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47화 (47/139)

47. 사비오의 전설

“몬스터를 먹는다고요···?”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이오. 사비오는 열매를 노리고 다가오는 괴물 같은 존재를 먹고 성장했다고 하오. 그래서 사비오는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을 지키는 수호 목이었다고 하오.”

더군다나 사비오의 열매는 마력을 높여줘서 영웅들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전설이라 그런가? 내가 알기로는 머리를 맑게 해주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정도라고 했는데.’

김서준은 의문을 뒤로 한 채 이어지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몬스터가 범람하던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사비오는 자연스럽게 시들었소. 그리고 어느덧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하죠. 남은 건 한 그루.”

“현자들이 살고 있다는 그 사비오인가요?”

“그렇소. 물론 현자들이 사는 콩나무도 전설인지라,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오.”

트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그런데 현자의 전설에서는 이전과 다른 이야기가 있소. 사비오가 몬스터가 아니라 마나를 먹는다는 거지. 그리고 정제된 마나를 머금으면 100년에 한 번꼴로 아주 특별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오.”

“특별한 열매요?”

“먹으면 특별한 능력을 얻는다고 하오. 망치의 후예 역사상 최고의 건축가인 제피리움도 이 열매를 먹고 그 뛰어난 건축기술을 얻었다고 하지.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 신의 건축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더군. 참으로 망치의 후예다운 자신감이지. 클클클.”

능력을 얻었는데 어떤 직업을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이건 뭐랄까.

‘헌터의 전직 같잖아? 그럼 그 열매는 각성을 야기하는 매개체였던 걸까?’

물론 추측일 뿐. 트레스의 말대로 엄청난 기술을 얻은 자신감을 표현한 말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소. 다만 이 전설을 믿고 떠난 망치의 후예들이 있소. 그런데 이거 신농님 덕에 우리가 먼저 그 전설을 확인하게 생겼소. 고맙소. 클클클.”

트레스가 안경이 흔들릴 정도로 몸을 크게 떨며 웃었다.

"그렇게 해드릴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겠네요."

"신농님이라면 할 수 있으실 거요. 이 멋진 신의 대지도 그렇지만, 노움님만 봐도 알 수 있소."

"노움이요?"

"정령사가 소환한 정령은 계약자의 역량에 따라 그 능력이 결정되오. 저걸 보시오. 난 살면서 저렇게 많은 부하 정령을 부리는 정령은 본 적이 없소. 정령왕을 소환해도 저리는 못할 테요. 그뿐일까. 저 대단한 농사 솜씨까지. 모르긴 몰라도 드래곤이 부리는 정령에도 버금갈 테지. 볼 때마다 참으로 놀랍소."

드래곤이라니.

일전에 미국에서 나타난 드래곤 하나를 잡기 위해, 미국의 S급 헌터 전원이 소집되었지 않았던가?

"에이, 칭찬이 과하시네요."

김서준은 자연스레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트레스는 안경을 '으쓱' 추켜 올리며 말했다.

"신농이야말로 참으로 겸손하오. 저 대정령, 그리고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밭을 보시오. 아마 역사 속에 이렇게 훌륭한 작물로 가득 찬 밭이 또 있을까 싶소. 전설이 허명이 아닌 게지. 너무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마시오."

하긴, 전투력이 역량의 척도라면 김서준의 역량으로 드래곤은 어림도 없다. 하지만 트레스의 말대로 농사에 대한 역량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김서준은 세계수의 비호를 받는 '신농'이니까.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고기를 구울 수 있지 않소? 그 어린 나이에 벌써 한 분야의 정점을 찍었다는 것도 신농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지. 두고 보시오. 분명 스스로도 놀랄 만큼 대단해진 날이 올 테니. 클클클."

트레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

용건을 마친 후, 김서준은 리노를 이용해 트레스를 다시 집으로 데려다줬다.

트레스는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은 마공학자. 그것도 아주 뛰어난 마공학자였다. 당연하게도 이 세계에 마도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 세계 마공학자들은 독특하오. 어딘가는 너무나도 세련된 구조로 만들어놓고 어딘가는 너무나도 허술하오. 이렇게 만들기도 어렵겠군.”

아마도 그들이 마공학을 이해한 게 아니라 스킬에 의존하기 때문인 듯했다.

여하튼, 트레스는 그 미완성(트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렇다.)작들을 전부 완성품으로 바꿔야 성이 차겠다고 했다. 김서준은 흔쾌히 허락했다.

'나야 고맙지. 드워프가 개조해주는 마도구라니 말이야.'

트레스는 용건만 마치면 집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 손대고 있는 건, 세계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둔 여러 가지 방범 장치들이라고 했다. 엘프의 결계에 드워프에 마도구라. 이러다 세계수의 언덕이 어지간한 지상 요새처럼 되는 게 아닐까. 김서준은 그런 상상을 하며 리노와 함께 뒷산으로 들어갔다.

“이제 슬슬 나무를 정하긴 해야 하는 데···.”

임종철은 토종 작물 키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반인이 키웠을 때 결과를 봐야 했기에 하나하나 김향숙 여사님과 함께 손수 농사를 짓고 있었다.

‘실험 결과를 확실하게 한다고 엄청 크게 지으셨지. 가지고 계신 하우스 전부를 다 꽉꽉 채우셔서 말이지.’

그 때문에 예전처럼 김서준의 밭에도 잘 못 오시지 않던가. 이런 상황에 농원 계획을 함께 짜달라고 부탁하기는 죄송했다.

‘분명 신경 써주신다고 시간도 많이 할애해 주실테고. 그럴 수는 없지.’

토종 작물이 임종철의 숙원이라곤 하지만, 결국 그 실험을 부탁한 건 김서준 자신이어서 더더욱 폐를 끼치기 싫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 농부인데 계속 의지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혼자서 나무를 정하려는 데 쉽지가 않았다. 더는 신농의 땅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땅을 더 늘리면 분명 병충해까지 나타날 테니까.’

혹시나 해서 이에 대해 노움과 이야기를 했었다. 노움은 여지없이 걱정 폭 놓고 믿어 달라 했다.

‘그리곤 움을 전부 소집해서 거의 전쟁 준비하다시피 난리를 쳤었지.’

유해동물과 달리는 벌레는 군대와도 같아서 체계적으로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나.

화들짝 놀란 김서준은 서둘러 노움을 말렸다. 저러다 정말 ‘움’들이 농사 정령에서 군사 정령으로 전직할 기세였다.

‘거기다 이미 노움과 움들은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내 욕심 때문에 과로를 시킬 수는 없지.’

고심 끝에 김서준은 신농의 땅을 넓힐 수 있을 때까지, 농원에 한해서는 김서준이 직접 관리를 하리라 다짐했다.

‘도움을 받더라도 최소한으로 받아야지. 그러려면 감당할 수 있는 나무나 작물을 골라야 할 텐데···.’

“멍멍!!”

김서준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자 리노가 짖었다. 김서준이 작은 솜뭉치로 돌아온 리노를 쓰다듬었다.

“아냐. 이건 즐거운 고민이야. 걱정 안 해도 돼. 아!"

그렇게 리노를 보던 김서준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떴다.

산에는 이미 많은 나무가 있다. 그중 과일나무가 분명히 있을 터. 그렇게 자라난 과일나무는 분명히 이 산에 가장 잘 맞는 나무들일 게 분명했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자생한 나무들일 테니까.'

그런 나무라면 충분히 김서준이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보통은 이걸 조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저 온산을 다 뒤져서 가장 많은 나무를 결정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는 리노와 아이들이 있잖아?’

리노와 반달이, 일호 가족은 어차피 숲을 도는 게 놀이이자 일이 아니던가. 김서준은 리노에게 말했다.

"리노야. 동물들하고 함께 이 산에 가장 많은 과일나무가 뭔지 알아봐 줄래?"

"멍!"

리노는 꼬리를 흔들며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곤 곧장 텔레파시를 이용해 동물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이제 리노도 어엿한 일꾼이네.'

김서준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물들의 대장이 된 뒤로 순찰부터, 두더지나 유해동물에 대한 경계까지. 리노는 다양한 일을 도맡아 열심히 지휘하고 있었다. 그 덕분일까, 외모는 여전히 귀엽지만, 이전보다 좀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애 키우는 게 이런 기분인가.'

"멍멍!!"

"너도 가겠다고? 그래. 잘 부탁할게."

한 번 더 리노를 쓰다듬어 준 뒤 김서준은 리노를 보내주었다.

'귀엽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하얀 솜뭉치가 숲을 내달렸다. 김서준은 그 뒤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특하네. 녀석.“

저 아기 같은 녀석이 대장 노릇 하겠다고 달려가는 모습은 그렇게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식 웃으며 기분 좋게 리노를 보내준 김서준은 그 길로 세계수의 언덕에 들어갔다.

****

"연구는 잘 돼요?"

안경을 쓴 엘린이 정체불명의 용액을 섞으며 말했다.

"이제 진짜 막바지에요. 도스님 덕분에 여러 가지 의문도 해결됐거든요."

그러자 반대쪽 테이블에서 무언가 결과를 적던 하얀 머리의 드워프가 말했다.

"신농. 아니요. 엘린님의 지식이 참으로 대단하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소!"

그 첫 한마디에 김서준은 안심했다. 엘프와 드워프의 기 싸움은 이제 끝난 듯했다. 둘 다 능력이 대단하니 분명 힘을 합친다면 엄청난 연구 성과가 나오리라.

'어쩌면 미트루트로 만든 포션이 막 죽는사람도 살리고 그러는 거 아냐?'

반쯤 농담 섞인 상상과 함께 미소를 지은 김서준이 말했다.

"둘의 합이 잘 맞나 봐요. 다행이에요."

"나도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엘프는 처음이요!"

"저도요. 드워프가 전부 이렇다면 아마 두 종족 간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예요."

김서준의 말에 둘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다, 마침내 용액이 든 비커를 내려놓은 엘린이 몸을 돌렸다.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필요하면 연락하시지. 제가 내려갔을 텐데."

"아닙니다. 연구를 방해할 수는 없죠. 궁금한 게 있는 데요. 마정석을 포션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김서준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농. 마정석이라면 몬스터의 몸에서 나오는 그것 말이오?"

"네. 맞아요."

"흠······."

엘린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만들 수는 있지만···. 마정석이라는 건 잘 정제된 마나가 결정화된 거잖아요? 형태를 바꾸는 정도면 몰라도 형질을 바꾸면 마나가 많이 손실될 거예요. 그래서 마공학에서도 마정석은 최대한 그대로 사용하는 거기도 하구요. 물론 연구를 좀 해보면 다를 수도 있지만요."

그렇게 말한 엘린이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혹시 또 무슨 좋은 생각이 나신 건가요?"

"아, 사비오 때문에요. 트레스에게 사비오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사비오에 대한 전설이요?"

엘린이 처음 듣는다는 듯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도스가 말했다.

"엘린. 그 전설을 모르시오? 벨리르에서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오만."

"정말이요?"

엘린이 몸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이너스에서는 사비오에 대해서는 현자들이 사는 콩나무라는 이야기밖에 없었는데···."

도스는 아까 김서준이 들었던 전설을 엘린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삼 신기하다.

'이 좁은 장소에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3명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김서준이 신기해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곤 엘린이 김서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게 마정석을 액체로 만드는 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몬스터. 마나. 두 개의 공통점을 생각해봤거든요. 저는 그게 마정석이라고 생각했어요."

'몬스터'의 몸에 쌓인 잘 정제된 '마나'의 결정. 그게 마정석이다. 사비오가 마정석을 흡수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전설이 모두 말이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식물이 마정석을 흡수할 수는 없을 거고. 그래서 생각한 게 액체로 만드는 거예요. 물처럼 뿌리면 흡수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신농. 그거참 일리가 있는 발상이오."

"맞아요. 역시 서준 씨다워요. 연구를 좀 해볼 만한 가치가 있긴 한데···. 연구할 마정석이 없네요. 몬스터 사냥이라도 다녀올까요?”

“신농! 그거라면 우리가 전문이오.”

그러자 도스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떵떵거렸다. 김서준은 그런 도스를 말렸다.

‘인재는 적재적소에 써야지.’

저 똑똑한 드워프를 어찌 잡일에 보내겠는가. 그건 너무나도 아까운 일.

김서준이 씽끗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 딱 마정석을 받기 좋은 데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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