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연결 고리
“이제는 너무 춥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여지없이 창문을 연 김서준은 서둘러 잠옷 위로 두꺼운 가운을 걸쳤다.
산을 등진 시골의 아침은 정말 추웠다.
‘이 날씨에 밖에서 근무를 섰다는 거잖아?’
친구들이 왜 군대에서 그렇게 겨울이 힘들다고 난리였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김서준은 따뜻한 물로 몸을 데운 후, 여지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오늘의 목적은 아침 조깅이 아니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등산을 할 예정이었다.
“나갈까요?”
준비를 마친 엘린이 거실로 나왔다.
“!!”
김서준은 순간 엘린의 눈을 피했다. 엘린은 딱 붙는 레깅스를 위아래 세트로 입고 있었다. 아래에는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고 있었다.
‘예쁘고 잘 어울리긴 하는데, 뭔가 민망하네.’
엘린의 몸매가 워낙 좋아서일까. 김서준은 괜히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엘린. 그런 옷은 어디서 알았어요?”
“요즘은 등산할 때 다 이런 거 입는다고 하던 데, 이상한가요?”
김서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최근에 여자들의 운동복으로 레깅스가 자리 잡았기도 했고.
“아뇨. 괜찮아요.”
김서준은 서둘러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리고 이거요.”
엘린은 김서준에게 검은색 바람막이를 건넸다. 김서준은 곧장 위에 걸쳐봤다. 그러자 몸 안에 살짝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진짜 대단하네. 평범한 바람막이에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렸잖아.’
원래라면 마력 반응이 뛰어난 소재로 만든 옷에 장인이 스킬로 마법을 부여해야 했다.
그러나 엘린은 한계가 없었다. 역시 엘프의 마법은 남달랐다.
“감사합니다. 제대로 걸렸네요.”
“이 정도는 쉽죠.”
엘린의 바람막이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심플한 디자인의 옷.
‘이래서 그렇게들 PPL 하는 건가.’
여지없이 최근 자주 보는 드라마 주인공이 자주 입는 옷이었다. 물론 엘린이 그 주인공보다 더 잘 어울렸다.
사심이 아닌 객관적 사실이었다.
“그럼 갈까요?”
장갑까지 철저하게 챙긴 두 사람은 집 밖으로 나왔다.
“멍!”
“구오!”
마당으로 나오자 반달이와 리노가 두 사람을 반겼다.
“약속 잘 지켰네. 잘했어.”
반달이가 애교로 칭찬에 답했다. 반달이는 은근히 애교가 많아서, 어렸을 적 꿈꿨던 딱 곰의 표본이었다. 엘린 역시 그런 반달이를 꽤 맘에 들어 했다.
“자, 그럼 바로 준비할까? 리노. 변신해.”
“멍!”
리노는 대답과 함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얀 털을 뒤덮은 거대한 맹수가 어금니를 드러냈다.
그러자 반달이가 당황해서는 뒷걸음질쳤다. 엘린 역시 살짝 김서준의 옆으로 붙었다.
‘이 모습은 적응이 안 됐나 보네. 하긴 어쩔 수 없겠지.’
김서준은 웃으며 엘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리노도 모두에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교감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전달했다.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는지 둘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리노를 타는 건 힘들겠네.’
김서준은 엘린에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리노 탈 테니까, 엘린이 반달이 타요.”
“그, 그래야겠어요. 미안해요. 리노.”
리노는 괜찮다는 듯 엘린에게 머리를 비볐다. 엘린은 환하게 웃으며 반달이에게 다가갔다. 반달이는 엘린이 타기 편하도록 자세를 낮췄다. 위에 올라탄 엘린의 손에서 마력이 뿜어졌다.
그러자 멋진 안장과 손잡이가 나타났다.
“진짜 대단하네요.”
“서준 씨도 해드릴까요?”
김서준은 거절하곤 펄쩍 뛰어 리노의 등에 올라탔다. 리노의 등은 역시나 푹신하고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이걸 포기할 순 없지.’
김서준은 리노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가죠!”
김서준의 명령에 맞춰 곰과 늑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엘린이 나타났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거 좋네.’
겨울의 칼바람은 엘린의 마법과 만나 시원한 산들바람이 되었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로 쏟아지자, 머릿속이 깔끔해지는 기분이었다.
적당한 속도감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리노와 교감하는 기분도 좋았다. 김서준은 엘린을 바라봤다.
‘잘 타네. 자세도 엄청 안정적이고.’
생각해보니 판타지 세계는 말을 타고 다녔을 터. 아마 승마처럼 반달이를 타고 있는 듯했다.
리노와 반달이는 산을 펄쩍펄쩍 뛰며 내달렸다. 가파른 경사도, 장애물도 문제없이 뛰어넘었다.
조금 덜컹거렸지만, 리노의 털이 워낙 푹신한 덕에 불편은 없었다.
“와, 이거 진짜 재밌네요.”
엘린도 재밌는지,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김서준도 웃으며 말했다.
“종종 해야겠네요. 괜찮지, 리노?”
“컹!”
리노는 반달이의 속도를 맞춰 달렸다. 그런데도 금세 언덕을 넘어 산 정상에 도착했다. 곰이 정말 빠르다는 말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와, 경치 진짜 좋네요.”
정상에 도착한 엘린이 한눈에 보이는 마을과 그 너머 풍경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높은 데서 보는 풍경은 참 예쁘죠? 어렸을 때는 그래서 아파트에 살고 싶었어요.”
“아파트요?”
“그 드라마에 나오는 위로 쭉 뻗은 건물이요.”
“아아.”
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는 가까이서 보는 게 좋아요. 가까이서 봐야만 보이는 게 있거든요. 이렇게 높은 데서 보면 그런 게 하나도 안 보이니까요.”
역시 엘프는 엘프랄까. 저 먼 풍경을 보며 대답하는 모습은 한 폭의 화보 같았다. 김서준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 말도 맞네요.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아침부터 정상까지 올라온 건 비단 환기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했다.
‘연락망을 만들어야겠지.’
모아둔 돈과 투자금으로 김서준은 산 대부분을 구매했다. 이제 아버지의 묘와 세계수 부근뿐 아니라 정 반대편 부근을 제외하면 전부 김서준의 땅이었다.
일호 가족과 반달이, 리노는 이제 이 산 전체를 순찰하여야 했다. 문제는 연락 체계였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지만 산은 산. 이대로는 발견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
특히나, 반달이 같은 경우 혹시라도 사람과 마주하면 그대로 신고를 당할 게 뻔했다. 발견하더라도 조치는 김서준이 직접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엘린도 마찬가지고···.’
리노나 노움은 사념으로 아무리 멀더라도 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린은 아니었다. 김서준의 이런 고민을 들은 엘린이 제안한 해결책은 간단했다.
“이 안에 의식을 연결하는 결계를 만들 께요.”
“그게 가능할까요?”
“리노 님의 교감을 이용하면 될 거예요.”
리노의 교감은 감정과 생각을 순간적으로 이어준다. 이렇게 연결된 마나 회로를 유지 시켜 두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했나.
‘사실 뭐라고 하는지 이해는 잘 안 됐지.’
엘린의 마법학은 라이너스의 대륙의 지식.
들을 때마다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제 ABC를 배웠는데 외국인이 와서 대화를 거는 느낌이랄까.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거지.’
“네. 시작하죠.”
김서준의 대답과 동시에 엘린은 지팡이를 소환했다. 지팡이를 기준으로 땅의 넓이를 가늠한 엘린이 말했다.
“넓이는 괜찮을 거 같아요. 이 정도면 마법진 그리기는 충분하겠어요. 높이도 괜찮고요.”
“그럼 이제 이거만 심으면 되겠네요.”
김서준은 아공간에서 기다란 막대 8개를 꺼냈다. 막대의 끝에는 새 머리 모양 장식이 붙어 있어 솟대였다.
‘아니, 겉보기에만 솟대지.’
실은 주변 마나를 흡수해서 작동하는 일종의 CCTV였다. 엘린은 결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마나를 흡수하는 재질의 말뚝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왕 박을 거면 그냥 말뚝보다는 무슨 기능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발견한 게 바로 이 솟대였다. 가격대는 조금 비쌌다만 상관없었다. CCTV라는 명목으로 IW그룹의 투자금을 활용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김서준은 속으로 심심한 감사를 전했다.
“다시 봐도 참 신기해. 이 세계의 장인들은 마법 학을 모르는 상태로 이런 걸 만든다는 게···.”
엘린에게 ‘스킬’이라는 시스템은 언제나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하긴 그냥 게임처럼 직업에 맞게 스킬이 생기는 게 신기하지.’
실제로 장인들도 제작 스킬의 레벨을 올려 더 좋은 도구를 만드는 거지. 원리를 알고 만드는 게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장인의 경지가 가능한 건 생산직 헌터뿐이었다.
“나중에는 마법학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는 연구를 해봐야겠어요.”
“알게 되면 저도 알려주세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주실래요?”
김서준이 솟대를 내밀었다. 엘린은 한 번 더 꼼꼼히 살폈다. 마나를 조금씩 흘려보기도 했다.
혹시라도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됐다. 대규모 결계인 만큼, 작은 흠결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괜찮네요. 잘 가져가서 심어주세요. 위치는···.”
엘린은 지팡이로 막대를 심으면 좋을 위치를 가리켰다. 김서준은 그 위치를 머릿속에 잘 새겼다.
“꼭 땅에 잘 박아주셔야 해요. 바닥에 제대로 안 꽂히면 송신탑 역할을 제대로 못 하니까요.”
엘린은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네. 단단히 잘 박아 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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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는 산 일대를 쭉 둘러 설치해야 했다.
“리노, 조금만 천천히 가줘.”
“컹!”
김서준은 겸사겸사 산을 돌며 구조를 눈에 익히고 대략 분류했다. 분류는 총 세 가지.
농원의 핵심이 될 신농의 땅으로 만들 부분.
신농의 땅은 아니지만, 활용할 땅.
나중을 위해 내버려 둘 땅.
가장 분류가 쉬운 건 역시 언덕의 반대편이나 정상 부근의 땅이었다.
‘역시 잠시 묵혀두는 게 좋겠어.’
이 산에는 세계수의 언덕과 아버지의 묘로 가는 길 외에는 산책로가 없었다. 리노가 없었다면 이렇게 돌아다니기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거리까지 멀어. 길 설치하기 전에 저기서 뭘 하기는 쉽지 않겠어.’
어차피 최종 목표는 농원을 넘어 농장을 만드는 일. 목장을 지어 농장으로 확장할 때까지 잠시 내버려 두는 것도 좋아 보였다.
‘일단은 동물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 정도만 만들어 놓자.’
신농의 땅으로 만들어 농원의 핵심이 될 장소도 어렵지 않게 정해졌다.
‘역시나 언덕 주변이 제일 좋겠다.’
언덕 주변 땅은 꽤 완만한 경사를 자랑한다. 세계수 옆이라서일까, 다른 곳보다 땅의 상태도 더 좋아 보였다.
더군다나 세계수의 언덕은 엘린의 연구소나 축복받은 송이버섯 터전도 있어서 자주 가야 할 장소.
‘여기가 딱이야.’
그 외 활용할 땅을 정하는 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일단 길부터 만들기로 했다.
김서준은 농원을 또 다른 일터이자 공원처럼 조성하고 싶었다.
‘나만의 정원처럼 말이야.’
일단 길을 먼저 만들고 활용할 땅을 길에 맞춰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보였다. 김서준은 리노를 타고 걸으며 나무가 적고 평탄한 부근을 주기적으로 표시했다.
표식을 따라 길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리노, 여기. 여기가 마지막이다.”
“컹!”
리노가 김서준이 말한 곳에서 멈춰섰다. 계획과 함께 산세를 살피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솟대였다.
김서준은 리노에게 내려서 황금 삽을 소환했다.
-움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김서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내 한기는 사라졌다. 엘린이 걸어둔 마법 덕분인 듯했다.
‘산이 춥긴 춥구나. 벌써 이런 칼바람이 부네.’
들고 있던 솟대마저 방금의 바람 때문인지, 장갑 너머로 냉기가 느낄 정도로 차가워졌다.
김서준이 혹시나 해서 리노를 바라봤다. 리노는 폭신한 털 덕분인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다행이네.’
김서준은 황금 삽을 소환했다. 땅은 역시나 깡깡 얼어 있었다. 이제껏 작업한 부분보다도 훨씬 더 단단했다.
‘뭐, 일반 삽이라면 고생 좀 했겠지만···.’
김서준은 황금 삽을 살짝 내리꽂았다. 그다지 강하지도 않았건만, 황금 삽은 살짝 언 땅을 젤라토처럼 부드럽게 밀고 들어갔다.
‘이 정도는 케레스의 농기구에는 문제가 안 되지.’
발로 누를 것도 없었다. 손과 허릿심만으로 한 삽질 몇 번에 적당히 깊게 땅이 파였다.
마지막 솟대도 그렇게 손쉽게 작업이 완료되었다.
“어, 벌써 다 하셨어요?”
곧장 돌아온 정상. 엘린은 여전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엘린은 지팡이 끝을 마치 붓처럼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마법의 일종인지 지팡이 끝에 빛나는 부분이 땅에 닿으면 하얀 선이 나타났다.
“거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네.”
“컹!”
리노와 김서준은 원의 밖에서 잠시 엘린의 작업을 기다렸다. 아주 다행히도 거의 다 됐다는 말은 진짜였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결계가 완성되었다.
“이제 발동만 하면 돼요. 바로 해볼까요?”
“네.”
엘린이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자 흰색으로 그려진 마법진에서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커넥션 링. (Connection Ring)."
푸른 빛은 파란 고리를 만들더니 이내 산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때였다.
[배고픔, 추움, 재밌음, 신기함.]
노움과 리노, 엘린부터 일호 가족, 반달이의 감정이 동시에 김서준의 머리로 휘몰아쳤다.
“이건···?”
“연결 중이라 그래요. 이제 다 사라질 거에요. 됐네요. 이제 저를 떠올리고 저한테 하고 싶은 메시지를 떠올려 보세요.”
김서준의 엘린의 말대로 머릿속에 생각을 떠올렸다.
‘추운 데 고생하셨습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엘린의 메시지가 들렸다.
[아니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김서준이 놀라 엘린을 바라봤다.
“제대로 성공이네요. 감사해요.”
“아니에요. 근데 추우셨어요?”
“아니요. 엘린님 마법 덕분에 괜찮았는데, 아까 잠깐 바람 부는 데 엄청 춥더라고요.”
“네? 바람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엘린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한기를 느끼려면 눈보라 정도는 불었어야 했을 텐데···?”
정적이 흘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별일 아니라지만, 세계수의 주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엘린이 말했다.
“서준 씨 잠깐 옷 좀 주세요.”
엘린은 서둘러 김서준의 바람막이를 벗겼다. 엘린의 푸른 눈동자가 이채가 어렸다. 그 상태로 엘린은 검사하듯 바람막이를 살폈다.
“마법에는 이상이 없는데···. 착각한 거 아녜요?”
“절대 아닙니다.”
바람, 감촉. 소름. 모든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솟대마저 장갑을 넘어 시릴 정도로 차가워진 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순간 두 사람의 머리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또 이계에서 무언가 넘어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