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봄이 오기 전에(2)
오늘은 토종작물 보급 전 최종 설명회였다. 마을 주민들께 각각의 작물을 소개하고 원하는 작물의 종자를 보급하는 날이었다.
‘잘 치러야 하는 날이야. 이걸로 마을이, 내 터전이 새롭게 시작하는 거니까.’
주기적으로 토종작물에 관해 설명하고 알렸다. 하지만, 실제로 보여주는 건 처음. 여기서 잘못하면 모든 게 틀어질 수 있었다.
김서준이 직접 대본도 짜드리고 임종철과 리허설도 준비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덕이었을까.
“자, 다들 이거 보슈. 이게 삼동파여유.”
임종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준비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조선 대파라고도 불리쥬.”
임종철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밭에 난 작물로 향했다. 굵게 쭉 뻗은 파의 대 중간에 마치 분수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영양체가 달려있었다.
‘진짜 저것만 보면 기괴해. 촉수 같은 게 방사능 맞은 파처럼 생겼어.’
사실, 삼동파가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영양체에 있었다.
“원래는 이렇게 생겼는데, 여기 서준이랑 엘린이랑 개량해서 이렇게 바뀐 거유.”
임종철이 반대쪽에 심어진 삼동파를 소개하며 말했다.
“파 중간에 마늘을 달아놓은 거 같구먼.”
주민 중 한 분이 감탄하며 말했다.
“껄껄. 맞슈. 여기 서준이 하고 엘린이 연구해서 그런 모양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슈. 이로써 모양도 멀끔해져서 상품성이 생긴거쥬.”
“대단하구먼.”
“진짜 못 하는 게 없는가 벼. 재주꾼들이여.”
“서울에서 복덩이가 왔어.”
“마을의 보배라니께.”
김서준과 엘린은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대와 영양체가 그럼 맛도 다른가요?”
모여서 설명을 듣는 무리 중 가장 뒤에 있던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 엄민호 셰프. 그렇죠. 셰프님에게는 맛도 중요하겠군요. 껄껄.”
엄민호가 엊그제 전화를 한 이유는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직접 밭을 보고 작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요리에 영감을 얻고자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오히려 대환영이랄까.’
엄민호 셰프가 이렇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 주면, 사람들의 관심도는 더욱 커지지 않겠는가.
“대와 영양체의 맛은 비슷혀유. 둘 다 파와 양파를 섞은 것처럼 향긋하면서도 달큰하고 알싸한 맛이쥬. 영양체 부분은 대파의 이 아랫부분. 흰 부분이 동그랗게 비대해진 느낌이랄까?”
“역시, 그때 먹었던 그 감칠맛이 이 삼동파 덕이었군요.”
엄민호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삼동파를 바라봤다. 그러자 주민들의 눈도 반짝거렸다.
‘역시 엄민호 셰프 효과는 엄청나네.’
충남 제1의 한식 명인이 맛을 보증한 셈. 이로써 상품성에 대해서는 다들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 그럼 바로 다음으로 이어가쥬. 다음은 코끼리 마늘이 여유. 이 마늘은···.”
****
“흠···.”
엄민호 셰프는 살짝 익힌 삼동파의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인지 알기 어려웠다.
고개를 끄덕인 엄민호 셰프가 다음 작물을 바라봤다.
“다음은 코끼리 마늘이군요.”
살짝 구운 마늘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엄민호 셰프. 이번에도 살짝 탄성을 터뜨리더니 이내 꿀꺽 마늘을 삼켰다.
김서준도 탁자 위 접시에 담긴 작물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맘에 들어야 할 텐데···.’
깨끗이 씻은 상추, 대친 삼동파, 구운 코끼리 마늘, 삶은 노랑 당근. 잘 썰어놓은 개구리참외까지.
지금 내놓은 작물은 김서준이 키운 게 아니었다. 임종철의 땅에서 키운 작물이었다. 김서준의 땅에서 나온 작물은 김서준의 의도대로 자란다.
당도도, 향도, 맛도, 식감도 최고급으로 자라는 게 당연했다. 그건 엘린이 새겨 넣은 저주의 힘이 아니어도 그랬다. 신농의 땅 덕분이었다.
하지만, 금산마을의 평균은 김서준이 아니다.
‘평범한 땅에서 키운 평균 작물도 평가를 받아야 해.’
그래서 이번에는 임종철에 땅에서 신 씨 할아버지가 키운 토종작물로 시식회를 진행했다.
“마지막은 개구리참외인가요.”
엄민호 셰프가 마지막으로 연두색과 호박을 연상시키는 노란색이 어우러진 살을 가진 과육을 집어 들었다.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개구리참외가 엄민호의 입속에서 부서졌다.
‘괜찮은 건가···?’
알쏭달쏭한 표정이다. 김서준이 먹었을 때는 전부 수준급이었다. 임종철 역시 그렇게 평했다. 하지만, 엄민호가 누군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한식 명인이 아니던가.
‘미각도 우리보다 훨씬 섬세할 거야. 그 입에서는 다를 수 있어.’
김서준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평을 기다렸다. 엄민호는 눈을 감고 맛을 충분히 음미했다. 그리고 시식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눈을 떴다.
“괜찮은가?”
임종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엄민호가 대답했다.
“...이건···.”
엄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출하가 언제죠? 빨리 계약서 쓰시죠!”
김서준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맘에 들 줄 알았다니께!”
임종철 역시 노력이 결실을 보자 숨기지 않고 행복한 감정을 드러냈다. 엄민호는 놀랍다는 듯 이야기했다.
“이렇게 간단한 조리만으로도 엄청난 향과 맛을 냅니다. 삼동파야 워낙 많이 칭찬했지만, 다른 작물도 대단하네요.”
엄민호는 작물 하나하나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노랑 당근은 그 향과 맛이 작게 압축된 맛이고, 상추는 쓴맛은 전혀 없고 아삭함과 약간의 단맛과 감칠맛이 도는 게 쌈장만 있으면 밥 두 공기는 먹겠어요.”
엄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지간한 기성작물보다 모두 한 수위의 맛과 향을 보여줬다.
“개구리참외? 이것도 서준 씨가 개량한 겁니까?”
“네. 기존의 단맛을 좀 더 은은하게 바꾸고 아예 오이처럼 시원하고 아삭아삭한 맛을 더 극대화 시키는 쪽으로 해봤습니다.”
실은 성장력을 키우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엘린의 식물학은 식물의 생태에 중점을 두었지, 종자 개량에 관한 지식은 아니었다.
그저 김서준의 말대로 작물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게 전부였다.
그런데, 삼동파부터 개구리참외까지 모든 작물이 아주 긍정적으로 변모했다.
‘이걸 모두 마법의 힘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김서준은 그 변화를 적당히 포장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덕분에 오이 특유의 비릿한 향도 사라지고 쌉쌀한 맛도 없습니다. 오히려 은은한 단맛이 입맛을 돋우는 게, 오이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엄민호는 연신 감탄을 토해냈다. 그리곤 하나 더 개구리참외를 씹더니 탄성을 터뜨렸다.
“진짜 서준 씨의 재능은 무궁무진하군요.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아닙니다. 저 혼자만의 쾌거도 아니고요. 다들 도와주신 덕분이죠.”
“이 친구는 항상 그 겸손이 탈이여. 겸손이 과해도 보기 좋지 못혀. 껄껄껄.”
“맞습니다. 서준 씨. 이건 대단한 겁니다.”
명인과 명장이 껄껄 웃으며 김서준을 칭찬하니, 김서준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제 계약하면 되겠군요. 서둘러 계약 조건 준비해주세요. 저뿐 아니라 이제 곧 수많은 셰프들이 몰려들 겁니다.”
저 말은 토종작물이 대단하다는 의미와 동시에, 엄민호가 주변에 직접 추천하겠다는 의미. 즉, 김서준의 제안에 따라 움직인다는 걸 말했다.
‘완벽해.’
생각한 모든 게 이뤄진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상황. 이로써 봄이 오기 전 준비할 일 들이 모두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김서준은 너무 기분이 좋아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아야 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부탁하실 게 있다고요?”
“아, 이건 정말 별건 아닙니다.”
김서준이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혹시 셰프님 분점을 내실 생각은 없으실까요?”
“분점이요?”
****
“구오!”
“멍멍!”
“컹컹!”
리노는 오랜만에 동물 부하들을 모두 소집했다. 순찰은 본래 퍼져서 하는 게 효율이 좋고 서로 편했다.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근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주요 구간에 솟대도 있으니까. 쉬엄쉬엄해.”
자신의 주인인 김서준은 매일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일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이면서.
참으로 고맙고도 고마운 주인. 그 감사함에 순찰 시간을 소홀히 한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산중지왕. 여러 가지 소동을 통해 호랑이는 아니지만, 리노는 이 칭호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이제 산 새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이 리노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로 했다.
‘멍멍(이제 더는 순찰로 퍼져있지 않아도 돼)!’
드디어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놀 수 있는 조건이 생긴 것이었다!
“멍멍!”
게다가, 김서준은 드워프들과 합심해 야생동물을 위한 놀이터까지 만들어줬다.
놀이터가 완공된 그 날, 김서준은 리노와 노움을 놀이터로 데려왔다. 그리고 리노는 생각했다.
‘멍멍(이건 못 참아)! 멍(얼른 다른 친구들도 데려오자)!’
마침내, 오늘 한껏 들뜬 리노를 따라 모두 놀이터에 처음 가는 날이었다. 리노의 격한 반응에 반달이와 일호 가족들도 한껏 설레며 리노의 뒤를 따랐다.
“멍!”
마침내, 나무를 지나 수풀을 건너 놀이터가 나타났다.
“구오!”
“컹컹!”
반달이와 일호 가족이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나무로 만든 각종 구조물. 거기에 간이 수영장. 그리고 대포처럼 생긴 도구도 보였다.
“구오?”
반달이가 리노를 바라봤다. 리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
그 순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모두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징검다리처럼 생긴 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2호와 3호 그리고 7호. 물로 바로 뛰어든 일호와 4호 5호. 6호와 반달이.
점잖은 1호만이 이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리노가 1호를 바라봤다.
“컹.”
1호는 동시에 옆에 놀이터를 빙 둘러싸고 만들어진 장애물 경주용 트랙을 보며 짖었다.
“멍(도전이냐)?”
“컹컹(받아주시겠습니까)?”
“멍!”
리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둘은 트랙에 한 라인씩 섰다.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들. 단순한 허들과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언덕, 시소와 터널까지. 다양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멍?”
준비됐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1호.
“멍!”
리노의 신호와 함께 경주가 시작된다.
“컹컹!”
“구오!!”
어느새 반달이와 1호 가족이 각자 두 견공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리노의 배려로 꽤 치열한 경주가 이어졌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요리조리 몸을 비틀어야 하는 장대 장애물에서 트랙 위 분위기가 바뀌었다.
-팟!
리노는 하나의 하얀 섬광이 된 것처럼 아주 빠르게 장대 사이를 통과했다. 그 후 결승선 앞에 설치된 가장 어려운 장애물.
진흙이 가득 찬 웅덩이 위에 설치된 움직이는 징검다리를 단숨에 폴짝폴짝 뛰어 넘어버렸다.
“컹···.”
“구오···.”
번쩍하는 순간, 결승선을 통과한 리노를 보며 모든 동물이 입을 쩍 벌렸다.
“구오(역시 왕이다)···.”
“컹(대단해)···.”
동물들이 감탄했다. 뒤늦게 겨우겨우 징검다리를 건넌 1호가 고개를 조아렸다. 리노는 뿌듯한 표정으로 앞발을 들었다.
“멍.”
그리곤 1호를 토닥이며 격려했다. 그때였다. 나무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뛰어 내려왔다.
“멍?”
리노가 놀랐다. 누군가 입산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다람쥐의 말에 따르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멍(사람)? 멍(노인들이라고)? 멍멍(반대편 마을 쪽에서 왔다고)?”
리노가 놀라 되물었다. 주인의 땅이기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 들어왔지 않는가. 거기다 반대편 마을 사람이라니. 이건 무슨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멍멍?’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멍!]
커넥션 링으로 울려 퍼지는 리노의 소리. 동시에 휴대폰에 솟대로부터 알람이 울렸다. 김서준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건···?”
등산복을 입은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김 씨.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겠지?]
[아유. 우리가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당장 죽게 생겼는데! 제대로 하나만 캐면 대박이여.]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작은 소리.
‘불법 산행하는 산꾼들이잖아?!’
김서준은 그 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