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62화 (62/139)

62. 새로운 친구

“괜찮아요?”

흙길을 걷는 노을을 보며 김서준이 물었다. 뾰족하고 높은 힐이 이런 흙길을 걷기에는 꽤 불편해 보였다.

“아, 그럼요. 괜찮죠.”

노을의 눈이 슬쩍 엘린을 향한다. 엘린은 오늘도 레깅스 위에 하얀색 바람막이를 입었다. 은근히 드러나는 몸매가 섹시하면서도 동시에 세련된 느낌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노을이 오히려 더 과감하게 걸어나갔다.

“조심하세요. 여기 길이 울퉁불퉁하니까요.”

엘린이 그런 노을을 걱정하며 나섰다. 노을은 괜찮다며 오히려 엘린의 복장이 너무 춥지 않냐며 걱정했다.

“온도 유지 마법이 걸려있어서 괜찮아요.”

엘린에 대답에 노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사이는 생각보다 좋아 보였다. 일행들이 향한 곳은 김서준의 토종작물 텃밭이었다.

임종철은 따라온 박보현에게 이야기했다.

“밭에 중앙까지 가보슈.”

“네? 아, 네.”

박보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밭으로 들어갔다.

‘뜬금없이 왜 밭이지?’

박보현의 머리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인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게 될지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 예상했다.

‘근데 말도 없이 밭으로 왔네?’

마늘을 성장시켜보라 했던 그때처럼, 지금도 무슨 일을 하려는 지 도무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박보현은 혹시라도 작물이 밟힐까, 조심스레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이게 뭐야? 진짜 신기하네.’

그러던 박보현의 눈이 빛났다. 박보현의 집은 농부의 집안이었다. 그중에서 박보현은 유별났다. 작물뿐 아니라 모든 식물에 관심과 사랑이 넘쳤다.

‘사랑을 주면 그만큼 결실로 보답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묵묵히 옆에서 곁을 지켜주니까. 그만큼 힘이 되는 애들이 없었지.’

식물 술사가 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박보현에게 이 밭은 무슨 박람회 같았다. 모두 처음 보는 식물에 하나같이 건강해 보였다. 그 흔한 벌레 먹은 자국 하나, 흠집 하나 없었다.

‘생명력이 넘치잖아.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잘 키우셨지?’

거기다 작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이건 작물을 길러낸 농부의 진심이 담긴 게 분명했다. 식물 술사로 수많은 식물과 교감했기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흠흠.”

한참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좀 전에 인사를 나눈 노인이 말했다.

“..구경 다 했으면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되는 겨?”

“아, 죄송합니다. 네. 무엇을 하면 되죠?”

박보현이 흠칫 놀라 물었다.

“거기 앞에 있는 작물 중 하나를 골라 능력을 써봐유.”

“...성장을 시켜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려. 그게 능력이라며?”

“...”

박보현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혹시 하려는 일이 이런 작물을 키우는 일을 시키려는 일이십니까?”

“비슷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겨?”

문제가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작물을 급속으로 키워 생산량을 증대시키기에 자신의 스킬은 좋은 스킬이 아니었다.

“...제 스킬은 분명 성장을 빠르게 시켜주긴 하지만, 형태를 유지 시키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 작물의 생명력도 많이 소진돼서 맛도 떨어지고요. 반대로 땅이 죽는 경우도 있고요. 이런 작물과 좋은 밭이 그렇게 되어 서는 안됩니다!”

“흠···.”

임종철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김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임종철에게 속삭였다.

“..알겠구먼.”

고개를 끄덕인 임종철이 말했다.

“여기 밭에 주인이 괜찮다고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그냥 혀.”

박보현이 놀라 눈이 휘동그래졌다. 당연히 밭의 주인은 저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젊은 남자라니? 저렇게 젊은 농부가 이런 작물을 키워내는 게 가능하다는 건가?

놀라움도 잠시.

“자, 잠시만요. 제가 했던 말 이해를 못 하신 거 같은데, 잘못하면 이거 다 버려야 한다니까요? 게다가 지금···.”

박보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힘이 넘쳤다. 당장이라도 터질 만큼.

“힘을 쓰면 폭주할지도 몰라요···.”

뒤에서 잠자코 있던 김서준이 결국 입을 뗐다.

“폭주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기 최고의 억제기가 있으니까요.”

“제압기라니, 그게 뭐예요.”

노을이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김서준은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작물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지난번에 마늘도 그랬잖아요. 그 마늘도.”

“아, 그 마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힘을 펼쳐보세요. 취직해야죠.”

박보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에서 초록색 빛이 발했다. 빛은 밭으로 점점 퍼져나갔다.

“성장!”

박보현이 짧게 소리쳤다. 그때였다. 낮게 자라있던 작물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점점 커지기 시작한 작물들이 마구잡이로 줄기를 뻗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줄기들끼리 엉키기도 했다.

“머, 멈춰야···.”

넘치는 힘을 통제하기 힘든지 박보현이 반대 손으로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에서는 푸른 빛이 계속 뿜어져 나왔다.

“엘린, 어때요?”

김서준이 물었다. 그러자 푸른 눈동자로 박보현을 바라보며 엘린이 말했다.

“주변에 마나가 보현 씨의 마나에 공명하고 있어요. 서준 씨랑 세계수의 힘이요.”

‘역시 그랬나.’

박보현이 폭주한 위치는 모두 세계수 또는 김서준의 근방이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연습한 대로 하면 폭주를 누를 수 있을 거예요.”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온몸의 마나를 몸의 한 곳으로 끌어모았다.

“흡···.”

몸이 떨릴 정도로 모든 마나가 한점에 모였다.

‘이 상태로 마개를 닫는다고 상상하라고 했지.’

엘린이 알려준 대로 김서준은 마나가 모인 플라스크를 코르크 마개로 닫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몸 가운데 모인 마나의 요동이 점점 사라지며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동시에 김서준이 속으로 소리쳤다.

‘모든 스킬 해제.’

일대에 땅에 걸린 모든 능력을 해제하는 명령. 이번에 김서준의 힘이 강해지면서 새롭게 얻은 능력 중 하나였다.

[잠시 세계수의 가호가 해제됩니다.]

[잠시 신농의 땅이 해제됩니다.]

안내창과 함께 박보현이 말했다

“이, 이건···?”

떨림이 멈췄다. 손에서 뿜어지던 빛도 미약해졌다.

“자, 이제 멈춰요.”

박보현이 김서준의 명령에 따라 능력을 멈췄다. 김서준은 동시에 모든 능력을 다시 원상복귀 시켰다.

“이게 어떻게···.”

박보현은 자신의 능력이 통제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바라봤다.

“잘 했어요.”

김서준이 그런 박보현을 칭찬했다.

“고생했어요.”

“놀랍구먼. 이건 뭐 밭이 아니라 숲이구먼.”

임종철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겨우 싹이 나 있던 토종작물들이 발목 위까지 자라있었다. 파는 허리까지도 올라와 있었다.

“역시나 다들 쌩쌩하네요.”

“땅이 좋아서 그렇지. 그리고···.”

임종철이 파하나를 쑥 뽑았다. 쭉 뻗지 못하고 꼬부랑하게 뻗은 대. 굵기도 제멋대로인 파였지만 싱싱해 보이는 삼동파였다.

“흠···.”

향을 맡은 임종철이 말했다.

“모양이 제각각이라 팔기는 힘들겠지만, 종자로 쓰기에는 이만한 게 없겠구먼.”

임종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가지 작물을 더 확인했다. 연이어 터지는 감탄과 끄덕거림. 임종철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합격이여. 합격.”

****

“보시고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박보현은 책 상위에 놓인 서류를 찬찬히 살폈다.

‘계약이라니···.’

박보현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난리를 쳐놨는데, 좋아하는 것도 모자라 합격이란다.

그리곤 자신을 데려와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

‘이거 계약 조건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숙식 제공에 월급도 600만 원이었다. D급 헌터로서 자신이 최대한 많이 벌었을 때 버는 돈 이 이 정도였다.

이 조건이면 헌터 일을 더 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가 해야 하는 일이 농사와 종자 생산이었다.

‘종자 생산은 뭔지 모르지만, 농사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잖아?’

부모님이 쓰러지신 이후, 완전히 접었던 그 꿈이었다.

“저, 정말 이게 계약 조건입니까···?”

“부족해요?”

“그럴 리가요!”

박보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부족하긴커녕 과분해서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김서준은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 자신은 박보현과 비슷했다. 잘해보려 애썼지만,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을 거다.

‘아니, 매번 실패하고 무시당했겠지.’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게 분명했다. 마음속 어딘가 이미 ‘난 별로야. 난 이런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해.’라는 마음이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제가 이런 조건을 내미는 건 안타까운 사연이나, 박보현 씨가 착해서는 절대 아닙니다.”

김서준 역시 측은지심만으로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한 게 아니었다.

“박보현 씨가 제게 필요하기 때문이죠.”

김서준은 전투가 아닌 행정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만큼의 대가를 받았고, 마지막은 아쉬웠지만 나름의 성공도 거뒀다.

박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능력이 제게 필요합니다.”

박보현이라는 퍼즐이 김서준이라는 계획에 딱 맞았다. 드디어 자리를 찾은 셈이다. 김서준은 자리를 찾은 능력에 딱 맞는 대우를 약속할 뿐이었다.

“박보현 씨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고요. 그래서 그에 맞는 대우를 제안한 것뿐입니다.”

박보현이 김서준과 눈을 마주했다. 김서준의 눈은 덤덤했다.

“큭···.”

박보현이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내려보지도 올려다보지도 않는 저 담백한 시선. 저런 시선을 받은 게 언제였던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매번 무시당하고 누군가가 귀찮아서 떠넘기는 일을 하던 자신이 안되면 안되는 일이라는 말이 괜히 가슴을 울렸다.

“정말, 정말 제 은인이십니다. 가, 감사합니다···.”

박보현은 애써 눈물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주시면 감사하지만, 은인이라는 거창한 표현은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로 윈윈 하는 거니까요.”

박보현은 대답 없이 펜을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서명했다. 지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만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박보현 씨.”

다만 마음 깊이 다짐했다.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

서재에서 두 사람이 계약하는 사이, 소파에도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럼 이 집에 이제 박보현 씨도 사는 건가요? 집이 넓어서 괜찮긴 하겠지만, 불편하겠네요.”

김서준의 계획을 들은 노을이 진하게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러자 잘 우린 녹차 티백을 꺼낸 엘린이 말했다.

“아니요. 보현 씨는 임종철 어르신 네서 생활하신대요.”

“...네?”

“아무래도 서준 씨보다는 어르신하고 많이 일해야 해서요.”

태연하게 대답한 엘린이 다시 녹차를 홀짝였다.

“아, 아니! 왜요! 좀 불편해도 못 살 정도는 아니잖아요”

당황한 노을이 이전에 자신의 한 말을 바로 뒤집으며 반론했다.

“방이나 침대가 더 없기도 하고 어르신도 그렇게 하길 원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작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맘에 들어서 괜찮으면 제자로 키워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아니 어르신 안 불편하시나. 하···.”

노을이 뭔가 답답하다는 듯 커피를 휙 들이켜려다 뜨거워 황급히 입을 뗐다.

“앗뜨뜨···.”

“괜찮아요?”

엘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노을을 바라봤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노을이 순간 감탄하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괘, 괜찮아요. 흘린 것도 아니고.”

“다행이네요.”

엘린이 쌩끗 웃으며 말했다.

“노을 씨는 참 좋은 사람인 거 같아요. 아무리 친구라지만, 매번 이렇게 서준 씨 일도 도와주시고...”

엘린이 들고 있던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우리 친구 할래요?”

엘린이 환한 미소와 함께 노을에게 물었다. 노을이 놀라 눈을 껌뻑였다.

‘이 사람 진심인가?’

웃으면서 하는 기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저 자연스러운 대답과 태도 모두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저 천진한 미소는 너무나도 진심처럼 보였다.

‘나 혼자 오해한 건가?’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엄청난 우군이 생기는 거니까.

“진짜요?”

“네. 전 노을 씨 맘에 들거든요.”

저 환하게 웃는 미소가 거짓말이라면 저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연기 천재이리라.

“그래요. 우리 친구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