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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로 꿀 빠는 헌터-31화 (31/139)

31. 섭외

“밤 공기가 차구먼.”

김서준의 집 옥상 난간에 선 임종철이 말했다.

“갈수록 가을은 줄고 여름이랑 겨울만 길어지는구먼.”

임종철은 혀를 끌끌 찼다.

“그건 그렇고 오늘 고맙구먼. 덕분에 맛있는 식사를 혔어.”

“아닙니다. 매번 얻어먹기만 했는데요.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김서준은 자주 점심을 임종철의 집에서 먹었다. 그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먹는 개구리참외도 참 맛있더구먼. 맛이 슴슴하니 추억의 맛이었어.”

외투를 껴입은 임종철이 아련한 눈으로 난간 너머를 바라봤다. 김서준의 그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도시의 밤과는 전혀 다른 고요한 어둠 사이 투박한 불빛을 뿜는 가로등 몇 개가 보였다.

“옛날에는 정말 자주 먹고 했는데···. 고맙네. 다른 작물은 몰라도 자네 입에는 개구리참외가 안 맞았을 텐데···.”

“아닙니다.”

개구리참외는 당도가 일반 참외와 비교하면 많이 떨어진다.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걸 넘어 이제는 농가조차 찾기 어려운 상태가 된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텃밭이 생기면 심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요.”

심심하니까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며 아버지는 여름이면 수박보다 개구리참외를 따 드셨다.

“그러고 보니 자네 집에 아마 개구리참외밭도 있었지?”

“네, 맞습니다.”

“그래그래. 내가 까먹고 있었구먼. 그 양반도 식성이 참 특이했지. 간도 항상 심심한 거만 찾고. ”

임종철이 너털웃음 속에 그리움이 묻어난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김서준의 머리에도 역시나 옅은 그리움이 스쳤다.

“근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따로 불렀는가.”

“어르신과 상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상의?”

“토종작물을 마을 전체가 재배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세계수의 자격시험에 관하여 이런저런 나름의 답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귀결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터전을 만들어줘야 해.’

그게 이 마을이든, 아니면 다른 마을이든 작물이 계속 살아갈 땅이 필요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게 아닌 토착민으로 만들어줘야 했다.

‘그러려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땅을 아무리 많이 사서 심는다 한들 의미가 없었다. 식물원을 만들 게 아니라면, 김서준이 사라지는 순간 식물은 살아갈 곳을 잃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퀘스트를 위한 것만은 아니야.’

“최 씨 할아버지가 이사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여기서는 더 살기 힘드시다고.”

“자네도 들었구먼. 그러더라고. 슈퍼를 할 수도 없고 올해는 농사도 시원찮았으니까.”

김서준이 가을에 농사를 시작한 것과 달리, 일반적인 농가는 한해 농사의 결실을 보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번에 많이 안 좋았다고 했지.’

갑작스러운 폭염으로 대부분 농가가 큰 피해를 봤다고 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마을이 농사로 엄청나게 대단한 마을은 아니니까요.”

“그렇긴 혀지.”

“그리고 하나둘 이렇게 사람이 떠나다 보면 마을이 사라질까. 저는 그게 걱정됩니다.”

임종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임종철 역시 크게 동감하는 바였다. 임종철은 토박이이자, 무려 금산마을의 촌장이 아니던가.

내심 이렇게 마을이 점점 죽어가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제가 나고 자란 마을이, 추억이 사라지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그건 나도 통감혀. 하지만 말이지...”

임종철은 입안에 퍼지는 쓴맛을 씹으며 말을 흐렸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제...’

마을의 특산물이 있거나 무슨 특별한 기반 시설이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는 워낙 외진 데다가 도로도 제대로 안 깔려 있어서 택배조차 받기 힘들던 곳이 아니었던가.

“근데 토종 작물을 특산물로 만들어서 해결하겠다는 건가?”

“맞습니다. 특산물을 만들고 확실한 단골 거래처를 만들면 적어도 일이 없어서 마을을 떠나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자식들이나 다른 젊은 사람들이 마을로 올 수도 있고요.”

특산물을 활용한 마을 살리기.

임종철이라고 이 생각을 안 했을까. 옆에 임실이나 청양에 있는 작은 마을도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지 않았던가.

임종철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뜻은 알겠지만 아무래도 힘들지. 네 밭이야 네 힘으로 잘 자란다지만, 보통은 아니잖여.”

김서준이 처음 신농의 힘으로 땅을 되살렸을 때, 임종철의 밭에도 그 힘을 써본 적이 있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실패. 아마도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키우는 게 여간 까다로워서 지금보다 오히려 수익이 떨어질 겨. 사실 뭐 말할 필요도 없지. 서준이 너도 알잖여. GMO작물(유전자 변형 작물)에 비해 토종작물이 상품성은 훨씬 떨어지는 거.”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쟁력을 잃은 토종작물이 자리를 잃은 거죠. 아무리 맛이 좋은 녀석들이라고 하더라도요.”

임종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토종 작물에 관해 관심 있는 사람은 모두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르신 그 상품성만 회복할 수 있다면 이 마을의 특산품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려. 근디 그게 쉬운 게 아니잖여. 무슨 방법이 있는겨? 혹시 그 스킬이라는 거에 그런 거도 있나? 아니면 혹시 종자 회사라도 차려서 연구라도 하려는 겨?”

임종철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물었다.

나라에서도 거금을 투자하며 지키려는 게 토종 종자였다. 뒤집으면 그만큼 투자를 해도 토종 종자 개량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서준이라면...’

이미 김서준은 상식 이상의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지 않던가.

“스킬은 아닙니다만 실마리는 있습니다.”

“그려?!”

임종철이 반색하자 김서준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은 딱 실마리 정도 수준입니다.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달빛에 비친 김서준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물론이지. 말만 혀. 아니, 내가 부탁하고 싶구먼. 꼭 좀 부탁혀.”

임종철은 그 잘생긴 얼굴이 참,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다.

****

‘순조롭네. 다행히도.’

제1 거래처이자, 홍보를 담당할 엄민호 셰프의 자진 섭외. 그리고 역시 홍보와 농사 지휘를 담당할 임종철 어르신의 섭외까지 끝났다.

이제 마지막.

이 계획을 생각하게 된 시초이자, 핵심인물을 섭외할 차례였다.

“고기, 잘 먹네요?”

김서준은 놀랍다는 듯 식탁 앞에 마주앉은 핵심 인물을 바라봤다.

‘진짜 신기하네.’

하얀 피부에 귀가 뾰족한 엘프가 고추장 대신 간장으로 볶은 제육볶음을 너무나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네? 네. 맛있잖아요.”

전골 때도 그랬지만 엘린은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고기도 잘 먹고 채소도 잘 먹었다. 오히려 김서준보다도 편식을 안 하는 듯했다.

‘이것도 편견이었던 건가.’

김서준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편견에 빠져있었는지를 느끼고는 책망했다.

“소고기도 맛있지만, 돼지고기도 참 맛있어요.”

“라이너스 대륙에도 똑같은 고기가 있나 봐요?”

“네. 저번에 찾아보니까 생긴 건 좀 다른데, 맛은 똑같아요.”

김서준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또 검색해 보셨나 보네.’

엘린에게 보여줄 옷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할 때였다. 컴퓨터를 쓰는 걸 본 엘린은 세계수를 만났을 때만큼 흥분했다.

“대단해요!! 이건 거의 현자나 다름없잖아요?”

엘린은 컴퓨터를 무엇이든 물어보면 알려주는 마도구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저, 저도 사용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사용 방법부터 알려 드릴게요.”

“정말요? 감사해요!”

엘린은 특유의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먼저 이건 마우스라는 건데···.”

그 길로 마우스와 키보드의 사용법을 익힌 엘린은 웹서핑에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틈 만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독수리 타법이라고 하기도 뭐한 느린 솜씨로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엘린은 하루가 다르게 여 김서준의 세계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안에 허위정보도 많아요. 꼭 정보 비교도 많이 하고 조심하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김서준은 그렇게 신신당부했지만, 엘린이 그걸 잘 받아들였는지는 미지수였다.

‘신기해. 엘프가 앉아서 컴퓨터를 하는 것도 신기한데. 그걸로 이 세상 지식을 익히고 있는 엘프라니...’

김서준이 웃는 걸 보고 엘린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한가요?”

“아, 아니요. 저는 엘프는 고기를 싫어할 줄 알았어요.”

“음. 저희는 사냥도 하고 가축을 키우기도 해서 육식도 자주 했어요. 근데 채식만 하는 엘프도 있긴 해요. 로렌 숲의 엘프들이 그랬어요.”

“아아...”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도 사람마다 식습관이 다른데 엘프도 여러 스타일이 있겠지.’

다시 식사가 이어지고.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그러다 식사가 마무리되어갈 때 즈음 김서준이 본론을 꺼냈다.

“엘린. 혹시 마법으로 식물의 종자를 강화해본 적 있어요?”

“식물 종자를요? 아니요. 그런 건 안 해봤어요. 그런 마법도 없고.”

스킬은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는 분야였다. 치료나 강화에 관련된 스킬은 가장 연구가 많이 되는 분야였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수술 없는 암 치료.

깁스 없이 바로 회복되는 골절.

예방주사 없이 견디는 독감 등.

잘 만든 마도구로 힐러나 버퍼를 대신 할 수 있다면, 던전 토벌은 물론, 의학계의 판도를 바꿔 놓을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아직 성과는 없었지만...분명 되기만 하면 세상이 뒤집히겠지.’

그런 치유, 강화계 스킬에 대해 밝혀진 바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치유나 강화 스킬은 마력으로 사람이 가진 능력을 극대화하는 거죠?”

“네. 마력으로 능력을 활성화하는 방식이 많죠.”

“그럼 혹시 그런 방법으로 식물을 강화할 순 없을까요?”

“흠...”

엘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힘든가?’

헌터는 전직과 함께 스킬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마력 자체를 연구해서 마도구를 만드는 게 겨우. 반면 엘린은 달랐다. 그들은 수백, 수천 년 간 대대로 연구해온 마법 지식을 이용해 마법을 배우고 또 창조한다고 했다.

‘그럼 이런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어려울까.

“생육을 빠르게 하자는 게 아니라 씨앗이 가진 힘을 강하게 하자는 거죠?”

“네. 그렇게 해서 병충해나, 날씨에 좀 더 잘 버티게 하는 거죠.”

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조용히 읊조렸다.

“...대단해.”

“네?”

“진짜 신농님은 대단하세요. 정말 천재적인 발상이에요!”

“네?”

엘린이 대단하다는 듯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생육을 빠르게 하는 마법 같은 건 엘프 사이 금기예요.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거니까. 그래서 식물에 대한 마법은 모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건...”

엘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식물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건 자연의 힘을 최대화하는 거잖아요! 이런 식이면 오히려 자연을 존중하는 거죠. 정말 대단한 생각이세요!”

김서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능할까요?”

“연구는 해봐야 해요. 하지만 분명 가능할 거예요.”

엘린은 마지막 밥을 씹어 삼킨 후 말했다.

“꼭 좋은 결과를 만들어 볼게요! 분명 성공한다면 엘프 역사에 큰 획을 그을 거에요!”

그렇게 말한 엘린이 중얼거렸다.

“엘프의 명예를 걸고. 이건 꼭 해내야 해.”

김서준도 마지막 밥그릇을 비우며 생각했다.

‘명예까지 거실 필요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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