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37화 (37/139)

37. 힐링푸드

“한식은 정말 좋습니다.”

아랍에미리트의 셰이크 무함마드 알 왕자가 감탄과 함께 말했다.

“이렇게 한 상 가득 한국의 숲과 산, 들판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정 회장이 젊은 사업가이자 왕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랍에미리트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저희 IW가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십니다.”

IW 그룹은 아랍의 사막 벼 재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게 벌써 3년 전. 이제 서서히 성과가 나서 사막을 야금야금 논으로 메우고 있었다.

“아닙니다. 갈 길이 멀죠. 논부터 밭, 나아가서 숲도 만드셔야죠.”

“그렇게만 되면 정말 더는 여한이 없을 겁니다. 말만 들어도 행복하네요.”

“왕자님답지 않으시네요. 생각한 건 다 이루시는 분이···.”

“하하하.”

정 회장의 말에 호탕하게 웃은 셰이크 왕자는 젓가락을 들었다. 소문난 한식 마니아답게 그는 능숙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잡채 좋아하는 건 여전하시군.’

감칠맛과 짠맛이 적당히 밴 당면과 여러 가지 나물이 들어간 잡채로 가장 먼저 젓가락이 향했다.

-후루룩.

면을 씹은 셰이크 왕자는 연신 어메이징을 외쳤다.

“오늘따라 더 맛있는 거 같군요.”

“소중한 친구와 오랜만의 식사라고 했더니 셰프가 신경 좀 썼나 봅니다.”

빈말이라 한들 저런 반응이라면, 만족한다는 이야기. 정 회장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아랍의 새로운 별. 패기 넘치는 사업가. 여러 가지 별명과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셰이크 왕자는 은근히 기분파였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음식부터 분위기 등만 잘 맞춰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멍청한 놈. 이 쉬운 걸 못해서···.’

옛말에 틀린 말 없다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농사는 역시 자식 농사였다.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은 셰이크 왕자와 척을 지고 프로젝트를 엎을 뻔했다.

결국, 은퇴를 앞둔 정 회장이 다시 이 프로젝트만 직접 나서서 관리하고 있었다.

‘언제 철이 들는지···.’

정 회장은 답답한 속을 냉수 한잔에 흘려 넘겼다.

‘그나저나 엄청나게 맛있나 보군.’

한식을 누구보다 맛있게 먹는 아랍인, 그것도 아랍 왕자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괜히 뿌듯하다.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맛있는 건가.’

정 회장은 기분 좋게 파김치 하나를 들어 입 안에 넣었다.

“으흠···.”

아삭한 식감과 함께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한 파 향이 매콤한 양념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와 입안을 가득 채우는 충만한 맛이었다.

‘양념도 잘했지만, 파를 좋은 거 썼나 보군. 싱싱하고 숨도 많이 안 죽었어.’

하나 파김치의 맛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계속 씹고 있으니 매콤한 양념과 양파를 떠올리는 단맛이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자극했다.

한 음식에 마치 두 가지 맛의 단계가 존재하는 느낌.

‘이렇게 맛있는 파김치가···. 음?’

그러고 보니 파김치의 생김새가 조금 이상했다. 일반적인 파김치는 쪽파로 담근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파김치는 쪽파가 아니었다.

파의 생김새가 쪽파보다 짧은 데다 대가 굵고 휘어져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모르는 쪽파의 한 종류인가?’

정 회장은 궁금증과 함께 파김치를 하나 더 입에 집어넣었다. 절로 재료가 궁금해지는 맛이 다시 한번 입안에서 춤을 췄다.

‘정말 맛있군.’

그러다 문득.

‘설마?’

정 회장은 다른 나물들도 하나씩 입에 집어넣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나물이 다른 나물과는 다른 좀 더 특별한 맛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맛은 설마 임종철 명인, 아니 김서준의 작물인가?’

감자조림을 먹는 순간 확신이 섰다. 조리방법 차 탓에 맛은 좀 다르지만, 엄민호의 가게에서 먹었던 그 감자의 진한 향이 느껴졌다.

“감자는 튀겨야 제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맛있군요.”

온갖 감자 요리를 먹었던 셰이크마저 감탄하지 않는가.

‘그 감자야. 확실해. 근데 이게 어떻게 여기에?’

여기는 서울의 아르카디안 호텔. 당분간 더는 거래처를 두지 않겠다며 자신의 제안을 무시한 김서준이 아르카디안 호텔에는 납품하기로 했다는 건가? 왜?

정 회장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고풍스러운 문양이 그려진 미닫이문이 열렸다. 하얀 조리복을 입은 셰프가 들어와 영어로 물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환상적입니다. 아주 맛있군요.”

“최고입니다.”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서비스라는 음식은 은색 돔 형태에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특이하군요. 한식이 이런 곳에 나오는 건 흔한 건 아닌데···.”

셰이크의 말에 셰프가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향을 지키기 위해서요.”

말과 동시에 뚜껑이 열렸다. 이름 모를 허브 위 기름으로 가니쉬를 한 평범한 구운 버섯 요리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와···.””

그런데 두 사람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특히 셰이크 왕자는 전율이 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진한 소나무 향이라니. 소나무 숲 한복판에 들어온 거 같군요. 단순한 버섯구이가 아닌 겁니까?”

“버섯구이 맞습니다. 이 버섯은 한국에서 가장 귀한 버섯 중 하나인 송이버섯입니다. 재배할 수 없어서 소나무 숲에서 직접 채취해야 하죠.”

“그냥 버섯을 구웠는데, 이런 향이 난다는 겁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드셔 보시면 더 풍부한 소나무 향과 맛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기대와 함께 송이버섯을 입에 집어넣었다.

“이거 당장 본국으로 수입해야겠군요. 전 국민에게 하나씩 나눠주면 아랍에미리트에 더 숲을 조성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 작은 버섯에 소나무 숲이 통째로 담겨있으니까요.”

셰이드 왕자는 연신 감탄 어린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송이버섯을 음미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힐링 푸드가 따로 없군요. 이렇게 대단한 음식을 준비해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셰프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특별한 손님들인 만큼, 평소 호텔에 납품받는 것이 아닌 아버지가 보내준 고향의 작물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리고 셰이드 왕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흠···.”

“회장님. 무슨 문제라도···.”

“아니, 이거 너무 맛있군. 너무 맛있어.”

정 회장이 셰프를 쳐다봤다. 비교적 젊어 보이는 셰프의 가슴팍에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임명신···?’

“혹시 자네 아버지가 임종철 명인이신가?”

“아···. 네. 맞습니다.”

“혹시 그럼 오늘 쓴 식재료도 명인님의 것을 쓴 건가?”

“직접 농사를 지으신 건 아닙니다. 아버지가 최근 눈여겨보는 고향 농부가 지은 작물이죠.”

순간 정 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었구먼.”

****

소나무 아래서 무럭무럭 자라는 축복받은 송이버섯. 김서준은 그 버섯 하나하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진짜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더니, 이제는 이런 행운까지. 복덩이들이라니까.”

김서준은 싱글벙글 웃었다. 이유는 어제 정 회장과의 통화 내용 때문이었다.

‘내 작물을 드셨다고 하셨지?’

어찌 된 일인지 김서준의 작물이 아르카디아 호텔의 메뉴에 올라갔단다. 그것도 무려 정 회장의 테이블 위로.

[아주 맛있어서 자네 작물인 걸 바로 알겠더군. 당연하지만 지난번에 이야기한 거처럼 모두 계약하고 싶네.]

수화기 너머 정 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감탄을 뱉었다. 하지만 그게 굳이 정 회장이 직접 전화한 이유는 아니었다.

‘비서가 아닌 직접 전화를 건 본론은 바로 이 복덩이들 때문이었지.’

김서준은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셰이크 무함마드 알 왕자를 아나?]

“뉴스에서 아랍에미리트 왕자라는 걸 봤습니다. 이번에 내한했다고···.”

[맞네. 그 왕자가 자네의 축복받은 송이버섯을 사겠다는군. 돈은 얼마든지 들여서라도 말일세.]

사유는 더 대단했다. 평소 사막에 살다 보니 산과 나무, 숲을 좋아했던 왕자가 송이버섯의 향과 맛에 한 번에 반해버렸다고 했다.

[내게는 중요한 고객이기도 하고. 자네 역시 전례 없는 가격으로 거래할 수 있을 걸세. 그뿐일까. 이걸 인연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정 회장은 엄청난 기회라는 걸 강조하며 서둘러 거래를 하길 원했다.

[송이버섯을 팔아준다면, 다른 작물에서도 모두 거래 조건을 최대한 편의에 맞춰주겠네.]

“감사합니다. 고민해보고 내일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한 김서준은 쾌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렸어.’

김서준의 계획대로 토종 작물이 마을에 자리를 잡은 다음 계획은 당연히 판매 유통이었다. 유통 채널을 최대한 확장해야 했다.

‘채널이 많을수록 토종 작물은 더 깊게 마을에 자리를 잡을 테니까. 금산마을에서 나아가 금천면까지.’

그리고 그 채널 중 하나로 'IW 그룹의 ‘하늘 농원’이면 감지덕지. 아니, 애당초 김서준이 직접 나서 영업을 하려 했던 곳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제안을 정 회장 측에서 먼저 제안한 셈이었다. 영업 하나 없이 말이다.

‘물론 마을 전체를 거래 대상에 넣어달라고 하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뒤집으면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지금뿐이었다. 아랍의 왕자가 송이버섯에 반한 지금 말이다.

‘아랍 진출은 IW 그룹이 사활을 건 사업 중 하나고. 왕자의 호감을 사는 건 그런 IW그룹에게 매우 중요할 테니까.’

이제 남은 과제는 하나. 엘린이 실험을 서둘러 성공시키는 일뿐이었다. 이제 이 조각만 맞추면 모든 퍼즐의 완성이었다.

‘오늘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가 그 답이 되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한 김서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소나무 향과 함께 가을의 냄새가 김서준의 코로 들어왔다.

“좋다...”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거에 반한 거겠지? 왕자도?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김서준은 웃으며 축복받은 송이버섯에게 인사했다. 송이버섯도 인사에 대답하듯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

엘린의 연구소 옆 작은 텃밭. 엘린은 밭 안을 거닐며 미트루트와 토종 종자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 옆에서는 노움과 리노가 방금 엘린이 따준 미트루트를 먹고 있었다.

“역시 방금 딴 게 제일 맛있다움!”

“멍!”

‘먹성은 참 좋다니까.’

김서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엘린에게 다가갔다. 엘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작물을 살피고 있었다.

“오셨어요?”

기척을 알아챈 엘린이 물었다.

“고생이 많네요.”

“고생이라니요. 이렇게 마음껏 다양한 작물을 연구하는 게 제 꿈이었는데요. 덕분에 꿈을 이룬 거죠. 그래서 보답을 해야 하는 데···. 흠···.”

엘린의 표정에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김서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도 잘 안 됐어요?”

“네···. 마법이 아예 다음 종자로 움켜쥐지 않거나 효과가 확연하게 약해졌어요. 다른 마법 식을 세워봐야 할까 봐요.”

마법 연구는 과학과 유사했다. 이론에 기반을 둔 마법 식을 세우고, 그 결과를 하나의 마법으로 다듬은 뒤 사용해보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마법식은 물론, 마력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김서준이 연구를 돕기란 어려웠다.

“괜찮아요. 엘린. 천천히 다시 해보죠.”

할 수 있는 건 격려와 위로였다.

“이번에는 좀 자신 있었는데. 이것도 안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잠깐 실망한 건데, 다시 힘내 볼게요.”

엘린이 애써 웃었다. 그러나 평소만큼 환한 웃음은 아니었다.

“흠···.”

문제를 풀 때 문외한은 문제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생각을 하곤 한다.

아니, 그 허무맹랑함이 영감을 주지 못하더라도 잠깐은 갇힌 생각의 틀에서 한 발짝 나오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김서준은 그러길 바라며 밤새 생각해봤던 이론을 가볍게 입 위에 올렸다.

“엘린, 혹시 저주도 걸 줄 알아요?”

“저주요...? 몇 개 정도는 가능한 데, 선호하지는 않아요. 근데 왜요?”

“혹시 이렇게...”

김서준의 이야기를 들은 엘린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신농님. 신농님은 진짜 천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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