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33화 (33/139)

33. 준비

가을이 되면서 세계수가 있는 언덕의 풍경은 점점 더 신비로움을 뽐냈다. 비단 세계수의 힘이 닿는 곳이 점점 넓어져서만은 아니었다.

“주변과 대비가 진짜 신비하고 아름답지 않나요?”

이제는 갈색으로 점철된 풍경 사이 여기만 녹림이 우거진 이 색의 대비가 참 묘하게 느껴졌다.

“맞아요.”

옆에서 우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서준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콧대와 뾰족한 귀까지. 볼 때마다 비현실적인 얼굴의 요정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풍경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이런 풍경은 여기서 밖에 못 볼 거에요. 세계수 님과 서준 씨에게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엘린이 방긋 웃었다.

‘이렇게 얼굴만 보면 내가 아는 엘프가 맞는데, 참...’

엘린은 요 며칠 사이 완전히 이 세상에 적응을 마쳤다.

짧은 트레이닝복에 부스스한 머리로 소파에 늘어져 드라마를 보기도 했고.

음료와 과자를 챙겨 컴퓨터 앞에서 종일 붙어있는 등.

영락없는 현대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저 엄청난 적응력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에서 보고 영감을 받은 건지 세미 정장 스타일 옷 위에 하얀색 실험실 가운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시력도 좋으면서 안경은 왜 낀 건지...’

덕분에 김서준의 머릿속에 엘프는 다시 정의되고 있었다.

“음, 왜 그러세요?”

엘린이 안경 대를 들썩이며 물었다. 엘린이 최근 보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아닙니다. 이제 1시간 된 거 같은데 다시 체크 해보죠.”

“그래요.”

자리를 털고 일어난 두 사람은 곧장 세계수의 언덕 끝에 만든 작은 텃밭으로 향했다. 엘린의 연구를 위해 조성한 작은 텃밭에는 미트루트가 줄기를 위로 쭉쭉 뻗고 있었다.

“흠. 역시 그러네요. 느껴지는 생명력이 확실히 줄었어요.”

눈을 감고 밭에서 마력을 느끼던 엘린이 말했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확실해졌군요. 아무리 넓어도 3500평. 아마 그 이상은 신농의 땅으로 만드는 건 어렵겠군요.”

두더지의 출현 전후, 김서준이 했던 차이는 하나뿐이었다.

‘엘린을 위한 연구용 텃밭을 만든 거지.’

규모는 물론 30평 규모에 불과했지만, 그 외에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혹시 신농의 땅이 너무 넓어지면, 신농의 힘이 약해지는 건가?’

그리고 김서준의 예측이 맞았다. 집주변 일대를 신농의 땅으로 만들자, 기존의 텃밭이나 엘린의 텃밭이 가지고 있던 생명력이 떨어졌다.

“아쉽지만 맞는 거 같아요. 서준 씨의 가설대로 일정한 생명력을 신농의 땅들이 나눠 가지는 형식이 맞나 봐요. 100을 2로 나누면 50이지만 4로 나누면 25가 되는 것처럼요.”

“네. 거의 확실하네요.”

“아쉽네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런 힘이 없었어도 했을 농사였으니까요.”

자신의 귀농 생활을 너무나도 행복하고 순조롭게 만들어준 힘이 아니던가. 그 힘의 한계를 느꼈다고 좌절한 건 전혀 없었다.

여전히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힘이었다.

“제가 종자 연구 얼른 끝내서 자격시험 통과시켜 드릴게요. 그럼 힘도 커져서 더 넓은 땅을 신농의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엘린은 김서준이 실망했다고 생각했는지 격려의 말을 던졌다. 김서준은 괜찮다고 대답하며 말했다.

“근데 진짜 연구는 어때요? 좀 진전이 있어요?”

그 날 이후 3주의 시간이 지났다. 엘린은 연구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고 종종 이야기했지만, 긴가민가했다.

‘엘프의 시간 개념이라는 게 참 느긋했으니까.’

물론 드라마 덕분에 시간 개념이 많이 바뀌고 있긴 했다. 드라마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일주일이 너무 길다나.

K-콘텐츠의 힘이 대단하다지만 설마 엘프의 시간관념을 바꾸게 될 줄은 아마 만든 사람도 몰랐을 것이다.

“진전이요?”

엘린이 되물으며 안경을 추켜 올렸다. 동시에 눈빛에서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진전 정도가 아니라 진짜 엄청난 발견을 했죠. 거의 다 된 거 같아요.”

“정말이요? 거의 다 됐다고 하고 10년 기다리는 건 아니죠?”

“무슨 소리에요? 저 이제 적응 다 했다니까요. 한 3년 정도면...”

순간 김서준의 표정이 굳자 엘린이 혀를 내밀었다.

“농담이에요. 진짜 거의 다 됐어요. 근데 시간 장담을 못 하겠는 게 마지막에 너무 큰 벽에 부딪혔어요.”

“큰 벽이요?”

“자손까지 유지가 안 돼요. 현재 있는 씨앗에서 효과가 그쳐 버려요.”

김서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린의 말대로였다.

‘큰 벽 맞네. 저게 안 되면 다 말짱 꽝이지.’

엘린이 아무리 오래 사는 엘프라지만, 평생 종자 만드는 기계 역할을 할 순 없었다.

‘애초에 연구가 끝나면 라이너스 대륙으로 돌아가기도 해야겠지.’

그렇다고 엘린이 만든 마법을 가르칠 수도 없다. 김서준이 몇 번 간단한 마법을 시도했지만 실패. 현대인, 그러니까 헌터는 역시 스킬로 얻은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다.

‘세계수도 이걸 알 거고.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정착을 이루려면 세대 넘어서 계속 능력이 이어져야 해.’

엘린이 심각한 김서준을 보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마세요. 아까 그랬잖아요. 제가 금방 자격시험 통과하게 해드린다고. 아무리 오래 걸려도 5년이면 될 거에요. 이 정도면 금방 맞죠?”

해맑은 웃음을 보아하니 이건 진심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김서준이 말했다.

“아니요. 제가 그랬죠. 짧은지 긴지 기준을 잡을 때는 드라마로 하라고. 5년에 한편씩 드라마 내면 금방인가요?”

“아, 맞다. 그러면 안 되죠! 흠, 근데 진짜 딱 떠오르는 게 없어서 그렇게 빨리 될지...”

엘린의 얼굴에 급격히 근심이 드리웠다. 문득 리노가 우울해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미안하네.'

김서준은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급할 필요는 없지만요. 우리 같이 방법을 찾아봐요."

엘린도 김서준을 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김서준이 그런 엘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트루트 쪽은 어때요?”

그리곤 곧장 화제를 전환했다. 엘린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미트루트는 진짜 순조롭죠! 제가 아는 미트루트가 맞더라고요! 물론 상태는 아무래도 신농님의 것이 훨씬 좋지만요. 어쨌든 이걸로 이제 하나씩 새로운 걸 만들어 보려고요. 처음으로 만들건 완전 회복 포션이요!”

“완전 회복 포션이요?”

“네. 미트루트 즙은 원래 체력 포션 대용으로 쓰기도 하잖아요?”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트루트의 효과에 체력 회복 효과가 있다는 건 김서준도 알고 있었다.

“근데 체력 회복만 되고 상처는 치료가 안 되지 않나요?”

“맞아요. 그걸 연구로 해결해보려고 연구 중이었거든요. 근데 아시다시피 양이 적어서 연구가 더뎠었죠.”

엘린이 온 세계에 모크 족이나 아랑족은 없었다. 미트루트를 작물용으로 재배하지도 않았다.

‘리노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게 맞았던 거지.’

라이너스 대륙에서는 미트루트를 자양강장 용으로 먹는 귀한 작물로 여겼다.

“이제는 신농님 덕에 너무 많아서 이렇게 먹으면서 연구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요.”

“그걸 먹어요? 맛없지 않아요?”

“네. 맛은 없는 데 먹으면 힘이 나서 연구가 잘되거든요.”

일할 때 커피를 마시는 거랑 비슷한 건가.

그나저나 포션이라. 지금의 포션은 연금술사들이 각자의 배합으로 가공한 트롤의 피를 포션으로 파는 형태였다.

‘상처 회복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트롤은 A급 몬스터에 꽤 희귀했다. 그만큼 포션도 희소성도 크고 비쌌다.

‘그에 반해 효과는 좀 아쉬웠지.’

가벼운 상처는 잘 치료했다. 문제는 심한 상처. 상처가 심할수록 필요한 포션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마시는 게 아니라 붓는 형태라서 낭비되는 액도 많았지. 체력 회복 효과도 없었고.’

만약 엘린의 의도대로 마시는 포션에 체력과 상처가 다 회복되는 방식이라면, 분명 세상이 놀랄만한 포션이 만들어질 터였다.

‘돈도 돈이지만, 헌터들의 생존율이 엄청 높아지겠지.’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는 일은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였다. 그 참사를 막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건 연구할 가치가 충분했다.

“좋은 연구네요. 꼭 좋은 성과를 만들어주세요.”

“물론이죠. 진짜 서준 씨와 세계수님게 너무 감사해요. 새로운 식물을 보는 것도 너무 행복한데···. 이런 환경이면 생각해본 연구는 정말 다 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엘린에게 도움받잖아요.”

“그거랑 그거는 정말 다르죠. 제가 도와드리는 건 저도 즐거운 일이니까요. 제 연구 성과로 꼭 다 보상해 드릴게요.”

“저야 그럼 감사하죠.”

“기대하세요. 특히 미트루트는 이제 곧 입니다!”

기분 좋게 대답한 엘린을 보며 김서준이 물었다.

“그런데 미트루트 연구는 얼마나 한 거예요? 저번에 보니까 연구 일지가 꽤 많던데.”

“제가 좀 자세하게 적어서 그래요. 미트루트 찾는 과정도 다 적었거든요.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31년 정도 됐나?”

“아, 31년...”

“네. 31년. 짧죠?”

‘31년이면 제가 태어났을 때 시작한 연구네요.’

라는 말을 삼킨 김서준은 짧게 대답했다.

“...드라마...”

“아, 네. 저도 자꾸 오락가락하네요. 헤헤.”

엘린은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서준은 생각했다.

‘넷플렉스는 절대 안 되겠다. 무조건 TV로만 보게 해야지.’

****

“어떻습니까움?”

김서준은 노움을 위아래 훑었다.

“흠...”

노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 있던 엘린도 두 손을 모은 채 김서준의 입술을 바라봤다. 마침내 김서준의 입술이 떨어졌다.

“괜찮네. 멋있다.”

“움!!”

“다행이에요!”

노움과 엘린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김서준이 다시 한번 노움을 바라봤다.

‘옷이 날개긴 하구나.’

초록색 비니와 같은 색상으로 맞춘 초록색 니트. 그 아래 베이지색 바지와 워커까지. 인별그램에 가면 볼법한 잘생긴 아역 배우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엘린 경. 감사하다움!”

“아니에요. 노움님이 원래 멋지셔서 그래요.”

“그건 맞긴 하다움! 히히.”

김서준은 노움의 자아도취로부터 눈을 돌려 엘린을 바라봤다.

‘저렇게 입어도 되나?’

사실 특별한 복장은 아니었다. 무릎 아래로 살짝 내려온 긴 스커트에 쌀쌀해진 날씨에 어울리는 살짝 두툼한 니트. 그 위에는 짧은 재킷까지.

평범하지만 조금 신경 쓴 느낌의 그런 외출복이긴 한데, 엘린이 입으니 느낌이 확 다르다.

‘노움은 옷이 날개였다면, 이쪽은 패완얼의 표본이네.’

저대로라면 외출하는 순간 온 이목을 끌 께 뻔하지만.

“어떨까요? 진짜 궁금해요!”

“나도 그렇다움!”

저렇게 들떠있는데, 입고 싶은 옷도 못 입게 하는 건 조금 가혹해 보였다.

‘그래 쌍팔년도도 아니고. 설마 누가 껄떡대면서 시비 걸겠어?’

그때였다. 김서준을 보고 엘린이 물었다.

“어때요? 저 괜찮아요?”

환한 얼굴로 한 바퀴를 돌며 포즈를 취하는 엘린. 그 모습을 본 김서준이 말했다.

“예쁘네요.”

“근데 서준씨는 오랜만에 외출인데 그러고 가게요?”

김서준이 자신의 옷을 확인했다. 안에는 타이츠로 착각할 법한 헌터 슈트. 그 위에는 편하게 입은 펑퍼짐한 티와 바지였다.

“농사할 때랑 너무 똑같잖아요.”

“둘에게는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저는 처음도 아니고 편한 게 좋아요.”

“에이, 그러지 말고. 이리 와봐요. 아까운 외모 죽이지 말고.”

그러자 노움이 맞장구를 친다.

“맞습니다움! 신농님의 얼굴이 아깝습니다움!”

“멍멍!”

얼씨구. 노움까지 나선다. 어쩔 수가 없나. 김서준은 못 이기는 척 엘린에게 몸을 맡겼다.

“저만 믿으세요.”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둔 소녀처럼 웃으며 엘린이 바닥에 지팡이로 마법진을 그렸다. 순간 빛이 확 올라오며 김서준의 몸을 휘감았다.

‘이런 기분이구나.’

입고 있던 천들이 스멀스멀 움직였다. 딱 맞는 착용감이 느껴지며 빛무리가 사라졌다. 엘린이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허공에 김서준의 전신이 희미하게 비쳤다.

“어때요?”

살짝 목까지 올라온 니트에 깔끔한 면바지. 그리고 가을 느낌 물씬 나는 브라운 계열 코트까지. 무난하고 깔끔했다.

“좋네요. 고마워요.”

“제가 고맙죠. 한번 입혀보고 싶었거든요.”

엘린이 살짝 눈을 찡끗했다. 그때 누군가 김서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음? 리노?”

“오! 리노 공도 꾸미고 싶은가 보움! 엘린 경. 어떻게 안 되겠냐움!”

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리노님은 이게 제일 귀여우신 거 같은데···.”

김서준도 동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간만에 외출. 리노만 그냥 갈 수는 없는 일. 생각 끝에 김서준이 엘린에게 귓속말을 했다.

“좋네요. 리노님 움직이시면 안 돼요.”

-팟!

회색 후드티가 리노의 다리부터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귀엽네요.”

“멋지다움!”

김서준도 리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엽다. 리노.”

리노는 김서준과 달리 엘린과의 패완얼 부류. 역시나 뭘 입혀도 귀여웠다.

“멍!”

리노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돌리며 기뻐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모두의 입꼬리가 절로 위로 올라갔다.

“자, 그럼 갈까요?”

“네.”

“움!”

“멍!”

김서준은 현관문을 열고 시계를 바라봤다. 뭐부터 해야 할까. 쇼핑이 좋겠네.

‘그럼 일단 산부터 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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