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29화 (29/139)

29. 터전

미세먼지 가득한 도심 속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청명한 하늘.

그 아래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풍경 속 김서준의 밭은 오늘도 여지없이 수확기를 맞았다.

“다들 힘내라움! 이제 거의 다했다움!”

“움! 움!!”

노움의 응원에 작은 움들이 더욱 힘차게 움직였다. 김서준과 리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 그러나 한 사람, 아니 한 엘프만은 놀라울 정도로 격양되어 있었다.

“과연 신농의 정령! 대단하십니다.”

“엣헴!”

노움이 자신을 보고 감탄하는 엘린을 보며 가슴을 활짝 폈다.

“봤냐움! 이게 바로 우리 농사의 정령이다움!”

엘린의 말은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만 봐도 얼마나 진심에서 나오는 칭찬인 지가 느껴졌다.

‘대단하네. 진짜.’

엘린에 따르면 엘프도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게다가 세계수는 엘프들에게는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신목.

농사의 정령이자 세계수를 위한 정령인 노움의 위상은 당연히 드높았다.

‘그래도 정령왕 급이라니.’

덕분에 엘린은 노움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며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웃기는 건 노움이었다.

“당연하다움! 마음에 드는 엘프다움!”

노움은 자연스레 엘프를 하대하고 있었다. 김서준이 엘린을 꽤 존중하는 것과는 달리. 더군다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저 외모로 은근 꼰대라니···.’

5살짜리 꼬마가 어른을 따라 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움들에게 하는 걸 보면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다만.

“일로 와라움! 작물을 소개해주겠다움! 이건 감자다움!”

김서준의 염려와 달리 엘린 역시 자연스레 납득 했다. 정령왕 급이라면 어지간한 엘프를 하대하는 게 당연하다나.

오히려 엘린은 노움을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고 있었다. 노움도 그걸 즐기는 거 같아서 김서준은 리노와 함께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생긴 건 티암 같네요.”

‘티암? 이 세계 작물인가.’

라이너스 대륙의 작물과 이 세계의 작물은 완전히 다른 듯했다.

신기한 건 그런데도 꽤 많은 현 세계 작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한 여행자가 남긴 식물도감이 있는데, 거기에 적혀있었다고 했지. 혹시 이 세계에서 라이너스 대륙으로 간 사람이 있었던 걸까?’

김서준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노움은 엘린에게 감자에 대해 열띤 강의를 진행 중이었다.

“...생긴 것만 비슷하지 티암이랑은 완전 다르다움! 감자가 훨씬 맛있다움!”

“그렇군요. 저 이거 먹어봐도 될까요?”

“그건 신농님 께 여쭤 보라움!”

엘린이 뒤를 돌아 김서준을 바라봤다.

“저 이거 먹어도 될까요?”

호기심으로 가득 찬 푸른 눈이 김서준과 마주쳤다.

‘참 적응이 안 되네. 저 외모는···.’

김서준은 이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생으로 드시게요? 감자는 생으로 먹는 거보다 요리를 해서 먹는 게 좋아요.”

“괜찮아요. 그냥 생으로 먹는 맛도 기록하고 싶어서요.”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엘린은 학자로서 연구와 동시에 식물도감을 작성했다. 연구만큼 도감 작성도 열정적이어서 먹을 수 있는 작물은 전부 먹어볼 기세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생으로 먹어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문득 떠오르는 호기심. 김서준은 노움이 마법으로 흙을 털어낸 감자를 받아들었다.

“잠깐만요! 흡!!”

기합과 함께 손가락에 힘을 줬다. 팔 근육이 부풀어 오르자 ‘-뚝’ 소리와 함께 감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이거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엘린은 감자를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엘린은 마치 사과를 먹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감자를 씹어 삼켰다.

“약간 쌉쌀한데, 그래도 먹을 만 한데요. 향도 좋아요. 은은하게 나는 단맛이랑 흙냄새도 좋아요. 티암은 생으로 먹으면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진짜 멋지네요. 감자라는 거!”

‘그 정도인가? 감자는 생으로 먹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의외의 반응에 혹한 김서준이 감자 반쪽을 한입에 입안에 집어넣었다.

-아삭.

씹히는 순간 감자즙이 입안에 퍼졌다. 씁쓸하고 비릿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컥! 컥!”

김서준이 놀라 그대로 감자를 뱉어버렸다.

‘안 먹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건데···.’

오이는커녕 당근도 생으로 못 먹는 김서준이 감당할 만한 그것이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좀 놀라서···. 이걸 잘 드시네요.”

“저는 맛있던데···. 혹시 하나 더 먹어도 될까요?”

김서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삶아서 먹으면 난리 나는 거 아냐?’

“이, 이런 맛이···.”

예상대로였다.

김서준의 집, 대청마루에 쪼르르 앉아 삶은 감자를 먹는 순간. 엘린은 거의 미슐랭 식당이라도 온 것처럼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이런 맛있는 작물은 처음입니다. 약간 심심하면서도 감칠맛이 폭발하는 게. 정말 최고예요.”

엘린은 소금이나 설탕도 찍지 않았다. 그냥 먹어야 고유의 땅의 냄새가 난다면서 생으로 먹기를 고집했다.

“와···. 더 먹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여기 많아요. 그렇게 맛있어요?”

“진짜 맛있어요. 이렇게 삶기만 해도 맛있는 작물은 처음이에요.”

한입마다 감탄을 터뜨리는 걸 보며 김서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신농님 감자라 더 맛있는거다움.”

“멍!”

옆에서 함께 감자를 먹던 리노와 노움이 말했다. 그러자 엘린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같아요. 애정이 많이 담긴 기분이 들어요.”

“과찬입니다. 사실 밭에는 매일 나가지만, 노움과 움들이 다 하는데요. 저는 그저 돕는 정도죠.”

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서준 님의 마음이 노움 님과 움들을 통해 전달되었을 거예요. 그렇죠. 노움 님?”

“그렇습니다움! 신농님이 이렇게 농사에 마음을 다하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이 세계에 소환되지도 않았을 겁니다움!”

“멍멍!!!”

리노까지 나서자 김서준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래. 고마워.”

김서준이 방긋 웃으며 노움과 리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요. 엘린.”

“네?”

“서준 님 말고 씨요.”

“아, 네. 서준 씨.”

앞으로 엘린은 김서준과 살아야 한다.

적당한 신분이 필요했다. 김서준은 엘린을 우크라이나에서 온 헌터 동료이자 친구로 두기로 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김태희가 밭을 맨다는 속설도 있으니까.’

이런 속설은 시골에서 더더욱 잘 통하지 않던가. 거기에 엘린의 외모가 좀 많이 예쁜 서양인이기도 했고.

‘저 어눌한 한국어는 공부했다고 하면 될 테고.’

엘린은 한국어를 쓰고 있었다. 발음은 어눌하지만, 말은 능숙했다. 처음에는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엘린 본인도 모르게 그냥 습득되었다고 했다.

‘아마 세계수의 영향인 거 같다고 했지.’

아무렴 이유가 중요할까. 지금은 이 사연을 엘린이 숙지하는 게 중요했다.

“아, 맞다. 네. 서준 씨.”

다시 대답한 엘린이 ‘서준 씨, 서준 씨.’ 하며 연습했다.

감자를 다 먹고, 가볍게 녹차로 입가심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할까요?”

오후 일과는 더욱 바빴다. 토종작물을 재배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도 해야 했다.

“오후에는 연구실에서 보내도 될까요? 주신 미트루트랑 제가 아는 미트루트가 같은 건지도 알아보고, 도감도 작성하려고요.”

“물론이죠.”

김서준은 흔쾌히 허락했다. 엘린이 농사를 돕는 것도 아니고 굳이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겸사겸사 세계수 경비도 시키고.’

****

토종작물 재배도 노움과 움의 활약 아래 빠르게 진행되었다. 김서준은 움들이 잘 포장한 상자를 황금 트랙터에 연결한 트레일러에 실었다.

“움···.”

“꿍···.”

김서준이 트레일러 위 마지막 상자를 올렸을 때였다. 노움과 리노가 할 말이 있는 듯 낑낑거렸다.

‘왜 저러지?’

김서준이 먼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어?”

“그, 그게···. 저희도 저 트랙터를 타보면 안 되겠습니까움?”

‘아아. 그러네.’

김서준이 아차 했다. 트랙터나 굴착기 같은 농기계만 소환하면 눈이 반짝이던 아이들이 아니던가.

당연히 타고 싶었지만, 트랙터는 1인승이다 보니 말을 못 했을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트레일러가 있지.’

“저 위에 태워달라는 거지?”

“맞습니다움!”

“멍!”

사실 트레일러 위에 이런 작은 아이들을 태우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둘이 어디 평범한 이들이던가.

‘에인션트 울프에, 정령왕이랬지.’

엘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김서준이 ‘풋’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대신 안 다치게 조심해야 해.”

“알겠습니다움!”

“멍!”

“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박스 더미 위에 앉은 둘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김서준이 씩 웃으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시동 걸 거니까, 조심해!”

“알겠습니다움!”

“멍멍!!!”

놀이기구를 태워주는 듯한 기분으로 김서준은 시동을 걸었다.

-구구구구.

엔진 소리와 함께 부산스러운 감탄이 터져 나왔다. 김서준의 광대가 절로 위로 올라갔다.

“간다!”

“출발이다움!”

“멍!”

트랙터가 이내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뒤에서는 두 귀여운 녀석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는 조종석에도 태워줘야겠네. 무릎에 앉히고 조종하면 되겠지?’

혹시라도 일어나 사고도 방지하고, 둘이 충분히 이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김서준은 속도를 낮췄다.

창밖에 한적한 풍경을 보며 달리니 금세 마을에 도착했다. 김서준은 한 집씩 내려 직접 마을 주민들에게 작물을 건넸다.

“제가 재배한 토종작물입니다. 삼동파랑 노랑 당근, 코끼리 마늘이라고 합니다. 먹는 건 일반 작물하고 같은 방식으로 드시면 됩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고맙구먼.”

가장 마을의 바깥쪽에 사는 성씨 할머니 집부터 나눔을 시작했다.

“마음씨도 곱구먼. 항상 고맙네.”

“자네가 마을에 둔 포션 덕에 팔이 금세 다 나아버렸구먼. 고맙네!”

“반찬 좀 준 게 다인데, 보상이 후하구먼. 이걸로 또 반찬 해줘야겠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김서준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정이 넘치는 환대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나누길 잘했어.’

이런 마음의 충만함과 보람이라니. 별로 힘든 일도 아닌 데, 자주 이렇게 작물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지막 집.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슈퍼를 하는 최 씨 할아버지의 집이었다.

“작물을 좀 나눠드리러 왔습니다.”

“아유, 뭘 이런 걸 다 가져왔어.”

얼굴에는 주름과 검버섯이 피고 머리가 벗겨진 최 씨가 반갑게 김서준을 맞이했다. 김서준은 할아버지를 대신 해, 집 내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고맙구먼. 이거 뭘 좀 줘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물건이 텅텅 빈 진열장에서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과자 몇 봉을 집어왔다.

“이거 가져가서 좀 먹어.”

“괜찮습니다.”

“아녀. 어차피 이제 다 정리해야 혀서, 다 버릴 겨. 가져갈 거 있으면 더 가져가.”

“어? 이제 정리하세요?”

“그래야지. 이제 사람도 없고. 더 해서 뭐 하겠어···.”

최씨가 씁쓸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이해는 됐지만, 못내 아쉬웠다. 슈퍼는 어렸을 때 추억이 이래저래 많이 깃든 장소가 아니던가.

“정리하고 이제 떠나려고.”

“...이사하시는 겁니까?”

“그려. 터전이라는 말을 아는가?”

“네. 자기가 사는 곳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단순히 사는 곳이 아니지. 내 살림의 근간이 되어 자리를 잡은 곳을 말하는 거여. 내게는 그 근간이 이 슈퍼랑 저 뒤에 있는 밭이었지. 근디 근간이 망했으니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아···.”

복잡한 최 씨의 표정을 본 김서준은 어떤 적절한 말도 찾지 못했다.

“괜찮여. 살다 보면 이사도 가고 하는 거지. 하여튼 필요한 거 있으면 부담 없이 들러.”

“감사합니다. 이사 전에 그럼 한번 또 찾아오겠습니다.”

김서준은 대충 단어를 쏟아내고는 터벅터벅 가게를 빠져나왔다.

“신농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움?”

노움과 리노가 살짝 다운된 김서준을 보고 걱정했다. 김서준은 억지로 미소를 띄웠다.

“아냐. 가자.”

괜히 착잡한 기분이었다. 김서준은 트랙터에 올라타 그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다른 생각 거리를 떠올렸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퀘스트 완료가 안 되네?’

토종작물을 재배와 나눔까지 끝냈는데도 세계수의 인정을 받았다는 메시지가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 건가?’

생각해보면 지금은 김서준의 손으로 키워지는 애완식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서준이 떠나면 토종작물도 같이 떠난다. 진정한 의미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니었다.

‘작물의 터전이 아닌 거지. 슈퍼 아저씨의 말처럼.’

그렇다면 작물이 자리를 잡기 위한 살림의 근간이란 무엇일까.

‘상품성이겠지.’

상품성이 뛰어났다면, 마을에 누가 오든 토종작물을 재배할 테고. 그렇게 마을 일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이 땅이 ‘작물의 터전’이 되리라.

‘아니 어쩌면 이게 마을 사람들의 새로운 근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흠···.”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트랙터의 앞유리에 집이 보였다.

그런데, 집 앞 풍경이 이상했다.

‘아, 안 돼!’

김서준이 경악했다. 대문에서 엘린이 임종철 부부, 그리고 엄민호 셰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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