적한 시골 동네를 지나, 조금 낙후된 거리가 나타났다. 뒤이어 연결된 신도시를 지나 다시 한적한 동네가 나타나면, 얼핏 잘 지은 한옥 주택처럼 보이는 엄민호 셰프의 식당이 나타났다.
‘여기는 한옥 스타일이니까, 거기는 좀 더 현대식 건물로 하자고 할까? 아니면 그냥 한옥으로 하는 게 좋으려나.’
김서준은 농원 정상 위에 지을 레스토랑의 디자인을 상상했다.
‘뭐든 좋겠네.’
푸른 들판 정상에 지어진 레스토랑은 어떤 모양이든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낼 게 틀림없었다.
‘그 안에서 풍경을 내려보며 먹는 음식은 더더욱 특별할 거고.’
김서준이 한껏 품은 기대를 안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정원. 그 뒤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한옥을 김서준은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오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엄민호 셰프는 여지없이 김서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시장하시죠. 얼른 식사 먼저 하시죠. 납품해주신 토종작물로 한 상 준비했습니다.”
“벌써 기대되네요. 가시죠.”
방안에는 이미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김서준이 오는 시간에 맞춰 미리 준비한 듯했다.
“오늘은 코스가 아니네요?”
“네. 잔칫상처럼 준비해봤습니다. 좋은 날이니까요.”
“하긴 그러네요.”
두 사람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을 말할 것 없이 맛있었다. 엘린의 마법이 작물이 가진 생명력을 극대화한다면, 엄민호 셰프의 요리 솜씨는 작물이 가진 맛을 최대로 끌어내는 듯했다.
“과찬입니다. 다 서준 씨가 좋은 작물을 재배해주시는 덕이죠. 앞으로 금산마을에서 이런 작물이 더 많이 생산되면 요식업계도 전체적으로 수준이 올라갈 겁니다.”
“셰프 님이야말로 과찬이십니다. 하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식탁 위를 오갔다. 식탁 위는 연신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러다 마침내, 김서준이 본론을 던졌다.
“그럼 이제 바로 레스토랑 설립에 관해 이야기를 해볼까요.”
순간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곤 엄민호 셰프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고민 끝에 저는 서준 씨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습니다.”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초대할 때까지도, 아니 조금 전 대화까지도 그런 기색이 없지 않았는가?
“분명 서준 씨, 말대로 재료를 현지에서 바로바로 받을 수 있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저 역시 그 부분이 너무나 놓치기 싫은 부분이고요. 하지만...”
하지만, 엄민호 셰프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비용을 생각해보니 함부로 투자하기 어렵겠더군요. 농원조차 오픈하지 않은 상태에서 잘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투자비는 많이 들테니까요.”
파인다이닝(Fine-dining)이라는 게 그랬다. 생각만큼 수익을 많이 내기 힘들었다. 요리의 가격만큼 식자재값도 많이 들고 인건비도 많이 들었다.
‘순이익률이 7% 정도라고 했었지. 노쇼도 많고.’
엄민호 셰프의 ‘가온 뫼’ 역시, 대표적인 파인다이닝.
‘엄청 호황이라 들었는데, 그래도 부족했던 건가.’
김서준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엄민호 셰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분점 대신 투자를 하기로 했습니다.”
“투자요?”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리고 제가 투자하고 싶은, 저 대신 레스토랑 사업에 참여할 분을 따로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들어오세요.”
엄민호 셰프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미다지 문이 열렸다. 하얀 조리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
‘저 사람은···?’
그런데 옆에선 다른 한 사람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푸드트럭에서 자신의 감자를 팔았던 남자. 그리고 이제는 ‘가온 뫼’ 레스토랑에 막내라고 알고 있었던..
“신동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