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도리와 토리
“저게 무엇이오!”
“오리요? 닭이오?”
“신기한 생명체군!”
수풀을 해치고 도착한 드워프 삼 형제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신비한 생명체는 담담히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리 공! 도리 공도 왔냐움!!!”
노움이 반가워하며 소리쳤다.
“노움, 누군지 아는 거야?”
“물론입니다움! 저처럼 신농을 돕는 바람의 정령! 도리 공 입니다움!”
노움의 반응과 달리 김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움도, 리노도, 드워프도, 엘프도 모두가 같았다.
‘시스템 창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도리라는 존재를 바라봐도 안내가 뜨지 않았다. 대신 다른 내용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리길 거부합니다.]
‘이게 거부가 가능한 능력이었나?’라는 놀라움보다 거부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노움이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데다가, 어차피 신농의 정령인데 왜 정체를 숨긴다는 말인가?
“도리 공! 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 몰랐다움! 오랜만이다움!”
노움은 그런 김서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도리에게 인사했다. 그때였다.
도리라 불린 새의 눈빛이 변했다. 한결 더 날카롭게 매섭게 변했다.
-푸드덕!
하얀 깃털을 휘날리며 거세게 날개를 휘저었다. 새하얀 깃털이 둥실거리며 눈처럼 하늘에서 내려온다.
‘뭐, 뭐지···?’
그 고상한 광경 속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느껴졌다. 동시에 뿜어진 적의는 저도 모르게 피부에 소름이 돋도록 강렬했다.
‘착각인가? 왜 정령이 저런 적의를 뿜어내는 거지?’
김서준만의 감상이 아니었는지, 현장에 있는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오직 노움만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르르···.”
리노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저 기세에 결국 상대를 적으로 인지한 듯했다. 드워프들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냥 새는 아닌가 보군.”
“이거 오랜만에 사냥인가!”
“사냥이라면 나도 끼지!!!”
모두가 전의를 불태우는 사이, 김서준이 나섰다.
“잠시만요.”
모두를 저지한 김서준이 차분하게 물었다.
“넌 누구지? 정말 바람의 정령, 도리인가?”
김서준의 물음에도 도리는 그저 김서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노움, 도리는 원래 말을 못 하나?”
“목소리로 대화하는 일은 없었습니다움···.”
“그래. 알겠어. 리노.”
김서준은 리노가 가진 ‘교감’을 이용하려 했다. 그때였다.
[그럴 필요는 없다.]
커넥션 링을 사용할 때처럼 머릿속에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츠츠츠츳.
동시에 도리의 몸이 하얀빛으로 둘러싸였다. 이내 도리는 은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남자가 되었다. 하늘하늘한 하얀 도박에 음양과 팔괘의 무늬를 수놓은 비단옷은 외모와 어우러져 마치 도사를 연상시켰다.
[그대는 정말 신농인가?]
“뭐?”
[그대가 정말 신농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움이 나섰다.
“무슨 소리냐움! 도리 공! 이분은 분명 신농이다움! 그리고 옆에 나도 있지 않냐움!”
노움이 쓰고 있던 파란 모자를 흔들었다.
“이 모자를 보라움! 노움의 증표다움! 내가 바로 신농의 정령 노움이고 이분이 신농이라는 증거다움!!!”
도리는 대답 대신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순간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땅을 가르며 쏘아졌다.
“움!!!”
노움이 화들짝 놀라 손을 위로 들었다. 동시에 두꺼운 흙벽이 나타나 검날을 막았다. 이제까지 웃고 있던 노움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움!!!!!”
김서준이 처음 보는 노움의 화난 모습이었다. 노움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당장 대답하라며 화를 냈다.
[주변인의 보증이 아닌 신농 자신의 증거를 직접 보여라!]
도리 역시 화를 내며 다그쳤다. 그 순간 김서준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도리의 시험.]
도리는 다른 세계에서 잘못된 주인을 만나 스스로 재해가 되었습니다. 다시는 그 과오를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당신이 신농이라는 걸 증명하세요.
성공 : 도리의 충성.
실패 : 도리가 자유를 얻어 바람으로 돌아갑니다.
신농의 정령이 어떻게 잘못된 주인을 만난 건지. 다른 세계는 무엇인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찌 됐든 사정이 있다는 건가.’
그런 질문은 일단 지금의 사태를 진정시킨 다음에 할 이야기들. 김서준은 화가 잔뜩 난 노움을 뒤로 무르며 말했다.
“조건이 있어.”
[무엇이오.]
“시험이 끝난 즉시, 여기 있는 모두에게 사과해. 애꿎은 이들에게 해코지한 거니까. 아무리 사연이 있어도 말이야.”
[....정령의 권위를 걸고 그렇게 하겠소.]
고개를 끄덕이는 도리. 대답을 들은 김서준은 웃으며 손바닥을 가볍게 펼쳤다. 그리고 작게 읊조렸다.
“소환.”
김서준이 손을 펼쳤다. 찬란한 초록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윽!”
강렬한 빛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리노도 노움도 눈을 꼭 감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김서준만이 그 빛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물푸레나무 가지를 볼 수 있었다.
“이거면 되겠지?”
김서준은 푸른 빛을 뿌리는 짧고 얇은 가지를 도리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건 세계수의 가지···.”
도리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얼마 전에 아리아에 직접 받은 가지야. 진짜라는 건, 너도 알겠지?”
1차 시험 보상 후. 세계수가 내린 보상이었다. 아리아는 이 작은 가지가 신농이라는 증표이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착.
도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바람의 정령. 도리. 신농 님께 군 무례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도리는 바람의 정령이지만, 노움과 달리 태초부터 정령은 아니었다고 한다. 본래는 영물이었는데, 초대 신농과 세계수의 힘으로 바람의 정령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신농이 아닌 자가 저를 불렀습니다. 이 전 세계에서요.]
처음에는 신농인 줄 알았다고 한다. 엄청난 생명력을 뿜는 나무와 노움까지. 모든 게 신농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실상은···.
[드래곤이었습니다. 정령 술에 능했던···.]
드래곤과의 계약은 너무 강력해서 풀 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드래곤의 성향이 문제였다.
[드래곤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온 세계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모든 보물을 독차지했습니다.]
도리는 드래곤의 검이 되어 그 일을 최전선에서 도왔다고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드래곤은 세상에 질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계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세계로?”
[어딘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였습니다. 저는 그다음 폭주했고 재해가 되어 세상을 뒤엎었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 세계였습니다.]
도리는 슬픈 얼굴로 애써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김서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욕심 많은 드래곤 놈들이 다른 세계에도 있었나 보군!”
“그 탐욕스러운 자식들이 기어코!”
이야기를 들은 드워프들이 부들거렸다. 아무래도 드워프들 역시 드래곤에게 당한 바가 있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를 경계했구나.”
[죄송합니다.]
도리가 길게 늘어뜨린 은발을 찰랑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도리 공. 고생 했다움···.”
노움은 부웅 날아 그런 도리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걱정하지 말라움! 우리 신농님은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라움! 완전 다르다움!”
노움이 말하자, 우노가 거들었다.
“클클클. 그렇지. 우리도 받아주고 말이야. 이번에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니, 몬스터도 사냥할 수 있게 해주셨고.”
“우노. 그뿐인가. 이번에 트리는 어떻고? 토종작물도 그렇고. 욕심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분이지. 클클.”
“바람의 정령이여. 우노, 도스 말처럼 여기 계신 서준은 아주 대단하고도 착한 분이야. 걱정하지 말고 신농을 모시는 데 힘쓰시오!”
괜히 부끄러워진 김서준이 모두를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도리를 보고 말했다.
“다들 조금 과했지만, 하나는 약속할게. 여기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드래곤도 없고, 난 세상 모든 걸 가지고 싶은 생각도 없거든.”
김서준이 그런 둘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모두가 행복한 터전을 만들 거야. 그리고 조금씩 키워서 모두가 행복한 세계가 되면 더 좋을 거고. 도리. 우리를 도와줄래?”
도리는 김서준부터 자리에 있는 한명 한명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진정한 신농님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움 때처럼 계약은 가볍게 이뤄졌다. 도리는 충성을 맹세했고 메시지창과 함께 계약은 성사되었다.
“꽥!”
도리는 다시 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드워프나 엘프의 전설에 의하면 땅의 정령이 농사를 도왔다면 바람의 정령은 신농을 지키는 호위무사와 같았다고 했다.
‘하긴 그 기세가 대단했지. 리노 역시 전력을 다해 붙었다면, 이길 수 없을 거 같다고 했고.’
하지만, 그건 김서준이 위험할 때의 이야기.
신농의 정령의 기본은 농사를 돕는 일이었다.
“꽥꽥!”
도리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하얀 새들이 산속 곳곳에서 날아올라 모여들었다.
“호오···.”
“토리들이다움!”
모두가 멋진 광경을 보는 데 노움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종족 : 토리족]
오리와 닭의 습성이 합쳐진 조류족. 다른 종족과 곧잘 교류한다. 보통 농사를 돕고 알을 낳는 대신 거처와 먹이를 얻는다. 종족의 우두머리이자 바람의 정령 ‘도리’를 따르며 충성과 의리를 절대적 가치로 생각한다.
이제 도리에 대한 안내창이 보였다.
‘도리와 토리라.’
김서준은 한껏 기대하며 날 오는 새들을 바라봤다.
“꽥꽥!”
도리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깃털로 뒤덮인 유려한 몸체를 가진 새들이 연이어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리곤 도리의 지시를 따라 김서준의 앞으로 도열 했다.
노란색 부리는 닭처럼 뾰족하고 머리에 달린 벼슬은 붉은색으로 화려했다. 그 앞에 선 도리가 짧은 꼬리를 흔들었다.
-츠츠츠츠.
그러자 빛과 함께 도리의 꼬리가 붉게 장식된 화려한 문양을 가진 꼬리로 바뀌었다. 두 개의 기다란 깃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전설 속의 사성수인 주작 같은데?’
멋진 모습. 이게 도리의 본래 모습인 듯했다. 김서준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꽥!”
20마리의 토리들은 도리의 지시를 따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김서준의 인사를 들은 토리들이 도리의 지시를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막 완성된 사과밭으로 퍼져나가는 토리들은 싹이 튼 잡초들을 박멸하기 시작했다.
“꽥꽥!”
“벌레나 잡초는 도리와 토리 공들에게 맡기시면 된다고 말 합니다움!!”
노움은 도리 전문 번역가가 되었다. 아까처럼 전음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인간의 몸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생각보다 힘들다고 하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더군다나 토리를 진두지휘하려면 오리의 형태가 편해 보였다.
“꽥꽥!”
“달걀은 매일 아침 7시에 받으러 오면 된다고 합니다움!”
“꽥꽥!”
“개체 수는 점점 늘려가겠다고 합니다움!”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밥은 어떻게 하지? 미트루트 주면 되나?”
“그래도 되고, 주변에 물가에서 직접 사냥도 할 수 있습니다.”
“주변 물가?”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수산에 물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하수부터 시작해 졸졸 흐르는 계곡은 있었다.
‘거기서 사냥은커녕, 노움과 리노가 물놀이하기도 버거운 정도인데···?’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하다 저수지를 떠올렸다.
‘신성저수지를 말하는 건가? 근데 거긴 여기서 거리가 3km가 더 걸리는데···?’
김서준이 신성저수지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저기 멀리 있는 저수지 말하는 거야?”
“꽥꽥!”
“저수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쪽에 있는 물가가 맞답니다움!”
“대단하네. 안 힘들겠어?”
“꽥꽥!”
“괜찮다고 합니다움!”
그 순간 김서준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금산마을이 유기농법의 선두주자가 될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