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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로 꿀 빠는 헌터-28화 (28/139)

28. 도움받을 일이 많겠는데?

“이건 샴푸라는 겁니다. 머리를 감을 때 쓰시고 이건 바디워시라는건 데 몸을 씻을 때 쓰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 씻고 옷은 이거 입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엘린은 샤워를 하고 싶어했다. 며칠을 밖에서 보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개울을 찾는 건 아니지.’

참으로 엘프다운 발상이긴 한데. 개울도 없을뿐더러 이 세계에서는 그러지 않는다고 김서준은 따로 설명해야 했다.

1층 욕실에서 샤워할 수 있도록 한 뒤 김서준은 편한 티와 반바지를 욕실 앞에 두었다.

‘여자 옷은 아니지만, 이걸 입고 잘 수는 없으니까.’

김서준은 엘린이 고이 접어 욕실 밖에 둔 옷을 바라봤다.

가슴이 깊게 파인 판타지 풍 드레스. 신비로운 미모와 잘 어울리긴 했다.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한층 더 부각해주기도 했고.

하지만, 한국에서 입고 다닐 만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건 드라이클리닝 해야 하나? 혹시 마도구인가?’

고민하다 김서준은 다시 옷을 내려놨다. 세탁은 나중에 물어보고 해주기로 했다.

“아까 보여 드린 방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내일 얘기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욕실 안에서 엘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서준은 2층 침실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하아...”

김서준이 아직 잠이 덜 깬 몸을 일으켰다. 금산마을로 온 후 처음으로 겪는 피로감이었다. 밤새 엘린의 향후 거처를 고민하다 잠을 설친 탓이었다.

‘역시 방법이 없네.’

어차피 본인이 이곳에 있고 싶어 하는 데다가, 돌아갈 방법도 없는 상황. 당분간은 데리고 있기로 했다.

‘이래저래 도움이 될 거 같기도 하고.’

“일어나셨어요?”

김서준이 옷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거실에 서 있던 엘린이 물었다.

“네. 아침마다 운동하거든요. 엘린도 일찍 일어났네요.”

“엘프는 원래 일찍 일어난답니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과연 엘프네.’

저런 후줄근한 복장에도 외모만은 빛이 난다.

‘아니 뭔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묘한게 아니었다.

정말 몸에 맞게 옷의 사이즈가 바뀐 게 확실했다. 자신의 옷이 저 가녀린 여자에게 딱 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옷이..”

“아, 너무 커서 제가 좀 줄였어요. 나중에 원래대로 해놓을게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잘 안 입는 옷들이라... 그런데 마법으로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네. 어려운 마법도 아니에요. 아, 그리고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세계의 의복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옷을 좀 만들어야 할 거 같아서요.”

엘린은 마법, 약초학, 연금술 등 다방면에 지식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옷 사이즈라니. 아무래도 김서준이 생각하는 지식과는 그 내용이 좀 다른 듯했다.

‘다행이야. 걱정하나 덜었네.’

사실 옷을 사는 일도 걱정 중 하나였다. 여자 옷을 잘 모르는 데다 사이즈도 모르고. 특히나 속옷은 어떻게 물어야 할지 고민이었건만.

모든 문제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귀를 숨기는 것도 가능할까요? 이 세계 인간들도 그런 뾰족한 귀를 가진 사람은 없거든요.”

“물론이죠.”

엘린이 손에 차고 있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빛이 일더니 이내 평범한 모습이 되었다. 김서준이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자 엘린이 팔지를 흔들며 말했다.

“엘프의 귀는 어디서나 사냥감이 되기 쉬워서요.”

엘린은 아침 산책을 같이 가길 원했다. 세계수를 제대로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근데 그 옷으로 가면 추울 텐데.”

“괜찮아요. 로브 입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말릴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엘린의 능력도 알아봐야 했다.

“멍!”

문을 열자 작고 귀여운 하얀 강아지로 돌아온 리노가 맞이한다.

“앗!”

엘린이 깜짝 놀라 김서준의 뒤로 물러났다.

‘에인션트 울프 아니라니까...’

능력적으로는 그럴지도 몰랐다. 리노가 싸우는 건 못 봤지만, 움직임만큼은 엄청나지 않던가?

하지만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사람을 피해 도망 다니던 리노가 그 흉포하다는 에인션트 울프라니. 말도 안 되지.’

김서준은 리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안 물어요.”

“죄, 죄송해요. 본능 같은 거라... 미안.”

엘린이 리노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리노가 ‘멍’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엘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마 교감으로 의사소통한 듯했다. 리노까지 챙겨 집 밖으로 나온 김서준은 속으로 노움을 불렀다.

[노움, 미안해. 끝나면 바로 갈게.]

오늘 산책에 노움은 빠지기로 했다.

엘린에 대한 일을 챙기면서일까지 하기는 시간이 부족할 수 있었다. 오늘만은 농사일을 노움에게 믿고 맡기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시라움! 농사는 노움의 기쁨입니다움!]

텔레파시를 통해 전달된 노움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김서준은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럼 갈까요?”

“네.”

“멍!”

엘린이 있기에 오늘은 가벼운 뜀박질도 없이 천천히 걸어서 움직였다. 엘린은 바닥을 살피며 이런저런 풀을 살폈다. 가끔은 감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멍!”

리노가 짖었다. 길의 끝, 가을의 풍경 사이 이질적인 녹림이 눈에 보였다.

“후, 저건 어떻게 고쳐야 하나..”

김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쉴드 발생기야 비싸지만 살 수 있는 물건. 하지만 주변과 풍경을 동화시키는 장치는 달랐다.

‘강원도까지 가야 하나.’

강원도에 있는 장인에게 선물 받은 A급 마도구. 고칠 수 있는 사람도 장인뿐이었다.

“아, 제가 부순 결계 때문이군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엘린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면 제가 다시 결계를 쳐 드려도 될까요? 쉴드랑 동화를 사용하신 거 같던데.”

김서준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게 가능하세요?”

“네. 지금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시간도 아마 얼마 안 걸릴 거예요.”

가능하다면 이쪽이 먼저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다. 김서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엘린이 앞으로 나서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공간이 일렁이더니 이내 기다란 지팡이가 나타났다.

‘아공간 인벤토리를 스킬로 사용하는 건가?’

일반적인 헌터 들은 아공간 인벤토리를 마도구나 던전에서만 습득 가능한 아티펙트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엘린은 낌새도 없이 곧장 인벤토리를 사용했다.

‘옷 이야기부터 예사롭지 않긴 했는데, 생각보다 능력이 훨씬 좋은 것 같은데?’

엘린은 지팡이 끝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흙바닥 위에 육망성과 처음 보는 형태의 글자가 적힌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동화!”

엘린이 소리쳤다.

동시에 마법진에서 빛이 일었다. 빛은 아지랑이를 만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닥에 그려졌던 마법진도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김서준이 의구심을 가진 순간. 주변의 풍경이 물감 번지듯 세계수가 있는 구역을 물들였다.

“이럴 수가...”

김서준의 입이 감탄을 토해냈다. 푸른 녹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완벽한 가을 풍경이 이어졌다.

‘마치 길이 원래 여기서 끊어지는 거 같아!’

이전의 썼던 장인의 도구도 굉장했지만, 약간 조잡했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조잡한 합성의 느낌과 웰메이드 영화 속 CG 정도의 차이랄까.

“괜찮나요?”

엘린이 수줍은 듯 말했다. 기대를 훌쩍 넘은 결과가 아니던가.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쉴드도 만들겠습니다.”

“네. 부탁합니다.”

딱 한 가지. 마법진 하나를 그리는 데 좀 오래 걸렸다. 아니, 좀 많이 오래 걸렸다.

‘1시간쯤 걸렸나.’

연신 하품을 하던 리노가 자리를 잡고 엎드려서 기다릴 정도였다.

‘저런 마법으로 골렘한테 쫓긴 것도 저것 때문이겠지.’

엘린은 다시 지팡이를 쥐고 새로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서준이 물었다.

“이번에도 얼마 안 걸리죠?”

“네. 금방 해요.”

“그럼 저는 잠시 리노와 요 근처 한 바퀴만 뛰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사람들끼리는 나눌 수 없는 대화가 자연스레 오간다. 김서준은 거의 졸고 있는 리노를 깨웠다. 그리고 뒤를 돌며 김서준은 한 가지를 머리에 새겼다.

‘엘프의 시간 감각은 우리와는 완전 다르다.’

그리고 이건 서둘러 바꿔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진짜 대단하네요.”

세계수의 구역에 들어온 엘린의 가슴이 환희로 가득 찼다. 처음 보는 식물로 가득한 녹림도 좋았다.

하지만 더 좋은 건 따로 있었다.

‘과연 세계수 님은 다르구나.’

옆에 있는 것만으로 몸의 활력을 돋우는 생명력은 물론.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몸 안에 마력이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찾아온 보람이 있어. 역시 여기에 자리를 잡아야겠다.’

엘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생명력이 충만했다.

‘무얼 골라도 되겠어.’

엘린이 미소를 지으며 김서준에게 물었다.

“신농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연구소를 짓고 연구를 좀 해도 될까요?”

김서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무로 집을 짓는다고 하지 않았나?’

세계수가 있는 언덕 주변이면 몰라도, 세계수의 영향권 안에 그런 건물을 짓는 건 곤란했다.

“연구는 괜찮습니다. 근데 연구소는 좀 어려울 것 같네요. 보시다시피 그런 큰 건물을 지을 공간도 없고, 여기는 이대로 두고 싶어서요.”

“오해가 있으신 거 같네요. 연구소는 나무 한 그루만 제게 빌려주시면 됩니다.”

김서준이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나무 한 그루요? 한 그루로 연구실을 만들 수가 있나요?”

“네. 물론이죠.”

“그렇다면야···.”

“감사합니다.”

대답한 엘린이 적당히 통이 두꺼운 나무 한 그루에 손을 얹었다. 푸른 마력이 엘린의 몸에서부터 나무로 옮겨갔다.

“대자연의 친구시여. 생명의 방을 나눠주소서.”

엘린이 말하자 나무의 몸통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 움직이더니 작은 문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엘린이 나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여기를요?”

김서준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 안은 껌껌하니 얼핏 막힌 것처럼 보였다. 김서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엘린은 그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러자 엘린의 몸이 검은 공간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법인가?’

김서준도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리노 역시 그 뒤를 따라 천천히 입장했다.

“이게 무슨...”

순간 시야가 바뀌며 김서준이 입을 떡 벌렸다. 안에는 나무로 만든 가구가 가득 차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심지어 공간이 작지 않았다. 적당한 투룸 정도일까.

“저희 엘프는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력이 강한 나무의 허락을 받으면 어디서든 이 공간을 열 수 있습니다.”

“대, 대단하네요. 그럼 여기가 원래 쓰던 연구실이라는 거죠?”

“네.”

김서준은 신기한 얼굴로 방을 두리번거렸다. 연구소라는 말답게 나무로 된 긴 책상 위에는 연구 도구가 즐비했다.

‘플라스크에 비커에 알코올 램프까지. 오랜만에 과학실이라도 온 거 같네.’

책장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이 꽂혀 있었다. 약초학, 연금술, 포션, 농사 등. 다양한 분야를 시사하는 제목이다.

‘정말 모든 분야를 다 공부한 건 맞나 보네.’

물론 세계수에 행방이나 전설에 관한 책과 문서도 보였다.

“음?”

갑자기 느껴지는 리노의 감정에 김서준이 아래를 내려 보았다. 리노는 무언가를 보며 격렬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저건?”

고구마를 닮은 붉은색의 작물. 미트루트였다.

“저게 왜 여기···?”

“미트루트를 아시나요? 미트루트는 다른 세계의 작물일 텐데···.”

“네. 제가 좀 키우고 있거든요?”

“정말입니까?!”

엘린의 눈에 번뜩였다.

“정말 미트루트를 재배하세요?”

“네···. 뭐 애들이 워낙 좋아해서요.”

“재배하신다고요? 저희 세계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데 재배라니···!”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크 족은 사료를 쓴다고 했는데, 찾기도 힘들 다니.

‘라이너스 대륙이라고 하길래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 둘은 다른 세계에서 온 건가···.’

이세계(離世界)가 여러 개라는 김서준의 가설이 맞는 순간이었다. 엘린은 김서준의 놀라움을 눈치 못 챈 듯 격양된 어조로 이야기했다.

“미트루트는 여러모로 연구가치가 높아요. 포션이나, 약으로 사용도 가능하고 보조제로도 만들 수 있거든요. 구하기 힘들어서 연구하기 힘들었는데···. 진짜 세계수님과 신농님을 만난 건 제 일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엘린이 헤실 거리면서 덧붙였다.

“아직 381년밖에 안 살았지만요.”

‘381년을 밖에’라니. 실소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농담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김서준의 귀를 사로잡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미트루트를 그렇게 다양한 곳에 사용할 수 있다고요?”

“네? 아, 네. 연구하면 더 쓰임새가 많을 거고요.”

김서준은 농부지 연구원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세계 작물에 대해서는 더더욱 문외한이다. 그에게 미트루트는 노움과 리노가 좋아하는 작물. 딱, 그 정도였다.

엘린은 그 지평을 넓히고 있는 셈.

‘아무래도 생각보다 도움받을 일이 많겠는데?’

김서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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