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걱정마세요
“내 고향은 강원도일세. 바위가 많아서 바회마을이라고 불렸지.”
그렇게 말한 정 회장은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보더니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어. 모두가 마을을 떠났거든. 그리고 추억으로 남았던 장소도 모두 사라졌지.”
그 표정만큼이나 상실감이 컸던 걸까. 알고 보니 정 회장은 개인 재산으로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 등에 투자와 후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설마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운이 좋았어.’
정말 운이 좋았고. 덕분에 일은 잘 풀렸다. 그런데 마음 한편이 착잡하다.
정 회장의 표정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상실감, 아련함, 그리움 그 모든 감정이 섞인 그의 모습은 사회의 정점에선 이가 지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긴. 나 역시 그랬으니까.’
슈퍼 아저씨가 떠난다고 했을 때 느꼈던 여러 가지 안타까운 감정들. 그런 감정들이 훨씬 더 커져 마음 구석에 단단히 자리 잡는다면 저런 느낌일까.
정 회장은 사업가였다. 자선 사업가가 아니었다. 계약을 마친 후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일단 투자금치고 계약금을 주겠네. 자네와 명인을 믿으니까. 하지만 재배한 작물을 보고 나서 한 번 더 거래를 고민하겠네.”
그리고 뒤에 정 회장은 덧붙였다.
“자네의 농작물은 맛있지만, 따뜻하네. 먹을 때면 고향의 그리움이 느껴지더군. 아마 자네가 사는 마을이 이런 느낌이겠지. 자네는 그 마을을 꼭 지켜냈으면 좋겠네.”
그 진심이 그득한 말은 김서준의 마음에 고스란히 와 닿았다. 김서준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를 위한 터전으로 만들어 낼 겁니다. 저를 위해서라도요.’
그리고 다짐했다. 자신은 저런 후회 가득한 표정은 짓지 않겠다고.
****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시내에 나갔다가 오겠다고 하면 김서준은 그날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오늘은 뭘까? 치킨? 피자? 햄버거?’
시골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다양한 음식을 아버지가 양손 가득 사오 셨기 때문이었다.
이제 시대는 변했다. 어디서든 배달음식이 편해졌다. 저런 패스트푸드는 특식이 아닌, 해 먹기 귀찮을 때 먹는 음식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금산마을은 여전하지.’
금천면 안에서도 꽤 동떨어진 마을. 그 마을 안에서도 외각에 혼자 떨어져 있는 김서준의 집은 더더욱 그랬다.
인터넷을 연결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전신주를 설치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김서준도 오늘은 아버지의 기분을 느껴보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맛집에서 줄을 기다려 빵과 만두를 샀다.
역에서 차로 갈아탄 뒤에는 시내에 들려 치킨, 피자와 금천면에 하나밖에 없는 놋데리아 햄버거 세트도 구매했다.
“다들 잘 먹으니까 이 정도는 사야겠지?”
뒷좌석 한가득 쌓인 음식을 보며 김서준은 뿌듯해했다. 비록 차 안에 음식 냄새가 진동해서 시트에 냄새가 밸 거 같긴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맛있다움!’
‘멍멍!’
‘와, 정말 맛있어요.’
이런 귀여운 반응을 볼 생각에 오히려 살짝 흥분되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애 키우는 사람 같네.’
김서준은 피식 웃으며 즐겁게 엑셀을 밟았다.
-부웅.
엔진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파란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유유자적하게 흘렀다. 라디오에서는 오랜만에 듣는 옛날 노래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잿빛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던 그 분위기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기분 좋게 달리니 어느새 집 앞.
그런데, 이상했다.
“이쯤 되면 나와야 하는데···?”
엘린이야 연구 중일 수 있지만, 마중을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노움이나 리노가 보이지 않았다.
‘산에 동물들이랑 놀러 가서 아직 안 내려왔나?’
해가 많이 기울어져 하늘에는 주황색 물감이 번졌지만, 시간은 이제 4시 30분.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만.
‘대문이 열려 있네···?’
아무도 없는 데 문이 열려있을 리 없었다. 김서준은 일단 집 옆에 공터에 주차를 마쳤다. 그리고는 양손에 음식을 든 채 조심스레 집으로 들어갔다.
“신농님 오셨습니까움?”
“오셨어요?”
마당에 있던 엘린과 노움이 김서준을 바라봤다. 김서준의 촉을 반증하듯 두 사람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게다가 리노가 왜 저러지?’
리노가 꼬리를 말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었다.
“멍···.”
힘 빠지는 목소리로 인사하는 리노. 교감을 통해 아쉬운 기분이 마구마구 김서준에게 흘러들어왔다.
‘이렇게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데 리노가 저런 상태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김서준이 의아한 눈으로 엘린과 노움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말이죠. 반달이 때문에요.”
“네? 그 애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게 아니고. 겨울잠을 잔다고···.”
벌써 12월에 접어든 초겨울. 거기에 올해는 초겨울부터 날씨가 추웠다. 더군다나 산은 더더욱 한파가 들이닥쳤다.
그러다 보니 겨울잠을 안자는 개과 동물과 달리 반달이는 겨울잠 준비에 들어간 것이었다.
문제는 리노의 감정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아쉬웠던 거다.
‘처음 사귄 동물 친구인데, 바로 자러 간다니까 서운했구나.’
앞에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집에 와서는 온 종일 저 상태라고 했다. 역시나 리노는 덩치만 크지(물론 평소에는 작지만) 애였다.
김서준은 웃으며 둘에게 말했다.
“일단 우리 안으로 들어갈까요? 제가 맛있는 거 엄청 많이 사 왔거든요.”
김서준의 말에 노움과 엘린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동시에 리노의 귀가 움찔했다.
“춥다. 얼른 들어가요. 리노도 들어와. 아무리 속상해도 밥은 먹어야지.”
김서준이 은근히 말하자 리노가 못 이긴 척 집으로 들어왔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집 안으로 들어온 김서준은 오븐과 에어프라이기로 음식들을 다시 데웠다.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가 퍼지자 다들 눈이 반짝거렸다.
리노 역시 침울한 와중에도 군침을 삼켰다.
“다들 이런 건 못 먹어본 거 같아서, 나간 김에 사 왔어요. 먹어봐요.”
“잘 먹겠습니다움!”
“잘 먹을게요.”
둘이 먼저 각각 치킨과 피자를 하나씩 집었다. 리노는 망설이는 눈치. 울적한 기분과 식욕이 내면에서 싸우는 듯했다.
“이리 와.”
김서준이 리노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피자를 한 조각 입에 물리면서 말했다.
“내가 해결해 줄게. 걱정하지 말고 일단 먹어. 이거 맛있어.”
그러자 리노가 놀란 듯 김서준을 바라봤다. 김서준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리노는 그제야 꼬리를 흔들며 피자를 한입에 물었다.
‘진짜 맛있게 잘 먹는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노는 정말 신기했다. 어디 보면 애완동물에게는 이런 거 먹이면 안 된다던데, 리노는 뭘 먹든 참 잘 먹었다.
그리고 김서준은 그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이 좋았다.
“근데 진짜 방법이 있어요? 곰은 원래 겨울잠을 자야 하지 않나요?”
엘린이 물었다. 동물의 습성은 자연의 섭리와도 같아서일까. 엘린은 반달이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뱀 같은 동물이야 생존을 위한 잠이지만, 곰의 겨울잠은 다르죠.”
어렸을 적 동물원에 갔을 때였다. 김서준은 잠을 안 자고 돌아다니는 곰을 보고 아버지에게 물었었다.
‘저 곰은 왜 안 자요?’
그리고 김서준은 그때 들었던 대답을 엘린에게 전달했다.
“먹이도 부족하고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체력을 아끼기 위해 자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두 가지를 제가 채워주려고요.”
“흠···.”
“그리고 어차피 일호 가족도 챙겨야 할 거예요. 저 산에 그렇게 식량이 넉넉하지 않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리노가 있는 데까지 내려왔겠죠?”
“하긴···. 그래도 다 챙기실 수 있겠어요? 양도 많이 들 거고. 관리도 해야 하고. 영양도 그렇고. 신경 쓸 게 많을 텐데.”
김서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미트루트가 있잖아요.”
“아!!!”
엘린이 귀를 쫑긋거렸다.
미트루트는 키우기도 쉽고, 수확량이 많다. 리노와 노움의 간식, 엘린의 실험 말고는 쓸 일이 없어서 수확량을 조절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작정하고 수확하면 그 정도 애들 먹이 챙기는 건, 식은 죽 먹기지.’
거기에 모크 족이 아랑족에 사료로 썼을 만큼 영양 성분도 뛰어나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주식인 도토리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그게 있었네요.”
“네, 그리고···.”
김서준이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저도 애들이 잠 안 잤으면 좋겠거든요. 시킬 게 있어서.”
열심히 닭 다리 하나를 뜯던 리노가 좋아서 펄쩍 뛰었다. 김서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근데 왜 닭 다리가 없지. 분명 치킨을 두 마리 사 왔는데···.”
****
“힘내라움!”
“움!! 움!!”
노움과 움들이 잡초를 제거하는 밭. 김서준은 물뿌리개를 들고 밭을 도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힘드네.’
아무리 물뿌리개에서 물이 계속 나오고. 신농의 땅이 흡수도 잘한다지만, 3,000평이 넘는 땅을 일일이 도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땅이 충분히 물을 머금기를 기다리며 야금야금 전진하다 보니, 고작 물뿌리기가 노움과 움의 작업보다 오래 걸리기도 했다.
‘어르신 말대로 슬슬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하나.’
설치하면 되는 데 뭔가 아쉽다. 물 뿌리기는 김서준의 노동력만 들어가는 유일한 일이었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면 이제 그 일이 사라진다. 이건 효율의 문제가 아닌 감성의 문제랄까.
‘케레스의 농기구가 한 번에 여러 개 소환되면 좋을 텐데···.’
원래 김서준은 이걸 드론으로 해결하려 했다. 조종이라는 약간의 노동력도 투입되고 온전히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는 일종의 타협점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케레스의 농기구로 소환할 수 있는 드론은 단 한 개. 한 개로 이 모든 땅에 물을 주는 건 김서준이 직접 도는 거랑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제 드론을 살 수도 없고···.’
케레스의 농기구로 드론을 소환하면 물이 무한정 쏟아진다. 반면 시중에 파는 드론은 계속 물을 채워줘야 한다. 게다가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도 너무 적었다.
여러 대를 한꺼번에 조종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도 문제였다. 케레스의 농기구로 소환한 드론은 마법이기에 텔레파시로 움직였다.
‘근데, 일반 드론은 프로그래밍으로 해야 한다고 했지. 괜히 일반 드론으로는 살충제만 뿌리는 게 아니었던 거지.’
프로그래밍까지 공부해가며 군집 드론을 조종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농원 조성으로 여러 가지 공부하기도 바빴다.
‘자격증명 퀘스트를 깨면 해결되겠지.’
드론을 여러 대 소환을 시도하면, 능력이 부족하다는 알림창이 나타났다. 자격을 증명한다면 여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소환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멍멍!”
물을 주며 이런 생각에 빠져있던 김서준이 리노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잘하네.”
리노는 일호 가족을 지휘하고 있었다.
마치 노움처럼 정자 옆에 자리를 잡고 턱짓으로 지시했다. 그러면 일호 가족들은 그 신호에 맞춰 이리저리 움직였다.
“저 정도면 역시 충분하겠어.”
김서준이 반달이와 일호 가족에게 시킬 일은 바로 경비였다.
고라니, 멧돼지, 두더지, 너구리 등.
열심히 키운 농부의 결실을 노리는 짐승들은 많았다. 여태는 신농의 땅이 가진 힘으로 이런 동물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농원을 만들어야 하니까.’
세계수의 언덕이 있는 산.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농원을 만들기 위해 신농의 땅을 넓히는 일은 불가피했다.
지난번 두더지처럼, 점차 많은 유해동물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농원 만들겠다고 동물을 내쫓을 순 없지만, 농작물을 먹게 둘 순 없지.’
리노를 필두로 반달이와 일호 가족은 이 동물들로부터 농작물을 지키는 일을 맡길 셈이었다.
리노와 함께 열정적으로 순찰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충분히 믿고 맡겨도 될 듯했다.
‘테스트는 끝났으니까···.’
“엘린에게 내일 바로 만들자고 해야겠어.”
김서준은 혼잣말하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