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침입자의 정체
“서준. 다시 생각해도 이 세계 인간들은 참 지혜롭군!”
사과나무를 심던 우노가 감탄을 토해냈다. 함께 작업을 이어가던 토레스와 도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이 감탄한 이유는 드워프와는 전혀 다른 사과 농사를 짓는 방식 때문이었다.
“이렇게 다른 품종 두 그루를 접목해 키울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김서준이 웃었다.
사과를 그냥 종자부터 키워내면 성목이 되기까지 대략 7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작업하기에 불편한 정도로 크게 자라기도 하고.’
그걸 해결한 게 접목이었다. 나무의 크기이자 성장을 결정하는 대목을 심고. 가지에 원하는 품종의 사과나무를 접붙여 키우는 방식이었다.
‘드워프나 엘프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지.’
그들의 삶은 길었다. 7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대목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마법의 도움도 있을 테니까. 더더욱 그랬겠지.’
거기에 대목의 이유는 단순히 성장에 대한 통제뿐이 아니었다. 맛에서도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저렇게 자연에서 자란 사과는 우리가 아는 열매가 아닌, 능금으로 자라나기 때문이었다.
‘더 작고, 맛도 셔서 먹기 좋은 과일은 아니지.’
드워프나 엘린이 사과를 술을 만드는 재료로만 생각한 거도 그 때문이었다. 김서준은 사과를 먹기 위해 키운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이 세계의 사과를 직접 사서 그들에게 먹여줘야 했다.
“이게 이 세계의 사과라는 말이오?”
“알이 엄청 크군!”
“달아요! 새콤달콤한 게 엄청 맛있어요!”
당연히 엘프와 드워프는 신세계를 맛본 듯한 놀라운 반응을 보였고, 이제는 새로이 사과를 키울 생각에 설레고 있었다.
‘이런 거 보면 농사라는 게 참 신기한 거야. 땅, 종자, 기르는 방법이 조금만 달라도 이렇게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니까.’
김서준이 농사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사이, 노움이 드워프 둘에게 소리쳤다.
“이래서 편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움! 적당히 힘들어야 발전이 있는 법이 다음!”
김서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클클클! 노움 말이 맞소!”
“그러니까 더 열심히 더 빠르게 일하라움!!”
노움이 작은 손을 휘저으며 작업을 재촉했다.
“알겠소. 클클클!”
“움!!!”
드워프와 함께, 옆에서 함께 일하던 움들이 대답했다.
드워프가 대목을 심고 있는 사이, 움들은 드워프가 잘 심은 대목 줄기를 땅에 미리 박아둔 파이프에 연결하고 있었다.
이 파이프는 지진이나, 산사태, 태풍 등이 닥쳤을 때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견디기 위해 만든 지주시설이었다.
“움움!!”
움들은 끈으로 나무와 파이프를 단단히 연결했다.
“오호, 작업이 한창이구먼.”
“어, 어르신 오셨습니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김서준이 놀라 인사했다. 우노와 도스, 트레스도 반갑게 인사했다. 술친구가 된 네 사람은 이제 꽤 친한 사이였다.
“다들 열심히구먼. 어떻게 잘 돼 가고?”
“이제 접목만 마무리하면 될 거 같습니다.”
김서준이 밑에 가득 쌓인 사과 가지를 보며 말했다.
“이게 감홍인가?”
임종철이 그 가지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감홍은 사과 품종 중 가장 달고 맛있으며 고급 품종으로 유명했다.
“정말 괜찮겠나? 키우는 게 쉽지 않다던데···.”
감홍을 키우기 가장 힘든 이유는 병 때문이었다. 영양소에 민감해서 결핍증도 자주 생기고, 병충해에 아주아주 취약했다.
‘그리고 병충해와 영양소 관리는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고.’
신농의 땅 만큼 저 분야를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이나 방법은 없으리라 자부했다.
‘게다가 리노가 발견했던 사과들의 품종도 감홍이었지.’
능금의 형태긴 했지만, 껍질이 거뭇한 감홍 열매였다. 아마도 세계수가 주변 땅의 영양분을 풍부하게 만든 탓에 자연에서도 겨우겨우 자생한 듯했다.
‘그런 품종에게 제대로 판을 깔아줬으니 아마 엄청 맛있게 잘 자랄 테지.’
물론 그 감홍으로 만든 술은 더더욱 대박일 터. 상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다.
“그래서 접목은 어떻게 하려고?”
“깎기접으로 하려고 합니다.”
깎기접은 접목 방법 중에서도 가장 흔하고 쉬운 방법이었다. 임종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한번 봐주지. 한번 바로 해보게.”
“알겠습니다.”
김서준은 땅 위로 드러난 얇은 대목 줄기를 한 손으로 잡았다. 반대 손에는 본래 몬스터 사냥용으로 쓰이는 작은 단검을 쥐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C급 단검은 얇은 나무를 종이처럼 쉽고 깔끔하게 베어 가르고 홈을 만들었다. 깎기접에서 첫 단계는 대목에 이렇게 홈을 만드는 일이었다.
다음은 접목한 묘목을 비스듬히 자른다. 마치 빨대처럼 비스듬하고 뾰족하게 나는 단면. 그 단면 그대로 홈에다 묘목을 꽂았다.
마지막으로 김서준은 접목용 비닐 테이프로 그 부위를 둘둘 감았다.
‘공기나 물이 안 들어가게 조심히 해야 한다고 했지.’
-툭.
마지막으로 테이프를 이로 끊어 마감하는 거로 접목이 끝났다.
‘깔끔하네. 연습보다 더 잘 된 거 같아.’
김서준의 생각을 반증하듯 ‘-짝짝’ 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이제 도와줄 필요가 없겠구먼.”
임종철이 환하게 웃으며 칭찬했다.
“나보다 더 잘하는 거 같어.”
“어르신이 잘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연습도 많이 했고요.”
“껄껄. 그려그려.”
김서준답게 겸손한 태도에 임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자네 밭에는 간밤에 뭔 일 없었는가?”
“밭이요? 어제 수확이 끝나긴 했는데 별일은 없었습니다.”
“흠, 다행이구먼. 사실은 어제 금수산에 새때가 날아오르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어.”
“새때요?”
“그려. 오리 같았다곤 하는디. 정확히는 모르겠구먼. 그 뒤로는 낌새도 안 보이고. 하여튼 조심혀. 새한테 잘못 걸리면 밭 작살나는 겨.”
이 날씨에 새떼라고? 금수산이 따뜻하다는 소문이라도 나서 철새들이 내려앉을 걸까? 김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
반달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리노의 지시대로 구역을 나눠 침입자를 찾았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자신의 구역에 침입자가 있었다!
더군다나 침입자의 정체를 보라!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을 마시는 하얀 궁둥이. 그 아래 달린 갈퀴가 달린 작은 두 다리.
‘구오(맛있겠군)!’
오리였다. 침입자가 아니라 오리였다는 결과는 허무하고 소란을 피운 거 같아 리노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추릅.
맛좋은 단백질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자꾸만 입에 침이 고였다. 반달이는 천천히 오리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맞았을 때, 땅을 박차고 포효하며 튀어 올랐다.
“구오!!!”
오리는 여유롭게 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반달이를 정면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꽥.”
“구오!!”
반달이는 침입자를 향해 포효했다.
부리가 닭처럼 뾰족하고, 머리에는 붉은 갈퀴가 있었다만 반달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갈퀴가 달린 오리발. 저보다 명백한 오리라는 증거가 어디겠는가?
더군다나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 참 맛있어 보였다.
-추릅.
반달이는 고인 침이 땅으로 흐르기 직전 겨우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얼른 맛보고 싶었다. 미트루트도 좋지만 고기는 고기만의 맛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구오!!!”
반달이가 포효했다. 그러자 오리가 마치 공작처럼 양 날개를 쫙 펼치고 소리쳤다.
“꽥! 꽥!”
‘구오. (귀엽네).’
용기는 가상하다만, 포식자 앞에 선 귀여운 반항일 뿐. 오히려 이런 태도는 사냥하기 편하고 좋았다. 반달이는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그리고 완전히 기를 죽이기 위해 다시 한번 포효하려고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는 그 순간.
“구···.”
-푸드덕! 퍽!
오리가 날개를 휘둘러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게 꽤 얼얼하다. 정말 오리가 맞나 싶었다.
그래 봐야···.
“꽥!”
한 번 더 반대쪽 뺨을 후려갈기는 오리. 반달이는 그때 알아챘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하지만 늦었다.
오리는 눈매가 한껏 더 날카로워지더니 점프를 펄쩍 뛰었다. 그리곤 날개가 쉴새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드덕!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반달이의 고개도 양쪽으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고양 쪽에서 엄청난 고통이 뇌를 흔들었다.
억울했다.
지난번에는 웬 강아지가 자신을 한 발로 제압하더니, 이번에는 무슨 놈의 오리의 날개가 이렇게 맵다는 말인가?
‘구오···.’
반달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새한테 맞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보다···. 너무너무 아팠다. 양 볼이 얼얼하다 못해 두꺼운 가죽이 너덜너덜해질 거 같았다.
[구오!!!]
반달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리노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게 맞는 와중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꽥꽥.”
전의를 잃은 눈동자를 읽었는지 오리가 공격을 멈췄다. 동시에 반달이의 거대한 몸집이 쓰러졌다.
오리는 뒷짐 지듯 양 날개를 접었다. 그리곤 쓰러진 곰을 보며 무어라 훈계했다.
“꽥꽥!”
반달이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때였다.
“멍!”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렸다. 오리의 고개도 휙 돌아갔다. 수풀을 빠르게 가르는 소리. 분명했다.
산중지왕(山中之王). 이제껏 본 짐승 중 가장 강한 짐승이 오는 소리였다.
“멍!”
풀을 가르고 자신의 왕이 짧은 다리로 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반달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구오(오셨군요)!!”
반달이의 울음소리에 리노가 대꾸했다.
“멍멍(침입자한테 당한 거냐)!!!”
“구오(죄송합니다)···.”
리노의 눈이 휙 돌아갔다. 자신만큼이나 곱고 새하얀 깃털을 가진 오리처럼 생긴 생물체가 보였다.
‘멍(저게 침입자)···?’
리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침입자를 바라봤다. 보기에는 위협적인 침입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달이를 쓰러뜨렸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더군다나, 반달이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보였다.
부하를 건드린 적이 어찌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그르르···.”
리노의 눈매가 변한다.
“멍(넌 누구냐)? 멍멍멍(누군데 침입해서 우릴 공격한 거지)?”
“꽥꽥(작은 아이야). 꽥꽥(그냥 간다면 모른 척해주마).”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멍(강적)!’
‘꽥(이것 봐라)?’
순간, 서로의 강함을 한눈에 알아본 둘. 그러나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기세를 끌어 올린다.
리노가 발톱을 세웠다. 그러자 침입자도 날개를 치켜들었다.
“멍!”
“꽥!”
기합과 함께 둘은 땅을 박찼다. 하얀 다리와 하얀 날개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구오(대단해)!’
두 솜뭉치는 반달이의 눈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맹렬한 전투의 여파로 주변의 낙엽이 날아올랐다. 그 기세만으로 반달이의 몸이 떨릴 정도였다.
‘구오(진정한 맹수들의 싸움이란 이런 건가)!’
한치의 밀림도 없는 팽팽한 공방전을 치르고 두 맹수가 다시 땅을 밟는다.
“멍.”
“꽥.”
서로를 인정하는 짧은 한마디. 그리고 다시 전투가 이어졌다.
-쾅! 펑! 휘융! 쿵! 퍽! 펑!
전투의 여파가 금수산을 울렸다.
“이게 무슨···?”
사과밭에 있던 일행들이 놀라 하던 일을 멈췄다. 맹렬한 전투의 소리였다. 산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김서준은 곧장 리노를 불렀다.
[...]
리노가 전투 중인 건지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서준, 이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오!”
“서준, 우리가 확인하러 가도 되겠소?”
“저도 가겠습니다움!”
우노와 도스가 물었다. 트레스 역시 들고 있던 나무를 내려놓았다. 김서준은 말했다.
“다 같이 가죠.”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서라도 함께 움직이는 게 좋아 보였다. 김서준을 필두로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서준은 달리면서 알람을 확인했다. 솟대가 감지한 침입자는 없었으니 안에서 나타난 게 확실했다.
‘안쪽에서 나타난 거라면, 또 이계의 존재인가?’
리노는 강했다. 어지간한 헌터보다도 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상대가 이계에서 넘어온 미지의 존재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조바심이 났다.
“조금만 빨리 가죠!”
김서준은 조바심에 ‘-쿵!’ 소리를 따라 전력으로 질주했다. 옆에 날아가던 노움도 그 뒤를 따라 박차를 가했다.
“엄청나군.”
“저렇게 체력이 좋았나?”
“도스, 트레스! 질 수 없다! 얼른 뛰어라!”
드워프 들도 감탄과 함께 더 빠르게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주변이야!’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 멀리 하얀 물체 두 가지가 부딪히는 게 보였다. 김서준은 케레스의 농기구로 삽을 꺼냈다.
“리노!”
리노의 짧은 앞발이 오리의 날개와 맞부딪히고 있는 게 보였다. 김서준이 삽을 휘두르며 현장에 난입했다.
-붕!
두 맹수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삽은 허공을 갈랐다.
“괜찮아?”
김서준이 리노에게 물었다. 리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서준이 반대편을 바라봤다.
‘오리? 아냐. 좀 달라. 저게 뭐지?’
닭과 오리를 합쳐놓은 듯한 모양. 그때 김서준의 뒤를 따라온 노움이 말했다.
“...도리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