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36화 (36/139)

36. 첫만남

네크로멘서.

죽은 자의 사체를 일으킨다는 엄청난 그 직업은 얼핏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상은 처참했지.’

그들의 주요 스킬인 스켈레톤 소환 때문이었다. 몬스터나 죽인 인간의 사체를 대충 엮어 만든 스켈레톤은 내구성이 너무 떨어졌다.

물론 네크로멘서 중에도 A급, S급의 상위 헌터는 존재했다. 하지만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들은 그냥 네크로멘서가 아니었으니까.’

몸이 쇠로 되어 있거나 마법을 쓰는 해골이라던가, 약한 내구성을 상쇄할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런 대단한 네크로멘서가 시골구석에서 사기나 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이건 정도가 심하네. D급인가?’

김서준에 발에 차인 스켈레톤 하나가 완전히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허우대만 그럴듯하지, 속은 형편 없었다.

“이거 진짜 약하네요?”

“그렇다움.”

“멍멍!”

김서준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실제는 엄청난 완력을 가진 리노는 그렇다 치더라도.

엘린의 지팡이나 노움의 가벼운 마법에도 스켈레톤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쓰러졌다.

“저게 뭐여?”

“엄청 약하네?”

여기저기서 와르르 무너지는 스켈레톤을 보며 주민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별거 없구먼.”

“이런 허접한 거에 우리가 속은 거여?”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저 험악하고 괴기스러운 생김새를 보고 지레 겁을 먹었던 듯했다.

겁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이제껏 쌓아온 분노를 터뜨리듯, 와르르 달려들어 스켈레톤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여태 그걸 다 참은 겨!”

“어이가 없구만! 어이가!”

“쳐 죽일 놈들!!!”

그 기세가 엄청나서 뒤늦게 도착한 헌터 관리국의 요원들이 말려야 할 정도였다.

‘시원하게 패시네. 다들 쌓인 게 많긴 했구나.’

20마리의 스켈레톤은 화풀이 방의 소품처럼 주민들의 발길질 아래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들 속이 시원한 표정. 그걸 보고 있자니 김서준의 속도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움직이면 다쳐요. 얌전히 있으세요.”

김서준이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관리국 헌터들이 제압당한 녀석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겁니다!”

하물며 파출소장이 처절하게 소리쳤지만.

“그건, 가서 이야기하시고. 전부 데려가세요.”

자비는 없었다. 이미 김서준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기도 했고. 헌터관리국 사칭이라는 체포 사유도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진짜 대단하다.’

김서준은 좀 전의 노을이 보여준 장면을 떠올렸다.

경찰차를 짓밟은 채 노을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순간 검풍(劍風)이 일더니 땅에 얇고 깊은 선이 그려졌다.

‘그걸로 끝이었지.’

오금이 저린 사기꾼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감사합니다. 노을 씨.”

김서준이 노을에게 인사했다. 노을은 평소 바지로 된 정장을 입은 것과 달리 스커트 형태의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도 덕분에 실적 하나 쌓는 건데요. 경찰까지 엮여있으니 좀 큰 실적으로 쌓이겠네요.”

씽긋 웃은 노을은 김서준 옆을 바라봤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얼굴에 확연히 드러나는 굴곡진 몸매. 거기에 묘하게 부드러운 분위기를 지닌 금발의 여자가 보였다.

‘하···. 상대가 너무 예뻐서 흥분해버렸어.’

노을은 좀 전의 자신의 행동을 떠올렸다. 자다가 이불을 수천 번 차도 모자랄 찌질한 행동이었다.

‘그날 하루 같이 보낸 게 무슨 대수라고.’

맛있는 토마토 카프레제와 와인. 꽤 분위기 좋은 재밌는 밤을 보냈다만 거기까지였다.

피차 그 뒤로 연락도 안 했지 않았던가.

‘물론 기다렸는데 안 온 거긴 했지만···.’

그래서였을까.

오랜만에 온 연락 한 통에 너무 들떠 버렸다.

‘긴급 출동을 명령해 놓고 치마를 챙길 때부터 조심했어야 했는데···.’

김서준 옆에 있는 미녀를 보는 순간 머리끝까지 무언가 확 올라오며 다급해졌다. 쿨한척 했던 얼굴 아래 숨겨둔 본심이 무심코 ‘툭’ 튀어나와 버렸다.

‘후, 멍청했어. 나답게 하자. 나답게.’

스스로를 다잡은 노을이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었네요.”

“네?”

엘린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서준이 사이에 끼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게 괜히 더 부끄럽다. 노을은 볼이 살짝 화끈거리는 걸 숨기려는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근데 진짜 누구예요? 엄청 예쁘신데. 혹시 여자친구?”

“아, 아닙니다. 한창 헌터로 일할 때 같이 다녔던 동료예요.”

김서준은 거짓말을 술술 뱉었다.

‘자주 하다 보니 거짓말도 느는 건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스스로도 속을 정도였다.

“엘린이라고 해요. 엘린, 여기는 헌터관리국 충남지부 총괄팀장 노을 님이세요.”

엘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엘린이에요.”

“한국말이 능숙하시네요. 교포신가? 아니면 혼혈?”

“아니요. 우크라이나에서 왔어요. 서준씨랑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늘더라고요.”

“아, 그러셨구나.”

김서준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거짓말이 늘어도 엘린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근데 한국은 무슨 일로···?”

“작물 연구를 하러 왔어요. 서준 씨가 농사를 짓는 토종작물이요.”

마지막 말과 함께 자연스러운 웃음까지. 저걸 보고 어떻게 의심할까. 이제 엘린 혼자 둬도 걱정할 게 없어 보였다.

‘뭐지?’

그런데 이상했다. 미묘하게 노을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럼 그 옆 마을에 같이 사시는 거세요?”

“아니요. 같이 살아요.”

“...”

확실하게 노을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건···.’

노을은 순간 엘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김서준과 자신은 그날 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김서준은 당장 누군가를 옆에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저 속뜻이 연인이 아니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도 아주 확실하게 같이 산다고 말했다.

‘접근하지 마. 이 여우야. 이거 내꺼야.’

그 의미를 담은 선전포고가 확실했다. 노을은 곧장 그 전쟁에 응하기로 했다.

“아, 그러셨구나. 하긴 서준이네 손님방이 좋죠.”

“맞아요. 침대도 푹신하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노을 씨도 와보셨나 봐요.”

엘린은 평소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답했다. 반면 함께 웃는 노을의 모습은 묘하게 과장되어 보였다.

“그럼요. 그때 토마토 카프레제가 참 맛있었는데···.”

노을이 황홀한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엘린이 말했다.

“토마토 카프레제요? 와, 진짜 맛있겠네요. 서준 씨 저도 해주실래요?”

동시에 엘린의 고개가 김서준의 얼굴 쪽으로 휙 돌아갔다. 꽤 성숙한 외모와는 달리 순수하고도 순진한 눈이 김서준을 향해 반짝거렸다.

김서준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 이런···.’

노을은 잇몸을 씹었다. 외모와 이미지에 속았다.

‘오히려 빌미 삼아서 더 어필하다니.’

상대는 강적이었다. 이런 어설픈 도발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초조해진 노을은 더 과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마침 좋은 와인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우리 집에서 한번 어때요?”

“어···.”

“와! 저희를 초대해주시는 거예요? 진짜 감사해요! 저 와인 좋아하는 데!”

김서준이 무어라 하기 전에 엘린이 대답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특유의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대박···.’

노을은 속으로 혀를 내 눌렀다.

저 얼굴. 저 미소. 보조개. 눈썹. 눈. 즐거워하는 웃음과 미소를 만든 입까지.

모든 게 너무나도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저걸 보고 가식이라는 걸 눈치챌 남자는 없다.

‘내 눈에도 정말 초대를 받고 좋아하는 모습인데···.’

강적도 이런 강적일 줄이야. 이 전쟁은 패배였다. 지금은 이대로 후퇴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어, 리노도 왔구나!”

노을은 후퇴의 수단으로 리노를 선택했다.

“멍!”

노을을 알아본 리노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오늘도 귀엽네. 보고 싶었다고? 나도 보고 싶었어.”

노을이 리노를 쓰다듬자, 노움이 다가왔다. 둥실둥실 날아온 노움을 본 노을이 물었다.

“이건···. 설마 정령?”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소환한 정령이에요.”

“내 이름은 노움이다움!”

“노움? 와, 이거 진짜 귀여워요! 농부의 정령이면 땅의 정령인가요?”

“땅의 정령이자 농사의 정령이다움!”

노움이 그렇게 말하자 노을은 귀엽다며 와락 껴안았다.

사태는 금세 수습됐다. 관리국 직원들은 능숙하게 망가진 스켈레톤이 남긴 뼈를 수거했다. 사기꾼들의 스타렉스도 견인되어 갔다.

“썩을 놈들!”

“망할 사기꾼 놈들! 감방에서 평생 썩어라!”

“꼭 똑같이 사기당해라!”

온갖 저주를 받으며 범인들은 헌터관리국이 준비한 검정색 승합차에 올라탔다.

“다음에 또 봐요. 서준 씨.”

“오늘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밥 한번 사요. 맛있는 거로. 술이면 더 좋고요.”

노을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봐도 믿기 어려운 외모를 자랑하는 강적을 바라봤다.

“엘린 씨도 다음에 또 봐요.”

“네. 조심히 가세요.”

“잘 가라움!”

“멍!”

노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노움이랑 리노도 또 보자. 그럼 저 갈게요. 연락해요.”

“네. 꼭 할게요.”

“꼭이요.”

노을이 추파를 보내며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고맙구먼.”

관리국이 떠나자 좀 전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덕분에 큰 우환이 사라졌슈.”

“아닙니다. 동네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한 거죠.”

“아녀.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의인이 흔하지가 않쥬. 특히나 요즘 젊은이들은 더더욱 이기적인디.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슈? 내가 요 앞에 철물점하는 디, 필요한 거 있으면 좀 가져가슈.”

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나서며 말했다.

“그려. 그 짝 아니었으면 평생 시달렸을 텐데. 너무 고마워. 내가 줄건 없고, 우리 집 떡이라도 가져가.”

“우리 집에서 밥이라도 먹고 가. 이 시장에서 우리 집 국밥이 제일 맛있어.”

“아까 보니까 저 꼬마가 전 잘 먹던데. 전 좀 싸줄까?”

“붕어빵하고 호떡은 어뗘? 아니면 떡볶이 좀 싸줄까?”

모두가 나서며 김서준에게 뭐라도 챙겨주려 했다.

‘이거 참···.’

갑작스러운 호의는 의외로 난처했다. 받아야 할지, 받아도 될지 그런 감정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역시 시골 인심은 다르구나.’

서울이었다면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자기 할 일 하러 간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사태는 해결됐고, 이제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당연하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그렇다고 굳이 뭘 더 해줄 필요는 없는 거니까.’

김서준 역시 그걸 대단히 문제 삼지 않을 터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런 삶 안에서 ‘선심’을 베풀거나 그 선심에 ‘보답’하는 일은 안 하는 게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긴 그 마음을 쓰는 게 기본이야.’

그 기분 좋은 현상만으로도 김서준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 무심함으로 언제 받았는지도 모를 마음의 상처가 조금은 아무는 거 같았다.

역시 그냥···.

“정말요? 그럼 전 닭강정을 조금···.”

“난 붕어빵이 좋다움!”

“멍멍!”

가기에는 다들 너무 기대에 가득 차 있구나.

김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조금만 받아가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으으음...”

웅얼거리는 소리에 김서준이 백미러를 바라봤다.

“그렇게 맛있나.”

노움은 머리를 뜯긴 붕어빵을 손에 든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질세라, 리노는 닭강정 봉투를 안고 잠들었다.

“정말 볼수록 귀여운 거 같아요.”

“그러니까요.”

“근데요. 서준 씨. 아까 노을이라는 분 있잖아요.”

엘린이 웃으며 말했다.

“집에도 초대하고. 리노랑 노움 님에게도 잘해 주시고. 오늘 일도 잘 처리해주신 게 참 좋은 분 같아요.”

“흠, 그렇죠?”

지난번에도 그렇고 노을은 일 처리가 빠르고 확실했다.

‘엘린 말대로 뭔가 한번 대접을 하긴 해야겠네.’

초대가 아니더라도 선물이라도 보내볼까. 김서준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음···. 노을 님은 저를 싫어하시는 거 같아요.”

“그래요? 왜요?”

엘린이 위를 올려다보며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아까 그 대화에 노을 씨 태도가 드라마에서 악역이 여자주인공한테 하는 그런 거랑 좀 비슷했거든요.”

“그래요?”

김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드라마를 도통 보지 않는 김서준으로써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닐 수도 있는데. 흠···. 하긴 서준 씨가 매력이 있긴 하죠.”

“네?”

“아니에요. 하여튼 다음에는 좀 더 친해질 수 있게 노력해볼 테니까, 꼭 한 번 불러주세요.”

그렇게 말한 엘린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저도 토마토 카프레제였나? 그거 해주세요. 궁금해요. 엄청 맛있으니까 또 먹고 싶다고 한 거겠죠?”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닌 거 같지만···.’

김서준이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아, 네 뭐···.”

그런 후, 네비게이션에 나타난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이제와서 부동산으로 가는 건 무리였다.

‘그냥 돌아가야겠지?’

그때였다. 차 안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차량 내 모니터에 발신자의 이름이 나타났다. 김서준이 멈칫했다.

회장님...?

‘이 분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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