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크리스마스
“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전소민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귀여운 잠옷 속 웃고 있는 곰돌이 문양과 달리 전소민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이렇게 힘든 건 오랜만이네.”
헌터로 각성한 이후로 육체적인 피로를 느낀 적은 아예 없었다. 그런데 정신적 스트레스가 함께 온 탓일까. 오래간만에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잘 했어. 잘 한 거야. 고생했다 소민아.”
전소민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근래 스스로가 이보다 더 대견했던 적이 없었다.
‘서준이 덕이지.’
김서준 덕에 결단을 내렸다. 초심으로 돌아갔다.
길드를 크게 키우고 싶은 게 아니었다. 사람들을 지키고 떳떳한 헌터로서 우뚝 서고 싶었다.
그랬던 꿈이 어느새 최고의 길드를 만들겠다고 변질되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못된 짓도 저질렀다.
‘진짜 멍청했어.’
뒤늦은 후회 속에 전소민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김서준이 조언했듯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바로 잡기로 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MP사와의 계약 해지.
비리 조사 및 해결.
썩은 파벌싸움과 그 싸움에 눈이 먼 길드원의 대거 해고.
전소민은 눈 딱 감고 모든 일을 자행했다. 그런 전소민의 뒤를 밀어준 이들이 있었다. 한 비서를 필두로 한, 소위 김서준 사단이었다.
‘진짜 고맙게···.’
그들은 무너져가는 길드를 보며 이미 반쯤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김서준은 전소민 몰래 그들에게 연락을 돌렸던 것.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리고 오늘.
숙청은 끝났다. 재정비도 끝났다.
청룡 길드는 다시 규모가 작아졌지만, 길드원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고 한가지 신념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 맘에 들었다. 딱 지금이 좋았다.
이대로 잘 꾸려서 지난번과 과오는 저지르지 않으리라.
‘이미 고맙다고 말했지만, 다 끝났으니 한 번 더 고맙다고 이야기해야겠지?’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잠깐 서울로 초대한다고 해볼까. 고맙기도 하고 이제 곧 크리스마스니까, 친구끼리 그정도는 괜찮지 않나?
왜인지 그렇게 하나하나 자기를 설득하듯 생각한 전소민은 끝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고맙···. 음 너무 뜬금없나. 잘 끝났...이건 너무 사무적인데···.”
오늘따라 모든 말이 어색했다. 전소민은 고심을 반복하며 문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헉!”
전화가 울렸다. 화면이 바뀌고 김서준의 이름이 액정 전체를 채웠다.
“앗!”
너무 놀라 전소민이 휴대폰을 놓쳤다. 그랬다가 재빨리 휴대폰을 다시 낚아챘다.
‘진짜 왜 이래.’
S급 헌터의 육체여서 가능한 묘기가 펼쳐졌다. 전소민은 괜히 민망함에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이거 뭐야?’
뭔가 통한 걸까? 딱 문자를 하려는 데 전화가 오다니. 뭔가 느낌이 좋았다.
‘혹시 크리스마스라서 얼굴 보자고 전화한 건 아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근래 김서준 생각만 하면 이 모양이었다.
‘아냐. 친구가 전화한 게 뭐 대수라고.’
전소민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애써 부정했다. 그리곤 ‘흠흠.’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조심스레 통화버튼에 손을 올렸다.
“어, 서준아?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들떴냐고? 아, 아 일이 잘 풀려서. 마정석? 물론이지! 물론 구해줄 수 있지. 그래서 전화한 거야? 크리스마스는···. 리노랑 노움이랑 보낸다고? 아아... 하긴 너는 매일 농사지어야 하니까 바쁘겠다. 응? 갑자기 왜 그렇게 또 축 처졌냐고? 뭐 문제 되는 거 있냐고? 아니야. 그런 거.”
“오늘따라 소민이가 이상하네.”
전화하는 그 짧은 와중에 목소리의 기복이 왔다 갔다 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큰일 치르고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그런가.’
몸보신하게 송이버섯이라도 좀 보내줘야겠나 싶다.
어쨌든 일은 잘 풀렸다. 가장 질 좋은 마정석은 대형 길드로 먼저 납품된다. 마정석의 주요 용도가 마도구 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라면 구하기가 힘들지만···.’
전소민은 흔쾌히 최고 수준의 마정석을 구해주기로 했다. 전소민쯤 되면 연구하는 데 전혀 지장 없는 상등품으로 구해올 터였다.
‘아마 정 없다면 직접 사냥해다 주겠지?’
S급 헌터 친구라는 건 이럴 때 좋다.
‘그나저나 이제 진짜 크리스마스네.’
매일매일 행복하게 보내서였는지, 크리스마스가 오는지도 몰랐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마다 꽤 성대하게 보냈다. 하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다 사업의 일환이었으니까.’
실은 파티라기보단 새로운 사업을 따내기 위한 각축장에 가까웠다.
‘뭐, 다 지난 이야기지. 이번에는 그냥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되겠네.’
편한 엘프, 드워프, 사람, 동물, 정령과 아주 편하고 재밌는 파티라니.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근데 다른 세계에도 크리스마스가 있나?’
문득, 궁금해진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그런 게 다른 차원에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신기한 일일 터였다.
“뭐 날의 의미가 중요한가. 즐거운 날, 제대로 즐기는 게 중요하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하지 않던가. 지구에 왔으니 지구의 파티를 즐길 차례였다. 김서준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
펑펑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이 이불처럼 땅 위를 덮고.
“리노 공! 이거 받으라움!”
“멍!”
그 위에 리노와 노움이 발자국으로 도장을 찍으며 뛰놀았다. 노움이 눈을 던지면 리노가 피하는 간단한 놀이이건만 뭐가 그리 재밌는지 둘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클클. 좋을 때요.”
김서준의 옆에 거대한 나무를 들쳐 맨 우노가 껄껄 웃었다.
“도스, 트레스도 저랬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징그럽지만 말이오.”
“우노. 네가 제일 열심히 눈을 만들었지 않았나.”
“우노. 맞다. 눈싸움에서 이기려고 눈 속에 돌을 넣었던 드워프는 누구지?”
“흠흠. 난 기억이 안 나는데.”
김서준이 웃었다.
“어릴 땐 다 그런 거죠. 이쯤에다 만들까요?”
“좋소!”
“그럼 이쯤에 심죠. 여기 잠깐 내려 놔주세요.”
김서준이 정좌 옆 적당한 공터를 가리 켰다.
“알겠소.”
우노는 대답과 함께 들쳐메고 온 소나무를 그 옆에 팽개쳤다. 산에서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소나무를 뿌리까지 뽑아왔건만, 우노는 너무나도 가볍게 바닥에 던져버렸다.
과연 드워프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살아있는 나무로 만드는 거도 모자라서 초대형 트리라니. 엄청 기대되는데?’
‘쿵’ 소리와 함께 나무를 내려놓자 리노와 노움의 시선이 모여든다.
“신농님! 이걸로 뭐 하는 겁니까움?”
“멍!”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 거야.”
“크리스마스트리? 그게 뭡니까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김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리노나 노움 같은 착한 애들한테 산타클로스가 선물 주는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해. 크리스마스트리는 산타클로스한테 여기에도 착한 아이가 있다고 신호를 보내는 거야.”
그리스도니, 종교니 하는 이야기를 하기엔 이 귀여운 존재에게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였다.
트리 역시 마찬가지. 크리스마스의 기념 상징물은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리노와 노움이 관심을 가지고 더 열심히 꾸밀 수 있게 김서준은 착한 거짓말로 포장했다.
“와!!”
“멍멍!!!”
제대로 먹혔는지 둘은 눈을 반짝거렸다.
“산타클로스는 선물을 나눠주는 신 같은 겁니까움?”
“응. 비슷하지.”
“움!!”
“멍멍!!”
다시 한번 감탄하는 둘. 그러더니 서로 마주 보고 말했다.
“리노 공. 선물은 꼭 받아야 합니다움! 열심히 해봅시다움!”
“멍!!”
김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우노가 말했다.
“그런 날이었군. 이거 우리 같은 드워프도 선물을 주실지 모르겠네. 클클클.”
김서준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우노를 바라봤다.
‘아, 아저씨···.’
“우노. 제발···.”
이미 검색으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조사를 마친 트레스가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트레스. 왜 그러는 거냐? 아, 선물을 걱정하는 건가. 하긴 네가 그렇게 착한 드워프는 아니지. 나랑 다르게 말이야. 클클클.”
안타깝게도 우노는 눈치가 없었다.
황금 굴착기의 위력은 엄청났다. 순식간에 땅을 파고 나무를 심고 흙을 메우는 일이 끝났다.
“참으로 대단하오!”
“맞소. 드워프 생에 저런 건 처음 봤소! 대체 저건 무엇이라 부르는 거요?”
굴착기에서 내리는 김서준을 보며 트레스와 우노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속도나 위력보다는 굴착기 자체에 감탄하는 듯했다.
그 증거로 그들의 눈은 여전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굴착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기할 만도 하지. 마법으로 땅을 파는 드워프니 굴착기라는 건 상상도 못 해봤을 거야.’
그때, 리노와 함께 작업을 구경하던 노움이 말했다.
“이건 굴착기라고 하는 거다움!”
“오, 그렇소?”
“그렇다움! 땅을 파는 신농님의 아주 특별한 농기계다움!”
“멍!!”
나만의 특별한 것까지는 아니야. 밖에 가면 살 수는 있어.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노움과 리노가 너무 신이 나 있었기에. 우노와 트레스는 맞장구를 치며 연신 감탄사를 토해냈다.
“마공학으로 저런 기계를 만든다면 대단한 기술이 없어도 누구나 땅을 팔 수 있겠군.”
“트레스. 잘 기억해둬. 돌아가면 전수해야 하니 말이야.”
“우노. 걱정하지 마. 내 기억력은 너와는 차원이 다르다.”
“클클클. 그래그래.”
둘의 대화를 듣던 김서준이 일순간 걱정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잊고 있었던 고민이었다. 오는 방법을 모르니 돌려보낼 방법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왜 누군가 자꾸 넘어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음에 아리아를 만나면 물어봐야겠어.’
“신농.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그럼 이제 나무 심기는 끝냈으니 꾸미는 건 부탁드립니다. 트레스, 지난번에 보여드린 사진 기억하죠?”
“물론이오. 신농님은 걱정 폭 놓으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소.”
“맞습니다움! 저도 있습니다움!”
****
-위이잉.
믹서기가 돌아간다.
대접에 들어가 있던 잘 분리한 달걀흰자와 설탕 섞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연유 같았지만, 점점 거품이 일며 하얗게 부풀어 오른다.
그러자 오늘 땅을 덮고 있던 눈만큼 하얗고 폭신해 보이는 머랭이 만들어진다.
-쑤욱.
살짝 점도가 생긴 머랭이 믹서기를 따라 뿔이 생긴다.
‘잘 만들어졌네.’
좋은 날이라 그런가, 요리도 잘된다. 김서준은 거기에 아몬드 파우더 그리고 박력분을 넣어 살살 섞기 시작했다.
여기가 중요했다. 너무 강하게 섞어 거품이 꺼지면 푹신함이 다 사라진다. 정성 들여 천천히 돌려야 했다.
-띵!
“서준 씨, 알람 다 됐어요!”
옆에서 감자를 삶던 엘린이 말했다. 앞치마를 메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엘린은 외모만 보면 주부 10단처럼 보인다.
‘실상은 계란후라이 하나도 덜덜 떠는 초보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인 만큼 김서준을 돕겠다며 조수 노릇을 자처했다. 김서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꺼내서 잘 으깨주세요.”
“네!”
엘린이 감자 뚜껑을 열자 구수한 향이 올라왔다.
“진짜 서준 씨 감자는 최고인 거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김서준이 너스레를 떨자 엘린이 생긋 웃었다. 그러더니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저 하나만 먹어도 돼요?”
“조수라서 특별히 드리는 겁니다. 하나만 드세요.”
엘린은 활짝 웃으며 감자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물을 뺀 뒤 나머지 감자를 대접에 잘 옮겨 매셔 스푼으로 으깨기 시작했다. 꾹꾹 누르며 감자를 으깨는 데 얼마나 힘을 줬는지, 엘린은 간간이 신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그사이 김서준은 케이크 시트를 완성했다. 충분히 섞은 케이크 시트는 최대한 원으로 크게 펼쳤다.
‘2개면 되겠지?’
오븐에 2개 층에 모두 케이크를 넣은 김서준은 기지개를 한 번 폈다. 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후···. 이제 반했네.’
그다음은 엘린과 함께 남은 감자를 으깬 후, 버터, 크림과 함께 잘 섞어줬다. 역시 하나보단 둘이 낫다. 생각한 거보다 요리가 빠르게 만들었다. 이제 이걸 냉동실에서 굳히면 거의 완성이었다.
‘타이머는 3시간으로 잡자.’
타이머를 건 김서준은 엘린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육체파가 아닌 엘린은 감자를 으깬 것만으로 기진맥진해 보였다.
“이제 다음은 뭐해요?”
엘린이 귀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 다 굳으면 구운 케이크 시트 위에 올리고 초콜릿으로 코팅하면 돼요.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고생했어요. 엘린.”
“아니에요. 마지막까지 같이 해야죠! 명색에 조수인데.”
엘린이 늘어진 귀를 다시 쫑긋 세우며 말했다. 김서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호선으로 그렸다.
“알겠어요. 그나저나 마정석 변환은 잘 됐어요?”
김서준은 전소민이 일전에 수리비라고 두고 간 마정석을 연구용으로 줬다.
“여기요. 크리스마스 선물.”
엘린은 앞치마에 달린 앞주머니에서 작은 병 두 개를 꺼냈다.
‘주머니 위치가 묘하네.’
김서준은 괜히 얼굴을 붉히며 병을 받았다. 하나는 액체가, 다른 쪽에는 반짝이는 가루가 가득 차 있었다.
“마정석을 나눠서 두 가지 방식으로 가공했어요. 하나는 말씀해주신 대로 물약으로 만들었어요. 다른 하나는 비료처럼 뿌릴 수 있게 가루로 만들었고요.”
“감사합니다.”
“잘 되길 바라요. 사비오는 저도 꼭 연구해보고 싶거든요!”
엘린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순간.
-쾅!
폭발음이 들렸다. 김서준과 엘린이 놀라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라스 너머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저게 대체···?”
“얼른 나가봐요!”
김서준은 놀라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