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위로
“그러니까, 농작물이 강해지는 저주라는 거지?”
“네. 어르신. 병충해나 온도 변화에 강해져서 기존의 토종 작물이 가진 단점을 보완하는 거예요.”
“난 또 뭔 저주라고 해서 오해했구먼.”
“방식이 저주인 건데···. 엘린이 한국말이 서툴러서요.”
김서준이 엘린을 바라봤다. 엘린이 혀를 빼꼼 내밀었다. 진지하고 차분하면서도 은근히 이런 장난을 좋아한다만.
‘어르신은 깜짝 놀라시니까 자제하라고 말해줘야지.’
“근데, 그러면 품종 개량처럼 유전자가 변하거나 섞이는 거 아녀?”
“아니요. 마력으로 원래 씨앗이 가진 잠재력을 전부 사용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유전자나 원래의 성질은 전부 그대로예요.”
김서준의 말을 들은 임종철이 경의로 물들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네는 성공할 거 같더니만. 정말로 성공해 버렸구먼! 정말로 해냈어!!”
임종철은 김서준의 양손을 잡았다. 그리곤 연신 고맙다며 손을 흔들었다. 김서준은 어쩔 줄 몰라 엘린을 바라봤다. 엘린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할아버지! 왜 우냐움!”
“멍.”
주변에서 뛰놀던 리노와 노움이 임종철이 우는 걸 발견하고는 다가와 물었다. 임종철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두 귀여운 존재를 쓰다듬었다.
“아녀. 아녀. 아무 일도 아녀.”
“울지마라움! 슬픈 일이 있으면 말하라움! 우리가 해결해 주겠다움!”
“멍!”
“너무 좋아서 그려. 걱정 말고 우리 새끼들은 가서 놀아.”
둘 덕분에 난감했던 상황이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한참을 그러던 임종철이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이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주책을 떨어버렸구먼. 놀랐지? 미안혀.”
“아닙니다. 어르신.”
“괜찮아요.”
목을 가다듬은 임종철은 김서준의 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명인이라는 이름답게 농부로서 이룰 건 거의 다 이뤘지. 근데 한 가지 실패한 일이 있어. 그게 바로 토종 작물이었지.”
“아···.”
김서준은 한참 토종 작물을 조사할 때 봤던 옛날 기사를 떠올렸다.
‘직접 참여한 품종 개량 프로젝트에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그리고 그건 아마 임종철이 농부로서 했던 일 중 거의 유일한 실패였을 터.
“그게 참 마음의 짐이었지. 종자 은행을 만든 것도 그래서였고. 근데 자네 덕에 내가 숙원을 푸는구먼. 참말로 고마워.”
그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마음이 뭉클한 걸 넘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매일 좌절로 상처받았던 마음 어딘가의 상처도 아무는 느낌이었다.
왠지 모를 울컥함을 김서준은 겨우 삼켰다. 그리고는 겨우 침착함을 유지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르신의 도움 덕에 여기까지 온 거죠. 토종 작물 재배 방법도 어르신이 알려주셨고요. 그리고···.”
김서준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술을 뗐다.
“아직, 완성한 건 아닙니다. 실험이 좀 필요합니다.”
“아, 그렇구먼. 이거 주책을 너무 심하게 부렸어. 그래, 얼마든지 내 텃밭에도 걸어. 내가 아주 잘 키워 볼 테니께.”
“네. 잘 부탁드립니다.”
황금색으로 물든 하늘 아래, 천천히 밭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까 울 뻔했죠?”
엘린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아닌 거 같은데···.”
엘린이 김서준을 뚫어지라 쳐다보다, 이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여기 와서 느낀 게 있는데요. 신농님이 서준 씨라 참 다행인 거 같아요.”
“그런가요?”
“네. 신농님은 정말 농사와 작물에 진심으로 대해주시고. 사리사욕을 위해 능력을 남용하지 않잖아요. 세계수님도 분명 신농님의 그런 마음을 보고 뽑았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신농이 되고 처음으로 신농으로써 평가를 받은 건데. 평이 좋아서 기분이 좋네요.”
엘린이 눈을 찡끗했다.
“물론 제가 했으면 더 잘했겠지만요.”
엘린은 그렇게 말하며 생글거렸다.
‘진짜 은근 장난기가 넘친다니까.’
산에서 세계수를 모시면서 살아갈 아주 예쁜 신녀님 같은 외모로 말이다. 김서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 내일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생각해볼게요.”
“내일요? 내일 어디 가세요?”
“네. 내일 중요한 분을 좀 만나야 해서요.”
****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분주한 발걸음으로 붐비는
도심 속 이 거리
숲속에 나무들처럼
빽빽한 빌딩들.
한때 좋아했던 노래 가사와 같은 도시의 광경 속으로 오랜만에 김서준은 발을 디뎠다.
‘그때 그 노래 들으면서 일탈을 꿈꾸곤 했는데.’
이제는 정말 이방인이 되어 서울 땅을 밟으니 꽤 감회가 새로웠다.
한때는 저 높이 솟은 빌딩 숲 한자리를 차지하겠다며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했건만. 지금은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렇게 시골에 잘 맞을 줄이야.’
아니, 어쩌면 지난날 이 회색 숲에서 살아남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기에 지금 이렇게 더 자유로울지도.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김서준은 역을 나섰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그 무리에 끼어 뭐라도 해야 할 성싶다.
이제는 이방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들 힘내세요.’
아마 저 거리를 걷는 모두가 그런 압박감을 느낄 터. 김서준은 심심한 위로와 함께 오늘의 행선지로 향했다.
“오랜만에 입었더니 어색하네.”
오랜만에 꺼낸 양복과 코트는 도심의 풍경만큼이나 어색하고 답답했다. 농사를 지을 때 입는 편한 복장에 너무 적응한 탓이었다.
‘진짜 농부인 척은 다 한다니까.’
아직 1년도 안 채운 햇병아리 농부건만, 몇 년은 농사를 지은 꾼처럼 구는 자신의 몸을 보며 김서준은 실소를 터뜨렸다.
택시를 타고 한 걸물 앞에서 내린 김서준은 다시 한번 복장을 점검했다. 깃도 세우고 넥타이도 제대로 맨 후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김서준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바라봤다.
‘옛날 생각나네. 한참 일 할 때는 이렇게 많이 다녔지.’
영업도 많고 미팅도 많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좋은 추억도 많았지만, 나쁜 기억은 더 많았던 그 시절. 김서준은 한편으로 미뤄두었던 그 시절의 자신을 꺼냈다.
‘뻔뻔하게, 편하게 하자.’
상대가 상대인 만큼 주눅 들어서는 안 됐다.
마지막으로 들어가기 전 휴대폰을 확인했다. 엘린에게 무슨 일 생기면 컴퓨터를 이용해 메시지를 보내라고 했다.
일종의 비상 연락망인 셈.
‘아무 연락도 없네.’
사실 노움이 알아서 농사를 지을 테고. 리노야 산에서 친구들이랑 잘 놀 거고. 엘린은 연구하느라 바쁘니 큰 문제가 있을 리는 없었다.
그저 온전히 계약에 집중하기 위해, 티끌만 한 근심 하나까지 지우기 위함이었을 뿐.
“후···.”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자신에게 말했다.
“잘하자.”
김서준은 여느 때보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IW그룹의 본사 건물로 입장했다. 빌딩으로 들어가자 정장을 입은 직원이 김서준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일전에 정 회장과 함께 왔던 비서였다. 악수로 인사를 나눈 둘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걸 이용하는 건가.’
비서는 VVIP 용으로 설계된 엘리베이터로 김서준을 안내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한참 일하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요즘 따라 이런 일이 종종 있네.’
단순하게는 돈 적으로도 그랬고, 대우나 명성도 그랬다.
‘이제와서 그게 욕심나는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네.’
김서준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다. 그 어색한 공기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느낌 진짜 오랜만이네.’
김서준은 정 회장과 나눌 대화를 떠올리며 애써 그 어색함을 넘겼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곧장 정 회장의 방 앞에 도착했다.
방앞에 있던 여자 비서가 인터폰을 들었다.
“회장님, 김서준 농부 오셨습니다.”
잠시 후,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함께 올라온 비서가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김서준은 가볍게 묵례를 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정 회장이 인자한 미소로 김서준을 반겼다. 김서준도 웃으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죠?”
“물론일세. 자네도 인상을 보아하니 잘 지낸 거 같군. 앉게.”
정 회장은 차 두 잔을 내오라고 비서에게 명령한 후, 김서준을 앉혔다. 푹신한 소파에 김서준은 천천히 몸을 묻었다.
“그건 뭔가?”
정 회장이 김서준이 가져온 쇼핑백을 보고 물었다. 김서준은 웃으며 책상 위에 쇼핑백을 올렸다.
“송이버섯입니다.”
쇼핑백 안에서 하얀 상자가 나타났다. 정 회장의 표정이 미묘했다.
“송이버섯을 이렇게 포장하나?”
송이버섯은 보통 큰 스티로폼 상자를 이용해 포장한다. 아이스팩을 넣어 선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 낯선 모습에 정 회장은 미심쩍어하는 듯 보였다.
“상자 자체가 마도구라서 그렇습니다. 등급이 높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선물 포장용으로는 용이합니다.”
실은 엘린이 평범한 상자에 마법진을 그려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되지. 스킬을 이용해 만든 도구라는 점에서 마도구랑 비슷하기도 하고.’
물론 장인이 자신의 스킬을 이용해 적절한 재료를 투자해 넣은 마도구보다는 훨씬 간단하게 만들긴 했다만.
“흠···.”
한동안 상자를 예의주시하던 정 회장이 물었다.
“열어봐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런가? 고맙네.”
정 회장이 반색하며 상자를 열었다. 갓 캔 싱싱한 송이버섯이 그 예쁜 자태를 드러냈다.
“오오···.”
정 회장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생물로 보니 더 대단하군.’
크기, 모양. 어디 하나 흠잡을 때 없는 최상품.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뛰어난 건 역시나 향이다.
‘과연 셰이드 왕자가 한국에서 꼭 사고 싶다고 말했을 만한 향이야. 이건 꼭 거래를 성사시켜야 해.’
상자를 연 순간 정 회장의 방을 통째로 숲에 옮겨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한동안 향을 음미하던 정 회장이 말했다.
“이걸 가져왔다는 건 역시나···.”
“네. 계약에 관련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계약 테이블 위는 작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서로의 이익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일이 바로 계약이니까.
무엇 하나라도 더 우세를 점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한 치의 긴장감도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네.’
김서준의 각오가 무색할 정도로 정 회장은 오픈 마인드였다. 무엇을 말하든 다 들어줄 기세였다.
‘송이버섯의 위력이 그렇게 강했나?’
하긴 임종철 명인도 놀란 유일무이한 버섯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 거래의 실제 당사자는 셰이드 왕자일 터.
‘어떤 조건을 걸 든 사는 게 중요하겠지.’
덕분에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백기를 든 상대와의 전쟁이랄까.
“...좋네. 그럼 올해 송이버섯 특상품 가격이 1kg당 110만 원이었으니, 그 두 배인 220만 원을 최저 금액으로 보장하고. 매번 이 가격에서 VVIP들에게만 경매 형태로 팔겠네. 양이 워낙 적으니까. 수입은 3:7 어떤가? 자네가 7일세. 대신 완벽한 독점 거래일 세.”
“2:8로 하시죠.”
“좋네. 거기에 송이버섯 불법 채취를 막기 위한 CCTV 설비 지원은 투자인 셈 치지. 또 필요한 게 있는가?”
송이버섯 계약은 일사천리였다. 김서준은 여세를 몰아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토종 작물 거래는 혹시 마을 전체를 거래 대상으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을 전체를? 그런 작물을 마을 전체가 재배한다는 말인가?”
“연구 중입니다. 그리고 곧 완성될 예정이고요.”
“연구? 자네 종자 회사라도 차린 건가?”
정 회장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종자 사업은 최근 블루오션으로 부상하는 사업이 아니던가?
IW그룹도 몇몇 스타트업에 투자한 상황. 김서준이 직접 차린 회사라면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슷한 데 조금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하는 거라서요.”
“그렇군.”
정 회장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김서준은 무시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지금 임종철 어르신이 마지막 실험 중입니다. 내년 봄에는 마을 전체가 작물을 재배할 거고요. 그때, 저희 마을 전체와 계약을 고려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흠···.”
정 회장의 심각한 표정을 본 김서준은 아차 했다.
‘그냥 그때 고려 대상에 넣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좋은 분위기에 너무 쉽게 계약을 던진 게 화근이라고 생각한 찰나, 정 회장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왜 마을 전체와 계약하자는 건가? 자네의 작물만 팔아도 그만 아닌가?”
“토종 작물을 마을에 특산물로 만들고 싶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덕분에 수익이 생기고, 작물들은 살 땅을 얻을 겁니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지지 않게 터전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모두가 사라지지 않는 터전이라...”
정 회장은 김서준의 대답을 곱씹었다. 한참을 그러던 정 회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