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정자 만들기
“제가 예전에 본 책에서 가문에 저주를 걸어버리니까, 대대로 그 저주의 영향을 받던데···.”
“맞아요. 흑 마술사들의 저주 중에는 대대손손 이어지는 저주들이 있어요.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적혀있는 책이 있나 보네요.”
‘있긴 있죠. 전문 문헌이 아니라 동화책이나 판타지 소설이긴 하지만.’
김서준은 그 말 대신 스스로 세워 본 어설픈 아이디어를 말했다.
“네, 뭐 비슷하죠. 여튼 혹시 그런 저주를 이용하면 계속 마법이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저주를요···?”
“뭐, 병충해에 강해지는 저주랄까요. 하하.”
말하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엉터리다. 김서준은 민망함에 괜히 뒤통수를 긁으며 말끝을 흐렸다.
“신농님은 정말···.”
엘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좀 심했나?’
그렇게 생각하려는 순간, 엘린이 김서준의 양손을 와락 붙잡았다. 그리고는 초롱초롱한 푸른 눈동자로 김서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천재네요. 천재.”
“네?”
“와, 맞아요. 그런 저주를 만들면 확실히 가능할 거 같아요.”
엘린은 귀를 쫑긋거렸다. 그건 너무 좋을 때나, 너무 즐거울 때. 그리고 너무 놀랐을 때의 반응이었다.
이번에는 세 가지 전부인 듯했다.
엘린은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며 스스로를 탓했다.
“축복 계열 마법 중에 그런 마법이 있어요. 저주처럼 어떤 조건만 해당하지 않으면 효과를 유지 시키는 방식으로요. 물론, 너무 어렵고 효과도 미미해서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요. 근데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식물이라면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되겠죠.”
엘린은 다시 한번 김서준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생각의 틀이 깨지면서 정말 대안이 떠오른 게 확실했다.
‘다행이야. 도움이 되겠어.’
저렇게까지 깊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뭐 어떤가? 어쨌든 정답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일. 김서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요.”
“제가 고맙죠.”
엘린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래서 너무 많이 알아도 문제예요. 생각이 안 난다니까.”
그리고는 칭찬인지 자책인지 모를 말을 뱉으며 삼동파 하나의 윗동과 코끼리 마늘을 챙겼다.
“얘네들이 마력을 잘 흡수해요. 일단 이 친구들로 실험해보고 경과를 알려 드릴게요.”
“부담 없이 하세요. 실패하면 다시 찾아보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연구에서 실패는 밥 먹는 일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엘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볼 때마다 참 예쁜 솔직한 웃음이었다.
****
김서준의 농사주기는 일주일로 정형화되었다. 일요일에 재배와 동시에 다시 씨를 뿌리면 딱 다음 주 일요일에 같은 작업을 할 수 있는 농사 루틴이 만들어졌다.
따로 쉬는 날은 만들지 않았다.
노움 덕에 작업은 오전이면 끝나기도 했고. 필요하다면 노움에게 맡겨놓고 온종일 휴식을 하거나 엘린의 연구를 도울 수도 있었다.
‘참 고마운 녀석이야.’
오늘도 그랬다.
잡초와 물뿌리기 작업은 진작에 끝났다. 특히나 엘린이 기분전환 삼아 농사일을 도우러 온 덕에 더더욱 빨리 끝났다.
‘거기에 날씨도 좋고. 역시 오늘이 좋겠어.’
김서준은 마음을 굳혔다. 시장에서 상인들이 챙겨주신 여러 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마친 김서준은 엘린을 바라봤다.
엘린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세 대신이라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김서준이 엘린에게 물었다.
“오늘 시작할 건데, 같이 하실래요?”
“진짜요? 좋아요!”
재밌겠다고 중얼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엘린. 그걸 보며 김서준은 마당으로 나와 리노와 노움을 불렀다.
“움!”
“멍!”
미트루트를 먹고 마당에서 뛰놀던 둘이 김서준에게로 달려왔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귀여운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김서준이 말했다.
“오늘 시작할 거야.”
“정말 입니까움?”
“멍멍멍!”
“그래.”
한껏 신이 난 둘과 함께 김서준은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하얀 담벼락 옆에 많은 나무자재가 쌓여있었다. 곰팡이 하나 없이 잘 가공된 게 한눈에 봐도 좋은 자재였다.
‘진짜 감사하네.’
그 날 시장에서의 일 때 만났던 철물점 아저씨가 보내준 목재였다. 뭐든 주겠다던 아저씨는 김서준이 정자를 직접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곤 자재를 공짜로 보내주셨다.
단순 목재뿐 아니라, 주춧돌, 철근, 심지어 목재를 보호하는 오일 스테인까지 모든 걸 공짜로 보내주셨다.
‘그것도 좋은 물품들로만 보내주셨지.’
아는 업자를 통해 싸게 구했다고 말씀하셨다지만, 분명 돈이 한두 푼 든 게 아니었을 터였다.
김서준은 돈을 드리겠다며 말씀드렸지만, 아저씨는 한사코 거절하셨다.
“좋은 일을 했으면 복을 받아야지. 이 정도는 별거 아녀. 나중에 또 시장 오면 한번 놀러 와.”
김서준은 어쩔 수 없이 아저씨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니.’
도시에서는 그 상식적인 일이 자주 상식을 벗어나곤 했다. 좋은 일을 하고 오히려 칼을 맞는 경우도 허다했던 그곳과 금천면은 확실히 달랐다.
‘좋은 일. 나도 꼭 돌려드려야지.’
김서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리노와 노움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 나무보다 좀 더 두꺼운 나무로 찾아봐 줘. 내가 2시간 있다가 올라갈게. 괜찮지?”
“물론입니다움!”
“멍멍!”
다시 한번 목재를 눈에 담은 녀석들은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전의가 활활 느껴졌다.
“이거 경쟁 아닌데···.”
“응? 둘은 어디 가요?”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엘린이 물었다.
“아, 기둥으로 쓸 나무좀 구해달라고 했어요. 정자 만들 때 기둥으로 쓸만한 나무가 필요해서요. 다른 건 몰라도 기둥은 나무를 직접 베서 사용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김서준이 아차 하고 말했다.
“아, 엘프는 나무를 베는 걸 싫어하시겠군요.”
“아니에요. 저희도 나무를 베서 시설을 만드는 걸요.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베거나 태우는 게 아니라면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엘린이 씽긋 웃으며 저 멀리 뛰어가는 둘을 바라봤다.
“근데 저 둘 정말 열정이 넘치네요. 저 열심히 뛰는 뒷모습 좀 봐요. 너무 귀엽지 않아요?”
“하하.”
김서준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정령왕이니, 에인션트 울프니 하더니. 이제 그런 기색 하나도 없네.’
지금은 귀엽다며 호들갑을 떠는 리노와 노움의 1호 팬이 되었다.
“엘린, 에인션트 울프한테 그렇게 해도 돼요? 그러다가 물려가요.”
엘린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런 에인션트 울프라면 잡혀가도 괜찮겠는데요?”
능글맞은 대답에 김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어요. 얼른 이거나 해요.”
김서준은 엘린에게 목장갑 한 쌍과 오일스테인 한 통을 주었다.
“이게 뭐에요?”
“오일 스테인이라는 건데요. 목재를 벌레나 균들로부터 보호하고 습기를 머금는 것도 막아 주는 마감제에요. 미관에도 도움이 되고요.”
“와, 엄청 편하네요. 원래 목조 건물은 유지보수에 시간 많이 드는 데. 나중에 이것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봐야겠어요.”
천생 학자인 엘린은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라이너스 대륙, 특히 마법 학이 있는 엘린의 세계에서 과학은 아직 미지의 분야나 마찬가지였다.
“한 통 더 시켜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네.”
김서준은 엘린에게 작업대를 부탁했다. 김서준의 이야기를 들은 엘린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작은 진을 그렸다.
-파직!
마나 반응이 일더니 넓적한 기둥 두 개가 나타났다. 김서준은 목재의 양 끝을 그 기둥에 맞춰 올렸다.
“괜찮은데요?”
간격도 적당하고 꽤 단단히 고정되었다. 작업 대 위로 목재 5개를 올린 김서준이 말했다.
“이 정도로 하나만 더 부탁해요.”
“네.”
작업대를 만든 두 사람은 곧장 마스크를 쓰고 작업을 시작했다. 반복되는 작업이 지루할 법도 한데 엘린은 불만 없이 칠을 이어갔다.
“근데 정자는 갑자기 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다 엘린이 불쑥 질문했다.
“밖에서 밥 먹는 거 다들 좋아하잖아요. 근데, 맨날 바닥에서 먹는 게 좀 그래서요.”
“하긴, 그러네요. 자리도 불편하고.”
"가끔은 가서 그냥 쉬기도 하고요. 저는 그냥 밭이나 풍경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서준 씨 밭이 뭔가 더 그런 거 같아요. 보고 있으면 뭔가 편안하달까요.”
엘린의 말에 김서준은 괜히 으쓱했다. 밭을 칭찬받는 게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이제 진짜 농부가 다 됐네.’
김서준은 농부는 절대 안 하겠다던 어린 날을 떠올랐다. 그리곤 피식 웃곤 작업을 이어갔다.
스테인 칠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마르면 그 위에 여러 번 덧발라야 했다. 보통 5번 정도.
“드라이(Dry).”
엘린의 마법으로 마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김서준도 김서준이지만, 엘린도 체력이 좋아서 쉽게 지치지도 않았다.
덕분에 둘은 순식간에 목제에 스테인 바르기를 마칠 수 있었다.
“고생했어요. 엘린.”
“서준 씨도요.”
시원한 냉수로 일을 마무리한 둘은 대충 손을 씻었다. 스테인 냄새에 찌든 옷까지 갈아입은 둘은 옷도 갈아입었다.
“잘 골랐으려나.”
“잘 하셨을 거예요. 아까 보니까 완전 의욕이 넘치시던걸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너무 의욕이 넘치면 사고가 나던데···.”
“나무 고르는 게 다인데요. 뭐.”
이제 리노와 노움이 고른 나무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
-샥샥.
낙엽이 스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얼핏 바람에 낙엽이 흔들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멍멍(움들이 움직이는 소리다.).’
리노는 그 소리의 중심에서 고민에 빠졌다. 리노는 혼자인데 노움과 움은 너무 많다. 이대로는 숫자에서 지고 들어가는 싸움.
‘멍멍멍!(내가 아무리 빠르고 날쌔지만 모두를 이길 수는 없어!)’
그때였다.
“리노공! 승부를 포기한 거냐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는 리노를 보고 걱정된 노움이 다가왔다.
“멍멍!”
“좋다움! 역시 리노공이다움! 기대하겠다움. 나도 봐주지 않겠다움!”
노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나무를 찾아 날아갔다.
“멍!”
기합을 넣은 리노도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생각은 나무를 찾으면서 하기로 했다.
-촥촥!
발이 땅을 스치듯 움직이며 리노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인간의 범위를 가볍게 초월한 시야는 나무 하나하나를 빠르고 면밀하게 살폈다.
‘멍!’
‘멍!’
한참을 달렸지만, 도무지 맘에 드는 나무가 없었다. 방향이라도 바꿔서 반대쪽으로 가볼까. 그런 고민을 할 때였다.
“멍!!!”
굵고 높게 뻗은 나무하나가 보였다. 곧게 뻗고 굴곡도 많지 않은 게, 주인님이 말한 조건에 딱 부합하는 나무였다.
“멍!!”
리노는 반가운 마음으로 나무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맘에 들었다. 썩은 부분도 없고 단단했다.
-툭.
앞발로 가볍게 건드려 보니 속도 꽉 차 있었다.
표식을 남기기 위해 리노는 발톱을 세웠다. 그러다 이내 내려놓았다.
‘멍멍(손상되면 주인님이 싫어하실 수도 있어).’
어쩔 수 없지. 리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게 확실했다. 몸을 돌린 후, 살짝 뒷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개과 동물 특유의 마킹 방법으로 나무에 표식을 남겼다. 냄새가 진했다. 마킹으로는 딱 적당했다.
‘멍!’
다행이었다. 움들이 이렇게 많은 데 자신이 이런 좋은 나무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멍멍!!!”
리노가 기분 좋게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리노가 털을 바짝 세웠다.
소리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리노는 꼬리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착. 착. 착.
하나둘씩 소리를 낸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털을 가진 들개무리가 나타났다.
“그르르...”
리노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 살기의 주인공은 들개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떨고 있었다.
‘!!!’
리노는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들개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고.
-어슬렁어슬렁.
그 사이로 온몸이 검은색 털로 뒤덮인 짐승이 네 발로 걸어 나왔다. 짐승이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섰다.
“구어어!!!”
거칠게 포효한 곰은 리노를 내려다보았다. 덩치가 정말 큰 곰이었다.
‘멍(멋있네)!’
리노는 그 곰의 가슴 한가운데 그려진 반달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반면 곰은 솜뭉치처럼 보이는 리노를 깔보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여기서 물러나라는 듯 턱짓했다.
“멍?”
“구오.”
자신의 나무라고 주장하는 곰. 미안하지만 그걸 용납할 수는 없었다. 이건 주인님에게 받쳐야 할 나무였다.
“멍!!!”
리노가 피어(fear)를 내 뿜었다.
****
“음?”
세계수의 언덕으로 가는 길, 엘린이 움찔했다.
“왜 그래요?”
“방금 리노 님의 피어가 느껴졌어요.”
김서준은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따로 뜬 알람은 없었다. 마력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착각인가?”
그때였다.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리노의 기운. 동시에,
-푸드드득!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김서준과 엘린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누가 먼저 할 것도 없이 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