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30화 (30/139)

30. 아까운 인재

영화, 만화, 소설.

어찌 된 이유인지 우리는 다양한 매체에서 엘프를 만난다. 덕분에 우리는 각자만의 엘프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김서준 역시 예외는 아니다.

뾰족한 귀, 새하얀 피부, 누군가 의도해서 만든 것 같은 외모. 신비로운 분위기 등.

김서준 역시 김서준만의 엘프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엘린’은 딱 이미지 속 그대로의 엘프였다.

‘시간관념이 다른 거만 빼면 말이지.’

그래서 불안했다. 김서준의 머릿속에 거짓말에 능숙한 엘프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의 거짓말에 당하는 순진한 피해자 쪽이었다.

‘근데 저건 대체 뭔 상황이야?’

트랙터의 앞 유리 너머로 보인 상황을 보고 경악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일찍 온 엘린이 임종철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왜 셰프님까지 오신 거지?’

마음이 조급했다. 김서준은 자기도 모르게 트랙터의 속도를 높였다.

-구구구구.

엔진 소리가 커지자 대화를 나누던 이들의 고개가 트랙터 쪽으로 향했다.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했다.

‘다들 표정이 좋네?’

모두가 웃고 있다. 저게 어떤 의미인지 김서준은 더 불안해졌다. 집 앞에 아무렇게나 트랙터를 댄 김서준은 내리는 것과 동시에 트랙터의 소환을 해제했다.

“수고 하셨습니다움!”

“멍!”

“너희도 수고했어.”

리노와 노움에게 빠르게 인사한 김서준은 걸음을 재촉했다.

“안녕하세요!”

일부로 좀 크게 인사한다. 바로 관심을 가져와 대화를 끊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모두가 김서준의 인사에 화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서준 씨.”

“셰프님도 오셨어요?”

“어르신께 들었습니다.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셨다고요. 조금 섭섭합니다. 꼭 다음 작물 재배할 때 말씀을 부탁드렸는데···.”

김서준이 괜히 헛기침했다.

“흠흠, 그게 팔 작물이 아니어서 가지고요.”

“그래도 새로운 식재료를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죠. 괜찮으시다면, 오늘 요리는 제가 함께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김서준이 임종철을 바라봤다. 이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어르신, 이럴 줄 알고 엄민호 셰프를 부르셨구나.’

임종철은 엄민호를 오늘의 출장 셰프로 찍은 것이었다.

‘어르신도 참···.’

엄민호 셰프의 요리는 맛있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꽤 멀었다. 차를 타고도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했다. 김서준과 임종철이 초대를 받고도 쉽게 갈 생각을 못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르신이 차를 그렇게 오래 타기 싫다고 하셨지.’

그래서 이번 찰나에 아예 엄민호 셰프를 불러버린 듯했다.

‘뭐 나야 좋지. 나도 셰프님 요리가 먹고 싶었으니까. 이참에 요리도 좀 배우고.’

김서준은 고민 없이 바로 수락했다.

“아니, 근디 내가 몰랐던 손님이 있었구먼. 우크라이나에서 왔다며?”

“네? 아, 네.”

김서준이 놀라서 엘린을 바라봤다. 엘린이 살짝 눈을 찡끗했다.

“이렇게 예쁜 외국인 친구도 있었던 겨? 진짜 볼수록 신기하구먼. 엊그제 티브이에서 본 영화배우보다도 이쁜 거 같어.”

임종철의 웃음에 김서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반면 엘린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대꾸했다.

“이 양반이 주책은···. 서준 씨. 엘린 씨. 미안해요. 우리 날도 쌀쌀한 데 얼른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그때 서준 씨가 도와주셔서 잘 넘길 수 있었죠.”

“이거, 헌터로는 다 망한 거처럼 이야기하더니 꽤 능력이 좋았나 보구먼!”

“서준 씨가 워낙 겸손하잖아요.”

거실에 앉은 세 사람을 보며 김서준의 불안은 완전히 가셨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미지는 역시 이미지일 뿐이었다. 엘린은 거짓말을 잘 하는 수준을 넘어 능숙해 보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수를 찾으려고 인간 사이에 섞여서 한참을 돌아다녔을 텐데. 연기를 못할 리가 없지.’

귀까지 숨기고 인간들 사이에 숨어들어서 얼마나 자주 연기를 했겠는가? 김서준은 뒤늦게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 됐든 잘 됐으니 다행이지.’

안심한 김서준이 이내 시선을 거둬 주방을 바라봤다.

사슴뿔처럼 생긴 삼동파.

얼핏 조금 큰 인삼처럼 생긴 노랑 당근.

이름답게 거대한 씨알을 가진 코끼리 마늘.

그리고 담뱃잎처럼 납작하고 온통 초록색인 담배 상추까지.

‘신기하긴 하네.’

하나같이 처음 보는 모양의 식재료들이었다.

“하나하나 생긴 게 참 신기하군요. 이게 전부 토종작물인 거죠?”

엄민호 역시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대단합니다. 이런 생소한 작물을 찾아 키울 생각을 하다니···. 근데 무슨 요리를 하실 생각입니까?”

“아, 버섯 전골이요.”

김서준은 남은 4개의 송이버섯과 미리 사둔 소고기를 꺼냈다.

손질을 위해 송이버섯을 봉투에서 꺼내는 순간,

“이, 이건···.”

마치 디퓨져의 향처럼 은은한 솔향이 집안 가득 퍼져나갔다. 엄민호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냥 꺼낸 것만으로 이렇게 진한 솔향이라니. 특등급 송이버섯도 많이 봤지만, 이런 송이버섯은 처음 보는군요!”

엄민호가 감탄하는 그때. 누군가 주방으로 다다닥 달려왔다.

“서준 씨! 이 냄새. 이거 여기서 나는 거죠?”

엘린이었다. 그 뒤로는 함께 달려온 리노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김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송이버섯입니다.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버섯인데, 이렇게 소나무 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대, 대단해요. 이렇게 숲을 그대로 담은 것 같은 버섯은 처음 봐요!”

엘린이 놀랍다는 듯 버섯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엄민호 셰프가 웃으며 말했다.

“우크라이나에는 역시 송이버섯이 없었나 보군요. 운이 좋으시네요. 이 정도 송이버섯이면, 최상품 중에서도 최상품인데 이런 송이버섯으로 첫 송이버섯을 경험하다니 말입니다.”

그러자 엘린이 격하게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진짜 이번에 오길 너무 잘했네요.”

‘이번에?’

한국의 작물을 연구차 이번에 김서준의 집에 왔다는 둘이 짠 스토리를 염두에 둔 단어 선택이 분명했다.

‘대단하네. 진짜.’

김서준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멍멍!!”

“아냐. 리노. 이번에는 안 돼. 대신 참치 통조림에 미트루트랑 소고기 섞어서 줄게.”

“멍!”

리노는 아쉽지만, 그것도 좋다며 엘린과 함께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자, 그럼 요리를 시작해볼까요?”

엄민호가 특별히 챙겨온 자신의 칼을 꺼내 들었다. 김서준도 칼을 들고 말했다.

“좋습니다. 시작하시죠!”

****

“당근은 좀 두껍게 썰어주세요. 맛보다는 고명으로 사용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김서준은 능숙하게 도마 위에 재료를 손질해나갔다. 송이버섯을 손질하던 엄민호 셰프는 내심 감탄했다.

‘엄청 능숙해. 하루 이틀 요리 해본 솜씨가 아니군.’

냉장고나 서랍에 둔 양념을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김서준은 어설프게 요리사 흉내를 내는 작자들보다 훨씬 나았다.

‘위생은 기본이고 칼질도 수준급이야.’

거기다, 엄민호가 말하면 바로 딱 알아듣는 센스도 뛰어났다. 가게로 데려가 셰프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일 정도였다.

‘물론 그럴 수는 없지.’

삼동파의 향을 맡으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셰프로 데려가면 이런 식재료는 절대 못 구할 테니까.’

엄민호는 김서준에게 질 수 없다는 듯 빠르게 재료를 손질해나갔다.

‘송이버섯은 아무래도 안 되겠군.’

송이버섯은 물로 씻을 수 없다. 향이 물과 함께 다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을 칼로 얇게 껍질 벗기듯 겉면을 벗겨낸다.

그러나, 이 송이버섯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작은 부분도 아까울 거 같아.’

엄민호는 김서준에게 버섯을 내밀며 말했다.

“상품이 너무 좋네요. 아무래도 칼보다는 솔질로 흙을 털어내서 먹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작은 솔 있습니까?”

“아, 그거라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김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노움!”

“네!!!!”

노움이 김서준의 옆에서 ‘-팟’하고 튀어나왔다. 엄민호가 놀란 표정을 짓자 김서준이 말했다.

“제 정령입니다. 농사를 돕고 있어요.”

“난 노움이다움!”

“아, 그렇군요. 반갑다.”

“나도 반갑다.”

엄민호는 5살짜리 조카가 반말로 인사하는 묘한 기분은 무시하고 웃으며 넘겼다.

“노움, 이거 흙 좀 털어 줄래?”

“알겠습니다움!”

노움이 작은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송이버섯의 흙이 마치 자석에 붙는 쇳가루처럼 노움에게로 모여들었다.

송이버섯 손질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대, 대단하군요!”

엄민호가 놀란 토끼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엣헴!”

“고마워. 이따가 노움도 리노랑 같이 맛있는 거 해줄게.”

“가, 감사합니다움!!!”

노움은 반색하며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이내 리노에게 날아가는 노움. 엄민호는 그 작은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런 정령 하나 가게에 두면 손질이 훨씬 쉬워지겠군요.”

“그런가요? 저는 이런 특별한 경우 말고는 노움의 힘은 안 빌려요. 이렇게 직접 손질 안 하면 요리하는 느낌이 안 난달까요.”

김서준의 말에 엄민호는 한대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맞아. 재료 손질도 요리에 중요한 일부이건만. 이래서야 서준 씨가 요리사 같군.’

엄민호가 살짝 미소 지었다.

“맞는 말이네요. 그럼 얼른 하시죠.”

“네. 셰프님.”

엄민호는 재료를 손질하는 족족 냄비에 담았다.

바닥에는 양념에 잘 버무린 얇게 저민 소고기. 그 위로 어슷썰기 한 파. 채 썬 양파와 애호박을 색감이 살도록 깔았다.

마지막으로 송이버섯을 놓으니 초록색, 붉은색, 흰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마지막은 노랑 당근과 홍고추로 마무리하자.’

플레이팅을 마치자 김서준이 고이 끓인 육수를 그 위로 부었다.

‘재료가 흐트러지지 않게 부어내는 건 이야기 할 필요도 없는 건가. 역시 탐나는 인재야.’

엄민호의 아쉬움(?)과 함께 전골이 완성이었다.

“맛있어 보이네요. 역시 셰프님이세요.”

“서준 씨가 워낙 좋은 작물을 길러낸 덕이죠.”

둘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음식을 마무리했다. 전골과 함께 구운 마늘 꼬치와 쌈을 싸 먹을 담배 상추, 그리고 김향숙이 가져온 김치 등을 내놓으니 푸짐한 한 상이 완성되었다.

“맛있겠구먼.”

“와, 진짜 예뻐요.”

“향도 너무 좋은데요? 얼른 먹어보고 싶어요.”

상으로 모인 모두가 각자의 감상을 쏟아냈다. 다들 서둘러 저 음식을 맛보고 싶은 기색이었다.

리노와 노움까지 챙긴 김서준이 자리에 앉자 임종철이 말했다.

“잘 먹겠네.”

그러자 모두 잘 먹겠다고 이야기하며 수저를 들었다. 엄민호도 숟가락을 들어 전골 국물을 입에 넣었다.

“정말 맛있구먼. 역시 제대로 키우니까 아주 대단혀”

“정말 맛있네요. 음식점 차려도 되겠는데요?”

“한국의 채소는 원래 이렇게 맛이 깊은가요? 우크라이나에서는 한 번도 못 먹어본 맛이에요.”

음식을 만든 김서준마저 스스로 감탄을 터뜨렸다.

“흠···.”

엄민호 자신만이 심각한 듯했다. 엄민호는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를 건져 국물과 함께 한입에 집어넣었다.

‘대단하군.’

가을이었다.

가을 냄새가 진하게 베인 솔방울이 떨어지는 소나무 숲이었다. 그 숲에서 돗자리를 펴고 각종 싱그러운 채소 반찬을 함께 먹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날씨는 따뜻한 거지. 마치 봄처럼.’

머릿속에 엄청난 영감이 휘몰아쳤다. 자신의 요리 솜씨 이상의 수작이었다. 홈 파티에만 올릴 음식으로는 아깝고도 아까운.

“왜 그러세요? 혹시 입에 안 맞으십니까?”

엄민호의 표정을 본 김서준이 물었다. 엄민호가 천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전율에 빠져 이야기했다.

“너무 맛있습니다. 너무···.”

그러다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엄민호가 말했다.

“서준 씨. 그래서 이 재료들은 언제부터 살 수 있는 겁니까?”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김서준의 머리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흠, 그렇죠. 역시 그냥 혼자 먹기는 좀 아쉽겠죠?”

김서준의 시선이 엘린을 향했다. 웃고 있던 엘린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김서준은 씽끗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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