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44화 (44/139)

44. 찾아온 유능한 일꾼

행복한 저녁을 보내서였을까?

다음날, 김서준은 유난히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으···.”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김서준은 침대를 빠져나왔다. 머리는 말끔하고 한 점의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좋아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문득 불안하다.

‘옛날에는 이러면 안 좋은 날이었는데...'’

보통 이런 상쾌함은 지각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니면 밤사이 사고가 터져 연락이 쌓여있거나.

‘에이, 아니겠지.’

김서준은 반쯤 날로 먹는 농부가 아니던가. 지각 걱정은 당연히 필요 없었다. 밤사이 터질 사건도 없었다.

‘작물이 얼 일도 없고. 배수로도 잘 파놨다. 세계수 빼면 걱정거리도 없으니까.’

아침부터 텔레파시를 보내오는 동물도 없었다. 찝찝함을 털어내고 김서준은 창가로 다가갔다.

“와, 눈 많이 왔네.”

흰 눈이 사방에 쌓여있었다. 그 사이 김서준의 밭만 파릇파릇하다. 하얀 눈과 쨍한 초록 작물이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이런 풍경은 여기서 밖에 못 보리라.

‘진짜 고마운 능력이야.’

김서준은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에 감사하며 살짝 창문을 열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불안감이 전부 여유로 바뀌어 갈 때.

-쿵! 쿵! 쿵! 쿵!

무언가 급박한 발걸음이 들렸다.

“서준 씨!”

다급하게 노크하며 김서준을 부르는 엘린의 목소리. 김서준이 놀라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밤사이, 커넥션 링이 깨졌어요!”

“네···?”

“빨리 휴대폰 확인해보세요!”

김서준이 놀라 휴대폰을 확인했다. 역시나 별다른 알림은 없었다.

그런데,

“...전부 연결이 끊어졌어?”

CCTV 앱에 1번부터 8번까지 모든 솟대가 연결이 끊어져 있었다.

‘어쩐지 너무 상쾌하더라니!’

다행히 세계수는 무사했다. 망가진 건 오롯이 커넥션 링과 결계를 구성하던 솟대뿐이었다. 결계에도 김서준이 설치해둔 장비도 모두 멀쩡했다.

‘물론 이것만도 타격이 크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왜, 어떻게 이렇게 전부 다 망가진 거지?’

엘린 역시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서는 하나. 김서준의 휴대폰에 저장된 마지막 영상뿐이었다.

엘린의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둘은 다시 한번 영상을 봤다.

[...긴장 좀 하라고.]

[그나저나 저 귀여운 장치는 뭐야? 새로운 함정인가?]

[우노. 뭔지는 모르지만 건드리지 마. 내가 챙겨갈 거니까.]

[클클클. 좋아. 트레스. 그럼 얼른 하라고.]

[모두 귀 조심하라고!]

-쾅!

큰 소리와 함께 격하게 흔들리더니 영상이 꺼졌다.

“...모습이라도 나왔으면 좀 나았을 텐데···.”

김서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쉽게도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정확히 솟대의 반대쪽에 있었는지, 그림자조차 영사에 나오지 않았다.

“사용하는 언어를 보니 이계의 존재 같긴 한데···.”

신농의 힘 덕인지 이해는 됐지만, 어느 나라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지구의 존재하는 언어는 아니었다.

“라이너스 대륙도 아닌 거 같아요. 처음 듣는 언어예요.”

엘린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이로써 언어로 상대를 식별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저 솟대를 파괴한 마법. 저건 뭔지 알 거 같아요.”

“저 마법을요?”

“제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망치의 마법···.”

그때였다.

-쾅! 쾅! 쾅!

갑작스러운 굉음이 세계수의 언덕을 울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밖에는 본체로 현신한 리노가 세계수로 들어오는 입구를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대상을 확인했다.

“누구지?”

언덕의 입구 결계 너머. 떡 대부터 남다른 3명의 남자가 눈에 보였다.

‘...저 얼굴이랑 하나도 안 어울리는 몸들은 뭐야?’

남자들의 얼굴은 분명 60 ~70대 사이.

그런데 몸은···.

‘헬창...?’

순간 그런 속어가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죽하면 두껍다 못해 터질 듯한 모습일까.

‘근데 키가 좀 작네?’

양쪽에 둘은 160cm.

가운데, 이 추운 겨울 웃통을 벗고 망치를 든 남자는 많이 쳐주면 170cm 정도처럼 보였다.

‘혹시 드워프인가?’

김서준이 생각하는 사이,

“이거, 우리 신농님이 노크를 못 들으셨나 보군!”

결계 너머 망치를 든 남자가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거대한 망치를 양손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쾅! 쾅! 쾅!

“신농님! 안에 안 계시오? 클클클.”

‘저게 노크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걸 넘어 어이가 없는 상황. 노크하다가 문짝을 다 부술 기세였다.

‘확실해. 이계에서 왔어. 그리고 꽤 정신 나간 종족 같아.’

김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옆에서 보던 엘린이 말했다.

“....진짜 망치의 종족이었어.”

“네? 망치의 종족이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이러다 결계 부서지겠어요.”

엘린이 말하기가 무섭게 ‘쨍!’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하늘에서 유리 파편처럼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사르르 떨어져 내렸다.

‘마나···?’

유리 파편이 아니라 푸른 마나였다.

“아아···.”

엘린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결계가 깨진 거였다.

“오오! 신농님이시오?”

망치를 든 사내와 김서준의 눈이 마주쳤다. 김서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태도는 분명 호의적이야.’

웃는 모습이나 말투는 분명 그렇다.

그러나 결계가 부서졌다. 억지로 이곳에 비집고 들어왔다. 말투와 행동이 전혀 달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의 답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리노!”

김서준이 소리쳤다.

“컹!”

리노가 곧장 땅을 박차려는 순간.

“신농이시여! 망치의 종족이 인사드리오!”

망치를 내려놓더니 남자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더니.

“신농님. 인사드립니다!”

동시에 뒤에 있던 둘도 넙죽 엎어지는 게 아닌가?

김서준은 자연스레 이마를 부여잡았다.

‘도대체 뭐야? 이 정신 나간 사람들은?’

****

그것은 꽤 오래된 여정이었다.

30살.

그들이 성인이 되던 해.

부족 최강의 형제들은 망치의 후손 사이 전설이 될 여정에 지원했다.

‘전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셋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둘째는, 그 술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재료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으로 첫째는, 그 세상에서 가장 좋은 술을 마시기 위해.

그들에게는 각자 이루고 싶은 위대한 열망이 있었다.

마을을 벗어난 망치의 후예들은 신의 대지를 찾아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때로는 인간과 다투기도 했고, 길을 잘못 들어 잠자는 드래곤에게 죽을 뻔하기도 했다.

하나, 형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망치의 명예를 건 여정이었기에.

그러길 100년.

“도스! 트레스! 드디어 도착했다! 신의 대지로 향하는 탑이다!”

“우노. 너무 흥분하지 마. 우리가 맞게 왔다면 이제 시작이야.”

“도스 말이 맞아. 이제 시작이야.”

마침내 신의 대지까지 한 발자국. 그러나 두 동생의 말처럼 마지막 관문이 진짜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를 죽여야 했다.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함정을 부쉈다. 그리고 매일매일 생사를 건 여정이 이어졌다.

“도대체 스테이지는 언제 끝나는 거지?”

“슬슬 짜증이 나는군.”

“도스! 트레스! 기합이 부족하다! 힘내라!”

포기하려는 두 동생을 우노는 열정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 서리 대륙의 끝에서 서리 찾기가 시작되었소. 아, 정말 힘들었지. 매일매일 그 눈보라를 해치고 나아가기란. 우리가 위대한 건축가가 아니었다면 분명 얼어 죽었을 테지.”

테이블에 마주 앉은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건축가?”

“이동식 이글루를 지었소. 덕분에 아주 따뜻하게 견딜 수 있었소.”

김서준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겉보기에는 맨몸으로 해치고 갔을 거 같은데···. 이동식 이글루라니.’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럼 그다음에 도착한 게 여기에요?”

“그렇소! 그랬더니 머릿속에 울리던 소리가 지시하더군.”

그렇게 말한 우노가 들었다는 메시지를 마치 뮤지컬 하듯 읊었다.

“신의 대지를 찾아라. 그리고 신농의 허락을 받으면 신의 대지에 살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적은 아니었다. 이계에서 온 위협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엘린이랑 비슷하달까. 꿈을 안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다.

“그럼 저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 데, 솟대는 왜 부쉈어요?”

“목숨을 위협하는 함정인 줄 알았소. 절대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소. 그리고 부순 게 아니고 정지시킨 거외다. 곧 고쳐서 돌려드리도록 하겠소.”

저 말이 사실이라면 다행이었다. 사실 그 8개의 솟대가 세트로 1억이 넘는 돈이 든 초고가의 마도구. 사실 다시 사기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럼 결계는요? 결계는 왜 부쉈는데요?”

“아, 그건 망치의 후예 간의 인사법이오. 서로 망치로 노크해서 오늘도 집이 튼튼한지 확인하는 거지.”

“그게 말이 되는···.”

“맞을 거예요.”

옆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듣던 엘린이 대신 대답했다.

“라이너스 대륙에도 있거든요. 망치의 후예가. 쓰는 말은 다르지만.”

“오호라. 그대는 역시 다른 세계의 엘프였군. 역시 그 뒤가 구린 귀쟁이들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라더니!”

엘린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현은 자제해주세요. 저도 근육 돼지니, 땅돼지니 하는 표현은 안 쓸 테니까요.”

그러자 호방하게 웃던 우노가 움찔했다. 그리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클클. 그래그래. 그러자고.”

김서준이 엘린을 바라봤다. 엘린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혹시 영화처럼 정말 드워프와 엘프의 관계는 안 좋은 건가? 그럼 곤란한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김서준은 이들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저 말투와 이글거리는 눈빛이 모두 거짓이라면, 그거야말로 능력처럼 보였다.

‘꽤 괜찮은 거 같아.’

아니, 실은 마음에 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보여주는 넘치는 열정과 패기를 뿜어내는 이들이 절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손을 내밀고 싶었다.

적만 아니라면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야.’

외모적 차이, 집이나 대외적으로 소개할 변명이야 차치하더라도. 식구가 세 명이나 늘어나는 건 좀 부담스러웠다.

반달이 일호처럼 방생하고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신농의 땅도 그래. 한동안은 더 땅을 못 늘린다는 걸 알면 실망 많이 할 텐데···.’

김서준이 잠시 후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우노가 조심스레 헛기침했다.

“흠흠. 그 신농님이 알지 모르겠소만 우리 망치의 부족이 참 재주가 많소. 전투는 기가 막히지. 우리 부족만큼 잘 싸우는 이가 없소. 게다가 장비도 기가 막히게 잘 만들지. 이건 우리 부족이 타고나는 거고.”

갑작스러운 어필이 시작된다. 아무래도 우노는 김서준이 허락을 고민한다고 오해한 거처럼 보였다.

‘재밌네.’

오랜만에 면접 감독관이 된 기분이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김서준은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신농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 둘째가 농사도 기가 막히게 하오. 우리 후예 중 최고였지. 특히 최고의 술을 만들기 위한 밀 농사는 이만한 놈 찾기 힘들 거요.”

“마, 맞소! 시켜만 주면 최선을 다해 돕겠소!”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도스가 맞장구를 쳤다.

“셋째도 대단하오. 일단 우리 부족 최고의 건축가지. 거기에 이놈이 100년에 한 번 난다는 망치의 부족 최고의 마공학자요. 이 망치도 이 녀석이 만든 거지.”

“신농.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시오. 제가 다 만들어 드리겠소.”

이번에는 트레스라 불린 안경 낀 드워프가 대답했다.

‘다들 재주가 많네. 확실히 옆에 두면 분명 도움받을 게 많긴 하겠어.’

게다가 농사를 짓고 술을 빚겠다. 김서준이 농장을 조성하고 하려는 일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농장이 한결 더 풍성해지겠지.’

역시 받아줘야겠다. 그다음은 차차 고민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우노가 아까와는 달리 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가받지 못하면 그대들의 삶은 그 대지에서 망치의 혼으로 돌아가리라.”

“음?”

“아, 그 목소리가 그러더군. 무, 물론 목숨이 아깝지는 않소. 망치의 후손으로 여정의 끝을 보고 전설을 썼으니 말이오. 그, 신농님은 편하게 생각하셔도 좋소. 좀 긍정적이면 더 좋고···. 클클클클....”

갑자기 어필한다 싶더니 저런 거였나. 그나저나 연기는 진짜 못하는구나.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이지만···. 저 꽤나 순수해 보이는 성격도 맘에 들고.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능력을 확인해 봐도 좋겠지?’

김서준이 기소(欺笑)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능력 테스트 겸, 이거 한번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인벤토리에서 설계도를 하나 꺼냈다. 오늘 제작에 들어가려 했던 정자 지붕의 설계도였다.

“호, 신기한 지붕이군. 설계는 신농님이 했는가?”

우노가 감탄어린 눈으로 말했다.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안경을 낀 채 유심히 설계도를 바라보던 트레스가 말했다.

“신농. 하루를 주면 만들어 드리겠소. 하지만 삼 일을 준다면, 이거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 드리지.”

김서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 날 금산마을에 유능한 일꾼이 입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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