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내가 만들 터전
‘아리아가 부른 다라···. 새로운 미션이라도 주려는 건가?’
김서준은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헌터 용 트레이닝복 위로 엘린이 준 바람막이였다.
“서준 씨!”
내려가니 엘린이 잠옷 바람으로 거실에 나와 있었다.
“방금 메시지 봤죠?”
“네. 봤습니다. 자격시험이 거의 달성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리아가 부르네요?”
“아리아면, 세계수 님이요?”
엘린이 되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처음 듣는 눈치였다.
“제가 본 건, 사비오의 싹이 텄다는 것과 아쥴이 자란다는 거예요. 아쥴이라니. 진짜 놀랍네요.”
아쥴은 본래 엘프의 숲에서 흔히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다니 끝내 멸종되었다고 한다.
“그런 아쥴을 다시 볼 줄이야.”
탐구심과 반가움. 두 가지가 공존한 엘린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잘됐네요.”
“서준 씨 덕분이죠. 근데 세계수님께서는 왜 부르는 걸까요?”
“글쎄요. 일단 가보려고요.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같이 가요. 어차피 연구실에 가야 하니까요.”
“그래요.”
‘급할 필요는 없지.’
아리아의 호출은 긴급 사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아침부터 보러 가는 건 설렘 때문이지, 조급함 때문이 아니었다.
잠시 후, 레깅스와 패딩으로 갈아입은 엘린과 함께 김서준은 밖으로 나섰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리노가 달려왔다. 김서준과 엘린은 자세를 낮추고 그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잘 잤지?”
“멍!”
리노는 이른 아침부터 여지없이 활기찼다. 김서준은 그런 리노의 머리를 쓰다듬고 손, 엎드려 등 가벼운 애교를 감상한 후, 노움을 소환했다.
“신농님! 사비오가 싹이 텄다니, 축하드린다움!”
“고마워.”
반갑게 인사를 나눈 노움이 리노의 등 위에 올라탔다. 집 밖을 나서니 여지없이 드워프 삼 형제가 보였다.
“흡! 후!”
삼 형제는 자신들의 집 밖에 간이 헬스장을 만들었다. 철봉은 물론이고 무식하게 큰 역기나 덤벨도 있었다.
‘저런 걸 도대체 어떻게 드는 거지?’
김서준도 헬스장에서 운동했지만, 저 정도 무게를 들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반면, 드워프들은 각자의 어깨와 팔에 그런 것들을 하나씩 올리고 운동 중이었다.
‘우노는 진짜 경악스럽네.’
우노는 역기 양 끝에 쇳덩어리를 자기 몸보다 큰 것들로 달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봉이 버티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신농! 좋은 아침이오!”
각자 운동을 하던 드워프 삼 형제는 김서준을 보곤 인사했다.
“바닥에 이거 보시오!! 아쥴이라니! 전설 속 농부들이 가장 사랑한 잡초를 내 눈으로 보게 된다니!”
우노의 말대로였다. 여기저기 파란 무늬를 가진 풀이 보였다. 엘린은 이미 몇 뿌리를 뽑아 수집하고 있었다.
“정말 고맙소! 클클클.”
“신농. 과연 대단하오!”
“신농. 그리고 사비오의 싹을 틔운 걸 축하드리오!”
우노, 도스, 트레스는 그렇게 한마디씩 덕담과 칭찬을 건넸다. 김서준 역시 환한 미소와 격려로 되돌려 주었다.
-사악.
결계를 넘자 초록이 가득한 언덕이 나타났다.
‘오늘도 상쾌하네.’
가득 넘치는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김서준이 심호흡을 들이쉬었다.
“저는 바로 가볼게요.”
세계수에 언덕에 오자마자 엘린은 곧장 연구실로 가겠다고 했다. 약초에 관해 탐구하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인듯했다.
“서준 씨, 잘 하고 오세요.”
응원과 함께 엘린이 떠나고, 김서준도 리노와 노움에게 말했다.
“다녀올 테니까, 잘 놀고 있어.”
“신농님! 다녀오시라움!”
“멍멍!”
리노와 노움과 인사를 나눈 김서준은 담을 넘었다. 세계수와 잠시 마주 선다. 트리의 웅장함과는 또 다른 느낌의 거대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려나.’
아리아와의 질의응답? 아니면 쪽지 시험이라도 보는 걸까. 김서준은 이런저런 가벼운 상상과 함께 황금색 꽃봉오리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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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스친다. 사방에서 풍기는 풀 내음은 마음을 보듬는 기분이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잔디는 푹신했다.
눈을 감은 채 누워있지만, 감각만으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서준. 일어나야지!”
아리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많이 컸네.”
그게 첫 감상이었다. 지난번에는 어린 소녀였다면 지금은 좀 더 성숙한 소녀의 느낌이었다. 들판에 잘 어울리는 초록색 원피스도 좀 더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머리 색도 신기해졌고.”
아리아가 초록색으로 변한 머리칼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서준 덕분이지. 조금씩 성장하고 있거든.”
“다행이네.”
아리아는 여지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엘린부터 드워프 삼 형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봤다.
아리아가 있는 이 들판에 들어오면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졌다. 사람이 한결 여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리아와의 대화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에서 환영이었다.
“이리 와. 앉아봐.”
김서준은 아리아를 옆에 앉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진짜? 빛 쇼를 했다고? 나도 보고 싶다.”
“나중에 네가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 노움하고 리노한테 다시 부탁해볼게.”
그렇게 마지막 이야기가 끝났을 때, 김서준이 물었다.
“근데, 아리아. 궁금한 게 있어.”
“응?”
“자꾸 다른 세계의 존재가 넘어오는 건 너 때문이야?”
“음. 일단 나랑 상관이 없진 않아.”
“그게 무슨 의미야?”
“미안. 서준. 지금 알려줄 수 있는 건 이제 전부야. 비밀을 듣기엔 서준의 자격이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
비밀을 알고 싶다면 권한을 갖추라는 건가.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지, 그래도 힌트를 주자면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 이 세계로 오게 될 거야. 지금 같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같을지는 모른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여태 이계의 존재들은 전부 호의적이었다. 악의는 없었고 순수한 존재들이었다.
‘만약 저들이 세계수나 무언가 나쁜 의도가 있었다면 큰일이었겠지.’
엘린이 마법으로 세계수를 독점하려 했다면? 드워프 삼 형제가 마을을 점거하고 땅을 전부 독차지하려 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리아는 대답은 그런 의미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리아가 눈을 찡끗했다.
“맞아. 하지만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직은 괜찮거든.”
“아직은, 이라는 건,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응. 안타깝게도.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아. 지금은 일단 터전을 일구는 데 집중해줘.”
아리아는 괜찮다고 했지만, 김서준은 머릿속 어딘가에 지금의 대화를 잘 간직해두었다.
‘유비무환이니까.’
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자리를 팽그르르 돌자 초록색 드레스가 우아하게 함께 돌아갔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가서 자격시험을 마무리해 볼까?”
“그래. 마지막으로 내가 할 일은 뭐야?”
“간단해. 서준이 지금 하던 일을 생각하면서 내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주면 돼.”
온화한 미소를 지은 아리아가 물었다.
“서준은 앞으로 어떤 터전을 만들 꺼야?”
“터전?”
고민할 게 없었다. 이미 수차례 스스로 던졌던 질문이었으니. 답은 명확했다. 김서준은 수차례 자신이 결론을 내린 그 답을 입에 올렸다.
“작물과 사람 누구도 불안하지 않은 장소.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곳. 그래서 아무도 떠나고 싶지 않은 그런 터전을 만들고 싶어. 금산마을을, 금산면을, 어쩌면 그 너머 모든 사람이 그런 터전을 가지면 좋겠어.”
아리아는 환한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곤 오른손을 들어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김서준의 몸이 허공에 떠 있었다. 발밑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다.
몇몇 가족들이 그 위에서 설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들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그중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저건 최 씨 할아버지?’
임종철의 설득으로 이사를 미룬 슈퍼를 하는 최 씨 할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할아버지의 마른 팔을 쥔 손녀가 말했다.
“할부지, 여기 완전 쪼아! 이사 안 가면 안 돼?”
“그럴까?”
“웅웅!!”
장면이 바뀐다.
임종철과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이 풀이 그렇게 대단한 풀이여?”
“아까 본 그게 헌터들이 본다는 그 시스템이라는 거유. 거기 나오면 다 그대로 되는 거유.”
임종철은 시스템 창을 설명하며 풀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풀에 서준이네가 가져온 토종 작물까지 심으면 대박 나겠구먼.”
“그 정도여?”
“다음 해 농사는 다들 기대하셔도 좋을 겨.”
“햐, 이제 농사 그만두려고 했는데, 한 번 더 해야겠구먼.”
다시 풍경이 바뀐다. 이번에는 세계수의 언덕.
“신농님은 언제 오시려나움?”
“멍!”
즐겁게 노는 리노와 노움.
“진짜 서준 씨는 대단해. 이런 풀이라니!”
연구실 안에서 웃으며 현미경을 바라보는 엘린.
“도스! 트레스! 과연 신농의 요리 솜씨는 대단하군. 풀떼기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는 건가!”
“우노, 칭찬은 좋은데, 천천히 먹어라. 이러다 네가 다 먹겠군.”
“트레스, 맛있는 음식 앞에서 우노에게 그런 말이 의미 없다는 건 100년 넘게 겪어서 알잖아.”
김서준이 해준 반찬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드는 드워프 들까지.
모두 행복한 모습이었다. 김서준의 입에도 어느새 그만큼 행복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휘잉.
바람 소리와 함께, 김서준은 다시 아리아와 있던 들판으로 돌아왔다. 아리아의 옆에 하얀빛들이 떠 있었다.
“서준, 이 아이들의 기분을 느껴볼래?”
“기분을?”
“눈을 감고 느껴봐.”
김서준은 아리아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편안함. 따뜻함. 안도. 그리고 감사의 감정이 느껴졌다.
“이 아이들은 설마···?”
“작물에 깃든 정령들이야. 서준 덕에 이렇게 다시 세상에 뿌리를 내렸지. 다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데.”
“상생하는 건데. 고마울 필요 없어. 아니 내가 오히려 고맙지.”
“서준 다운 말이네.”
미소를 짓는 아리아의 머리가 날렸다. 금색과 초록색의 조화가 어우러져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방금 본 장면부터, 이 아이들까지. 모두 서준이 이룬 거야. 정말 대단해.”
아리아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서준은 지금 한 대답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기도 하고. 아주 맘에 드는 대답이었어. 앞으로도 지금처럼 모두가 이 땅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잘 도와줘.”
“걱정하지 마.”
“첫 번째 자격시험은 이걸로 끝이야. 두 번째 시험은 터전을 잘 가꾸다 보면 시작될 거야. 그럼 그때 또 봐.”
아쉬운 인사와 함께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마지막까지 손을 흔드는 아리아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김서준도 그 미소를 따라 입으로 초승달을 그렸다.
“후···.”
심호흡과 함께 김서준은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어찌 된 일인지 김서준은 세계수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아리아의 배려였나. 고맙네.”
김서준은 기분 좋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신농 김서준이 세계수에게 첫 번째 자격을 인정받았습니다.]
[신농의 능력이 대폭 강화됩니다.]
[케레스의 농기구로 더 좋은 농기구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신농의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영역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신농의 정령이 강해집니다.]
[새로운 스킬 ‘급속 성장’을 습득합니다.]
[‘금수산(錦繡山)’ 일대를 신농의 땅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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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창이 쏟아졌다.
기존에 갖춘 능력이 강해진 것도 모자라 새로운 스킬도 습득까지. 하나하나 주옥같은 이야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수가 금산마을에 가호(Lv. 1)를 내립니다.]
[금산마을에서 자라는 작물은 병충해에 강해집니다.]
[세계수의 강한 생명력에 영향을 받아 더욱 빠르게 자랍니다.]
[풀이 악성 마나를 흡수하고 변이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세계수의 가호로 이 땅에 더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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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능력을 넘어 마을 전체에도 영향을 끼치는 메시지들까지 쭉 이어졌다.
‘대단해.’
그 수많은 메시지 중 마지막 메시지가 김서준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계수가 신농의 터전(Lv. 1)을 인정합니다.]
[금산마을은 신농 김서준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진짜 터전이 됐어···."
김서준이 신농으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걷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