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두더지 게임.
화창한 날씨의 파란 구름 안 여유롭게 구름 조각이 하늘을 노닐었다.
그러나, 금산마을 끝자락에 있는 김서준의 밭은 오늘만은 그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날짜가 딱 맞아버렸어.’
모든 작물의 재배 시기가 맞아버렸다. 그러다 보니 밭 전체에 작물을 새로 심어야 했다. 평소보다 일이 몰린 셈이었다.
“빨리빨리 하라움! 할게 많다움!”
“”““움!””””
노움과 움들도 부산스럽게 밭을 휘저으며 작업을 진행했다. 심지어 엘린마저 밭에 나와서 일을 돕고 있었다.
사실 일꾼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노움과 움, 그리고 김서준 자신만으로 본래는 충분했다. 한데 엘린 본인이 자청했다.
“연구가 좀 막혀서요. 환기도 하고. 그리고 농사 재밌잖아요. 헤헤.”
‘그 기분 알지.’
일이 막힐 때, 일터를 벗어나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도 나왔듯이.
‘농사가 재밌다는 시답잖은 이유도 좋고.’
김서준은 흔쾌히 엘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구구구구.
간만에 밭도 한번 다시 갈아주고 있다. 신농의 힘으로 지력이야 넘친다만. 아무래도 이렇게 한 번씩 땅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바람을 들여주는 게 좋아 보였다.
“그렇지. 리노?”
“멍..”
리노가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하네. 왜 그러지?’
그토록 좋아하던 트랙터가 아니던가. 불편함을 무릅쓰고 굳이 무릎에 앉힌 채 트랙터를 운전하고 있건만 리노의 기분이 영 좋아 보이지가 않는다.
“리노 왜 그래? 어디 아파?”
“멍...”
“무슨 일 있어?”
“멍...”
아니라는 리노의 대답에 김서준의 근심이 깊어진다. 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멍.”
리노는 자신의 대단한 주인에게 괜찮다는 감정을 전했다. 모두가 활기 넘치게 일하는 순간, 리노는 처음으로 소외감을 느꼈다.
‘멍멍...(나는 할 게 없어...)’
노움도 엘린도 손을 돕고 있는 상황에 자신만 트랙터에 불려 오지 않았는가.
‘멍멍멍.(주인님은 나를 위해 트랙터를 태워 주셨지만 그건 내가 쓸모없다는 증거야.)
모두가 바쁜 가운데 쉬어도 될 정도로 자신은 쓸모없는 게 분명했다.
‘멍!(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리노는 스스로 대단한 아랑족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모두가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힘, 번뜩이는 송곳니를 칭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멍...(여기에는 다 쓸모없어...)’
농사에 이런 건 전부 쓸모가 없었다.
박스에 감자를 옮길 때면.
“리노공! 감자에 상처 안 나게 더 조심해야 한다움!”
번뜩이는 이빨이 오히려 방해됐다.
종자를 심을 때면.
“리노공! 땅을 그렇게 거칠게 파면 다시 정리해야 한다움! 조금 살살 해달라움!”
타고난 힘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멍...”
절로 나오는 한숨.
“흠, 트랙터별로야?”
“멍멍.”
리노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트랙터는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주인님의 무릎 위도 살짝 단단하면서도 온기가 어린 게 너무 좋았다.
단지 너무 행복한데 보답은커녕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을 뿐이었다.
“흠...혹시 리노 배고픈 거야?”
“멍.”
리노가 자기도 모르게 긍정의 의사를 보냈다. 배가 고픈 건 맞았다.
“하하. 알겠어. 얼른 끝내고 오늘도 맛있는 거 먹자. 오늘은 리노가 좋아하는 고기 줄 게.”
“멍”
리노가 들뜨는 마음을 애써 부정하며 대답했다.
김서준이 그 애매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였다.
“작업 중지! 큰일 났습니다움!”
노움이 소리쳤다. 김서준이 깜짝 놀라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노움 무슨 일이야?”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움!”
그 말에 리노와 김서준, 그리고 엘린의 이목이 모두 노움에게로 모였다. 김서준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노움, 올 것이 뭐야?”
“땅속의 악마...”
노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두더지입니다움!”
“두...”
“더...”
“멍(지)?”
두더지.
땅을 잘 파고 귀여운 외모로 알려진 두더지는 뜻밖에 농사에서는 골칫거리다. 뿌리를 해치기도 하고, 익충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랑 두더지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었지.’
신농의 땅으로 만든 덕분인지 여태 해충은커녕 두더지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흠,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된 건가. 아니면...”
김서준이 원인을 고민하는 것과 달리 노움은 완전히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전쟁입니다움!”
마치 전쟁을 기다렸던 군인이 드디어 전쟁터로 향하는 듯한 모습이랄까. 엘린 역시 그 모습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보고 있었다.
“멍!”
‘근데 리노는 왜 그러는 거지?’
묘한 건 리노였다. 풀이 죽어있던 리노는 두더지 이야기를 기점으로 바뀌었다. 밝아졌다기보단 결의에 찬 느낌이랄까.
‘밥 먹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평소처럼 싱글벙글하기보단 굉장히 전투적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노움님. 근데 두더지는 어떻게 잡으실 건가요?”
“두더지 퇴치 작전은 정해져 있다움! 1단계는 탐색조가 땅속에서 그 악마를 찾을 거다움! 2단계 포위망을 형성하고. 3단계는 제가 딱! 잡는 거다움!”
엘린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 눈을 보고 김서준은 생각했다.
‘엘린도 적응 다 했네. 정말.’
정령왕급 정령을 어찌 저렇게 귀엽게 바라보겠는가. 존댓말은 여전히 사용하지만, 이제 엘린도 노움의 실체(?)를 확실히 아는 듯했다.
“좋은 작전이네요. 저도 할 일이 있을까요?”
“엘린 경은 뒤로 물러나 있으라움! 위험하다움!”
“훗, 그래요. 그럼 전 뒤에서 응원할게요.”
엘린이 환하게 웃었다. 반면 리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움을 바라봤다.
“멍!!”
“오, 리노공! 그렇다면 선의의 경쟁이다움!”
“멍!”
‘경쟁?’
김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식사를 마친 후, 노움은 움을 3팀으로 나누었다. 1팀은 작업을 이어서 하고 나머지 두 팀이 두더지 소탕을 시작했다.
“노움. 그럼 부탁할 게.”
“걱정마시라움! 꼭 승전보를 가져 오겠습니다움!”
노움이 경례했다. 그러자 이쑤시개처럼 작은 나뭇가지로 무장한 움들이 함께 경례했다.
“멍멍!”
“그래. 리노도 화이팅!”
리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주인을 바라봤다.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눈빛. 전의가 한층 더 불타올랐다.
“시작이다움!”
“멍!”
리노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두더지는 땅속으로 움직이는 존재. 미세한 진동이나 냄새를 포착하는 게 중요했다.
움직이고 탐색. 다시 움직이고 탐색.
마치 낚시를 하듯 리노는 신중하게 밭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러기를 수십 분.
‘멍!’
마침내 발끝에 느낌이 왔다.
미약한 땅의 진동이 느껴졌다. 리노가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주 살짝 땅이 들리는 게 보였다.
“움!”
“포위하라움!”
노움이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급해진 리노가 단숨에 땅을 박찼다.
“와, 엄청 빠른데요?”
김서준의 옆에서 마늘을 심던 엘린이 감탄했다. 김서준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얼핏 작은 솜뭉치가 태풍에 날아가는 착각이 드는 장면이 보였다.
“진짜 열심이네요.”
김서준이 웃으며 다시 태평하게 마늘을 심으며 중얼거렸다.
“저녁도 맛있는 거 해줘야겠네.”
리노가 들었다면 환장했을 이야기였다. 리노는 오로지 두더지에게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다.
“멍!”
원으로 일대를 감싼 움들이 초록색 빛을 발했다. 정령 특유의 마력으로 포위망을 펼치려는 듯했다.
‘멍멍!!!!’
리노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포위망은 벽. 완성되는 순간 리노도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패배나 다름없었다.
“멍!”
-슝!
순간 바람을 일으키며 리노의 몸이 가속했다. 솜뭉치는 일순간 눈싸움을 할 때 던지는 눈덩이로 변모한 듯 빠르게 쇄도했다.
“이, 이런! 막으라움!”
노움이 그 속도에 당황했다. 급하게 벽을 만들던 움 몇 명에게 명령했다.
-착!
5마리의 움이 뒤를 돌아,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리노에게 들이밀었다. 하나 리노는 마치 바람이 된 듯 유려하게 움직여 움들을 피했다.
그리고 마침내, 땅이 들리는 그 끝 지점을 따라잡았다.
“안된다움!!!”
“멍!!”
노움의 절규를 뒤로하고 리노가 점프를 뛰었다. 그리고는 앞발을 거칠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살짝 들린 땅을 겨우 긁어냈다.
그 순간, 땅에서부터 검은 털을 가진 무언가 공중으로 튀어나왔다.
-툭.
리노는 곧장 그 무언가의 몸을 앞발로 제압했다. 그리고는 정체를 확인했다. 두더지였다.
‘멍!’
드디어 한 건 했다는 생각에 리노는 감격에 빠졌다. 노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좋은 승부였다움. 리노공.”
“진짜 귀엽네요. 그쵸?”
그 장면을 본 엘린이 김서준을 보며 물었다. 김서준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두더지는 제가 산에 풀어줄게요.”
“감사합니다.”
마법으로 두더지를 재운 엘린은 연구실 들리는 길에 풀어주기로 했다. 리노는 의기양양하게 김서준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표정도 한결 좋아져 있었다.
‘그런 거였나.’
김서준은 이내 리노의 마음을 읽고 말했다.
“역시 리노가 있어야 해. 리노 없으면 우리 밭은 누가 지키겠어. 안 그래?”
김서준이 리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노가 행복하다는 기분을 마구 뿜어댔다. 꼬리는 마치 헬리콥터처럼 돌아갔다.
김서준도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근데, 진짜 갑자기 왜 두더지가 나타난 거지? 신농의 땅은 해충이나 유해 동물이 없는 게 아니었던 건가?’
그게 아니면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까.
‘혹시 그거 때문인가···?’
김서준은 어제 엘린의 연구실 옆에 심은 미트루트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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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인상에 안경을 쓴 남자. 남자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오븐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군.”
살짝 빠져나온 버섯의 즙이 호일 위에서 지글거렸다. 남자는 서둘러 버섯을 꺼내 접시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이제 먹자.”
그 접시를 식탁에 내는 것으로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
“명신 씨. 오늘 무슨 날이야? 뭐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렸어?”
식탁에 앉아 있던 임명신의 부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식탁에는 각종 반찬이 가득한 진수성찬과 임명신의 특기인 구수한 된장찌개가 보글거렸다.
“게다가 이 소나무 향은···. 이거 송이버섯 아니야?”
“맞아. 아버지가 오랜만에 작물 보내주셨어. 그 송이버섯도 같이.”
“진짜? 아버님 또 농사지으셨어? 대박!”
부인의 입에 군침이 고였다. 임명신의 아버지 임종철은 농사의 명인. 명인답게 임종철의 작물은 무언가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요리를 많이 했구나?”
“물론이지.”
좋은 식재료는 요리사를 설레게 하는 법. 아르카니아 호텔의 한식 셰프인 임명신은 재료를 받자마자 이렇게 화려한 한 끼를 만들었다.
“근데 좀 특이하다. 당근이 노란색이야. 파도 약간 휜 거 같고.”
“아버지가 요즘 토종작물을 키우시거든. 그걸 재배해서 보내셨나 봐. 먹기 전에 짠 한 번 할까?”
임명신이 마치 웨이터처럼 술을 한 병 열어 와인 잔을 채웠다.
“무슨 술이야?”
“모월이라고. 원주에서 나온 전통주야.”
“색 예쁘네요. 잘 먹을게요.”
‘짠’ 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친 둘은 한 모금 잔을 들이켰다.
“식기 전에 송이버섯구이부터 먹자.”
임명신의 말을 따라 두 사람의 젓가락이 송이버섯으로 향했다. 노릇노릇 구워진 송이버섯은 보는 것만으로 식욕을 자극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입에 그 탱탱한 버섯을 집어넣었다.
“와···.”
“음···.”
맛을 표현하는 데 많은 말이 필요할까. 그 감탄 한 번에 두 사람은 서로 어떤 감정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이렇게 크기도 크고. 모양도 예쁘고. 이번에 정 회장님이 VIP 접대를 위한 특별 코스 부탁하셨는데. 그때 이걸 내도 되겠어.”
“좋은 생각이에요. 제가 살면서 먹어본 송이버섯 중 정말 최고예요. 진짜 아버님한테는 항상 감사하다니까요.”
“흠흠···.”
“아, 물론 명신 씨 요리 솜씨도 대단하고요.”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임명신은 볼이 점점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속부터 불끈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가 왜 이 송이버섯은 특별한 날 사용하라고 했는지 알겠어.’
맛도 좋고, 향도 좋고, 식감도 좋지만. 기분 탓인지 마치 약이라도 먹은 듯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오늘이 아마 좀 날이 괜찮았지?”
임명신의 표정이 살짝 느끼해진다. 그러자 부인의 얼굴이 좀 더 발그레해졌다. 두 사람의 끈적한 시선이 교차했다.
‘어머니. 아버지. 곧 손주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임명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