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63화 (63/139)

63. 봄이 오기 전에(1)

“성장!!”

박보현의 음성이 밭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밭 전체에 푸른 빛이 뿌려졌다.

-쿠르르···.

흙밖에 보이지 않는 밭의 땅이 움틀거렸다. 그러다 이내 여기저기서 초록색 새싹이 ‘푝푝’ 튀어나왔다.

새싹은 금세 크기를 키워가며 제멋대로 줄기를 뻗어 나갔다. 능력이 이렇게 폭주하고 있건만, 박보현의 표정은 이전과는 달랐다. 여유 있게 현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됐구먼.”

임종철이 등 뒤에서 이야기하자 박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흡!”

짧은 기함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갔던 초록빛이 박보현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제 통제가 엄청 능숙하네요.”

“훈련의 성과지. 자네가 고생했어.”

박보현의 폭주는 몸이 힘에 적응을 못 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평소 1의 힘을 가진 이가 갑자기 10의 힘을 얻게 되니, 통제가 어려웠던 셈.

김서준과 반복적으로 세계수의 힘과 자신의 마나를 통제하는 훈련을 일주일간 반복한 결과.

‘다행이다. 훈련 성과가 있어서.’

이제 하루에 3번 정도는 안정적으로 작업을 해내는 게 가능했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박보현이 김서준을 보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김서준은 금산농장을 정식 업체로 등록했다. 박보현은 금산농장에 정식으로 등록된 첫 번째 직원이었다.

“그렇게 예의 안 차려도 된다니까요.”

“아, 아닙니다!”

물론 박보현은 단순한 직원 이상의 충성심과 애사심을 보였다.

“이제 힘은 잘 적응했나 보네요.”

“아닙니다. 사장님의 힘 덕이죠. 식물이나 땅이 죽을 걱정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져서 능력 통제도 더 잘되는 거 같습니다.”

박보현이 겸손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

“게다가 더 자주 능력을 써야 더 많은 종자를 만들 텐데, 지금은 3번이 최대입니다. 아직 멀었죠. 더 열심히 연마하겠습니다.”

“천천히 하고 차차 늘려가죠. 농사는 잘 배우고 있어요?”

김서준의 물음에 박보현 대신 흐뭇하게 보이던 임종철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만큼은 아니지만, 이쪽도 재능이 있어. 성실하기도 하고. 역시 서준이 자네 보는 눈이 참 대단해.”

김서준이 박보현을 보며 웃었다.

“다행이네요. 잘 하고 있다니.”

“전 그저 지도해 주신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잘한다면, 사부님이 워낙 잘 지도해주시고, 사장님이 워낙 잘 챙겨주시는 덕입니다.”

박보현의 대답에 두 사람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종자는 준비가 다 될까요?”

“다음 주면 준비는 끝날거여. 슬슬 마을 사람들한테 농사 알려줄 준비도 해야겠어.”

“저도 엄민호 셰프랑 정 회장에게 유통 준비 부탁하겠습니다.”

“그려그려.”

“준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보현 씨도요.”

김서준의 말에 웃으며 두 대답하는 둘. 그때 뒤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적은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그러게요.”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던 노을과 엘린의 목소리였다.

“오늘도 오셨네요.”

김서준이 노을에게 인사했다. 노을은 박보현이 이 마을에 제대로 정착하는지,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주일 째 매일 오고 있었다.

‘..라곤 하지만, 그냥 놀러 오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좋은 일이 있다면 엘린과 노을이 친해졌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둘 사이 감돌던 어색한 분위기도 사라졌다.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박보현 씨도 잘 정착한 거 같고. 다음에는 일이 아니라 따로 찾아와야죠.”

“맞아요. 자주 놀러 와요.”

“네. 언니.”

‘언니라니···.’

순식간에 친해진 둘의 모습은 놀라움을 자아냈다.

****

“꽥꽥!”

분주하게 움직이는 토리들과 도리. 그 사이 김서준도 바쁘게 움직였다.

“전정이 쉽지 않구나.”

밭에서 잡초를 제거하고 거름과 비료를 뿌리는 일만큼 사과 농사에서 중요한 게, 소위 가지치기라 불리는 전정이다. 얼마나 잘 가지를 치느냐에 따라 농부의 실력이 나눠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밀식 재배를 하면 더더욱 그렇지.’

김서준은 나무 사이를 넓게 띄우지 않았다. 60cm로 좁게 잡았다. 좁게 그리고 길게 마치 사과를 넝쿨 식물처럼 지주대를 따라 위로 곧게 키운 셈이었다.

‘신농의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영역은 한계가 있으니까. 좁은 곳에서 최대한 많이 사과가 자라게 하려면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

김서준이 여러 가지 사과를 키우는 법을 연구한 결과 그랬다. 임종철 역시 김서준의 말에 동의했다.

“다만, 그것이 초반에 작업을 많이 해둬야 할 거여. 틀 제대로 못 잡으면 농사 다 망치니까 조심혀.”

옆으로 가지를 뻗는 게 방치돼서 나무끼리 서로 간섭하거나 통풍에 문제가 생기면, 전부 새로 해야 할 위험도 있었다.

그랬기에 김서준은 부지런히 옆으로 자라는 작은 잔가지들을 잘라주고 있었다.

‘방향이 이상한 가지는 전부 잘라주자.’

가지가 위로 뽑는데 영양분은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앞서 말한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예쁘네.”

작고 하얀 사과꽃이 전정해서 잘려나가는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분홍빛이 도는 꽃잎은 ‘유혹’이라는 꽃말처럼 김서준의 눈을 사로잡았다.

“사과만 알았지, 꽃은 몰랐는데. 꽃도 예쁘구나.”

결실이 아닌 그 과정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농사의 또 다른 재미. 김서준은 그 귀여운 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레 옆으로 밀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탁!

전정 가위가 꽃이 핀 봉우리 너머로 쭉 이어진 가지를 잘라내 버렸다,

‘이렇게 하면 이 이상 안 자라겠지.’

꽃이 핀 자리는 열매가 맺는 자리. 사과가 맺으면 얇은 가지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개 숙인 가지는 더 자라지 못한 채 열매를 맺는 데 온 힘을 다하게 된다.

‘즉, 최고의 사과를 거두는 거지.’

어느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무 위로 보이는 100%에 다다른 황금색 고리와 활짝 핀 꽃. 그 모든 게 이제 곧 첫 사과 수확 시기를 알리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빨리 빨갛게 익은 사과를 따 먹고 싶었다.

‘거기다 그걸 가지고 드워프가 빚은 술이라니. 진짜 맛있을 거야.’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신농님! 밭 작업 끝났습니다움! 지원 갈까움?]

감자밭과 토종 밭의 일은 대체로 일찍 끝났다. 노움과 움들이 워낙 일을 잘하기도 했고 수도 많았기 때문이다.

[부탁할게.]

김서준은 흔쾌히 수락했다. 처음에는 드워프와 함께 농사를 지었기에 사과밭이 노움의 도움 없이도 수월했다.

하지만, 지금 드워프들은 바빴다.

‘양조장 재료 구하러 사냥도 나가고, 양조장 건설도 하는 중이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지만, 드워프들은 더더욱 바빴다.

물론,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신농의 땅의 힘이 있고 잡초는 토리들이 잡아주니까. 하지만, 노움의 도움이 있다면 더욱 편한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노움이 좋아하기도 했고.’

농사가 일종의 놀이라는 노움은 토리, 도리 와 함께 일하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고 했었다.

[알겠습니다움! 바로 가겠습니다움!]

노움이 오늘도 신이나 대답했다. 동시에 주변에서 움들이 쏙쏙 흙을 헤치고 튀어나왔다.

‘진짜 신기해. 땅에 무슨 전용 통로 같은 게 깔려있나?’

대답과 함께 바로 달려오는 움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신농님!”

물론 노움이 이렇게 허공에서 ‘팟’하고 나타나는 모습 역시 신기하긴 매한가지였다. 조금은 부러울 정도였다.

“왔습니다움! 무엇을 도와드릴까움!”

노움의 밝은 목소리를 듣자 밭 전체가 괜히 활력이 넘치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김서준이 말했다.

“어제 눈 왔으니까 배수로랑 땅 정리해 줄래?”

“알겠습니다움! 모두 시작하자움!”

“움!!”

움들이 모두 노움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망치의 후예들에게 절대 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장인정신’이다. 정한 분야에 한 해서는 누구보다 정통하고 최고가 되려는 그 정신으로 망치의 후예들은 역사에 큰 부분을 차지한 종족이 되었다.

그 안에서도 절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분야가 있었다. 하나는 야금술. 그리고 다른 하나가 지금 우노, 도스, 트레스가 몰두하고 있는 ‘술’이었다.

“트레스, 여기 기울기 좀 너무 심하지 않아? 파쇄 후에 관으로 넘어오는 길에 손상이 심하겠어.”

“도스, 형 말이 맞아. 우노, 조금 더 기울기를 줄여주겠어?”

“알겠어. 클클클.”

사소한 각도 하나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양조장을 짓다 보니, 하루 만에 뚝딱 만든 집과는 달리 벌써 몇 일째 공사 중이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숙성용 통과 내부 설비 만드는 거 같았지.’

간혹 김서준이 자다 창밖을 보면, 드워프들의 집 굴뚝 위로 연기가 올라오는 게 보이는 날도 많았다.

청력이 예민한 엘프인 엘린은 직업정신은 대단하지만, 작업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며 방음 마법을 방에다 걸었을 정도였다.

“힘들지 않아요?”

“멍···.”

김서준이 물었다. 리노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우리의 자존심이 담긴 문제요. 이 술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소. 작은 실수 하나로 그 평생의 노력을 날릴 수는 없는 일이오!”

그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건···.’

김서준은 이 양조장을 금산농원에 대표적인 명물 중 하나로 계획했다. 훌륭한 양조장은 언제나 매력적인 장소이니 말이다.

‘그래서 위치도 산 정상으로 결정했지. 저 멋진 경치랑 시너지가 생길 수 있게.’

사과밭은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산양삼도 이제 곧 연구 결과가 나올 시기. 틈틈이 만든 농원 산책로와 동물들을 위한 놀이터도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양조장 건설로 화룡점정을 찍으면 새싹이 움트는 봄에는 농원을 열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저 속도면 어렵겠지.’

그러나 김서준은 재촉하기를 그만두었다. 이건 재촉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망치의 후예가 가진 장인정신을 존중해서라도, 땀 흘리며 열중하고 있는 드워프의 삶을 존중해서라도 기다리는 게 맞았다.

‘얼마가 걸리든 말이지.’

김서준은 완전히 체념한 체 진심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원은 얼마든 해드릴 테니까, 시간이나 비용 걱정하지 말고 꼭 최고의 시설을 만들어 보세요!”

“클클. 그러리다. 대신 첫술은 꼭 서준과 함께하겠소.”

“기대하겠습니다.”

대신 다른 장치는 필요했다. 김서준의 꿈으로 시작했던 농원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농사가 잘되는 건 농부를 모으는 것만으로 터전을 키우는 건 힘들었다. 터전을 키우려면 더욱 많은 매력이 필요했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말이다.

‘농원도 그렇게 만들려면 포인트가 있어야 해. 양조장이 힘들다면 뭐로 해야 할까?’

계획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실은 양조장보다 먼저 떠올린 아이디어가 있었다.

‘식당을 지으면 좋을 거 같은데.’

유난히 푸른 하늘 아래 농촌 뷰는 꽤 고즈넉하고 좋다. 최근 SNS에서 잘 먹히는 감성을 담은 건물과 함께, 잘 조성한다면 꽤 좋은 포인트가 될 수 있어 보이긴 했지만.

‘믿고 맡길 사람이 없지.’

식당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셰프다. 셰프가 모든 걸 좌우한다. 그런데 김서준은 셰프가 아니다. 스스로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셰프가 되는 상상도 했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믿을 수 없는 사람과 동업하고 투자할 수도 없고···.’

믿음직스러운 드워프 삼 형제와 양조장을 만드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조건이었다.

‘트리처럼 특별한 구조물을 하나 더 만들어 볼까. 아니면 이건 좀 더 나중까지 미뤄둘까···.’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김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음? 엄민호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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