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엘린 브와일리
[세계수의 아래로 모든 세계의 자연이 모여 낙원을 이루리라.]
라이너스 대륙에 퍼진 오랜 전설 중 하나였다. 태생적으로 호기심과 탐구심이 뛰어났던 엘린 브와일리는 어린 나이에 이 전설에 매료되었다.
‘세계수를 꼭 찾겠어. 그래서 모든 세계의 자연을 탐구할 거야!’
어린 엘프는 성년이 되자마자 숲을 뛰쳐나왔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상을 떠돌았다.
그러길 281년.
3000년을 사는 엘프에게는 짧다면 짧고 길다며 긴 시간의 여정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게 세계수...”
금발을 늘어뜨린 엘프의 푸른 눈동자가 경의로 물들었다. 주체하지 못할 희열과 감동에 삐죽 튀어나온 귀가 움찔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어.”
그간 수도 없이 봐왔던 어중간한 신목(神木)과는 달랐다.
‘이토록 엄청난 생명력을 뿜어낼 수 있는 나무는 세계수밖에 없어.’
오죽하면 산이 모두 가을을 넘어 겨울로 향하는 동안, 이 일대만이 푸르른 녹림을 꾸리고 있겠는가.
쉽게 평점심을 잃지 않는 엘프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차오르는 환희와 감격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시는구나.”
엘프의 청력이 저 멀리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를 잡아냈다. 다급한 발걸음도 들린다.
‘역시나 오해하셨구나.’
세계수에 관해서는 많은 전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력했던 전설은 태양의 마력을 가진 신농이 세계수를 지킨다는 이야기였다.
‘가장 많은 고문서에 적혀있었어.’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실패를 겪은 탓에 의심이 커진 탓이었다.
‘게다가, 인간이라는 종족은 믿을 수 없으니까.’
고민 끝에 엘란은 신농보다는 세계수를 먼저 확인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 신농이 설치해둔 결계를 부숴버렸으니.
‘이건 내가 잘못했지.’
엘린은 어떤 말로 사과할지 고민하며 신농을 기다렸다.
그런데,
“저, 저건···?”
숲 위로 뛰어오른 무언가는 신농이 아니었다. 거대한 몸을 가진 하얀 늑대였다. 늑대의 파란 눈이 엘린을 발견한다.
입에는 삐쭉 나온 어금니. 꼬리에는 옅게 어린 회색 털. 그리고 이 엄청난 기세.
‘영물. 세상 모든 늑대의 우두머리, 에인션트 울프가 왜 여기?’
에인션트 울프는 혼자 새끼 드래곤도 사냥한다는 최강의 포식자였다. 그뿐인가. 눈앞에 생명체는 모두 사냥감으로 보는 흉포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도대체 왜 여기에···?’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 세계수를 발견했는데. 죽는 건가?’
허탈함을 느낄 새도 없이 공포가 밀려왔다. 머릿속에 ‘죽음’ 두 글자 외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컹!”
에인션트 울프의 피어가 울려 퍼졌다. 머릿속 공포가 극대화된다.
‘아···.’
엘린은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이걸 믿어야 해?’
김서준은 눈앞의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게임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비현실적인 외모와 머리 사이를 삐죽 튀어나온 귀가 눈을 사로잡는다.
‘진짜 엘프는 상상보다 더 대단하구나.’
예쁘다는 말로 표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건 그녀를 믿을 수 있는가였다. 결국, 이 사연 끝에 엘린이 요구한 사항이 문제였다.
“여기서 다양한 식물을 연구해도 되겠습니까?”
사연이 사실이라면 딱히 막을 이유는 없다. 무려 281년을 찾아 헤맸다는데 세계수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부탁을 못 받아줄까.
‘거기에 식물에 대해 많이 연구해봤겠지? 쉴드를 깰 정도면 마법에도 능하고.’
아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도 많을 터였다. 문제는 신뢰였다.
“....”
김서준이 리노를 바라봤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자기 옆에 앉아 있던 리노가 자신을 올려다본다.
‘...얘가 에인션트 울프라고?’
흉포하고 어쩌구 한 이야기가 가당키나 한가. 앞서 들은 이야기까지는 믿을 만했는데 마지막에 신뢰도가 확 사라진다.
‘그냥 거짓말하는 거 아냐?’
리노의 평소 성향은 물론이고, 아무리 신농의 눈으로 확인해도 에인션트 울프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거짓 사연에 기절도 연기였다? 진짜 목적은 세계수에 있다?’
물론 억지 의심이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수는 김서준에게 현재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아니던가. 작은 의심도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조금 과하지만 역시 요구해야 하나...’
상태창에 따르면 엘프는 고유 능력으로 ‘신뢰의 맹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남은 수명을 걸어 자신의 말의 믿음을 증명하는 맹세였다.
김서준이 고민하던 찰나, 엘린이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믿기 어려우시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신뢰의 맹세를 하겠습니다.”
김서준은 엘린을 바라봤다.
‘그런 경우가 있지. 다 건다고 허세를 부리는 녀석들. ’
그런 경우 김서준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그래요. 해보세요.”
“네?”
엘린이 당황한 듯 물었다.
“한번 해보시라고요. 그게 제일 깔끔할 거 같은데. 안 될까요?”
“아,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잠시 손을 좀...”
엘린이 섬섬옥수(纖纖玉手) 같은 손을 내밀었다. 김서준은 그 손을 맞잡았다.
“라이너스의 땅, 엘레니아 숲의 주민, 엘린이 대자연 앞에 맹세합니다. 지금부터 당신에게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초록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이내 빛이 사라지자 김서준의 눈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엘린에게 ‘신뢰의 맹세’를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엘프족 엘린은 당신에게 진실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말할 시 모든 힘을 잃고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대자연의 품이라니. 살벌하네.’
김서준이 메시지를 보고 엘린을 바라봤다. 엘린은 푸른 눈동자로 김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서준이 그제야 말했다.
“이런 맹세까지 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신농님. 상황을 이해합니다. 저야말로 오해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서로 사과를 나눈 찰나.
-꼬르륵.
엘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김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시죠.”
감자 요리나 찌개를 끓여주고 싶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걸릴 거 같아 패스. 꼬르륵 소리가 계속 나는 걸 보니 배가 많이 고픈 듯하여 패스한다.
‘가볍게 할 수 있는 요리로 해야겠네.’
넓적한 냄비에 물을 담아 인덕션 위에 올린 김서준은 냉장고로 향했다.
‘일단 있는 것들 위주로 내자.’
김서준은 마을 어른들이 주신 나물들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고사리 무침, 시금치 무침, 도라지 무침 등 5가지 반찬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김치통과 눈이 마주쳤다.
‘꺼낼까?’
꼬르륵 소리가 부끄러웠는지 살짝 얼굴이 붉어진 엘린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동양보다는 서양에 가까울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한국에 왔는데 김치를 안 내어줄 수는 없는 일. 김서준은 김향숙이 담궈 준 김치도 조금 꺼냈다.
‘고기는 좀 그렇겠지?’
김서준이 봤던 만화나 영화 속 엘프는 채식주의자였으니 말이다. 김서준은 삽겹살 대신 쪽파를 한 단 꺼냈다.
쪽파를 씻고 손질을 마치니 물이 보글보글 끓었다. 맛소금으로 살짝 간을 맞춘 후 손질한 쪽파를 뿌리부터 넣는다.
‘아래쪽이 더 늦게 익으니까 시간 맞춰서...’
잠시 후, 그릇 위에 돌돌 말린 쪽파 숙회가 완성되었다. 김서준은 초고추장과 함께 숙회를 내어주며 말했다.
“드세요.”
“와...”
형형색색의 채소 반찬을 보는 엘린의 눈이 반짝거렸다. 김서준은 마지막으로 밥 한 공기와 수저와 포크를 내주며 말했다.
“우리는 식사할 때 이걸 사용합니다. 혹시 사용할 줄 아나요?”
“네. 근데 이건 모르겠네요.”
의외였다. 엘린이 가리킨 건 포크였다. 김서준은 포크를 치우고 물도 한잔 따라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한 엘린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젓가락질 잘하는 엘프라니. 신기하네.’
김서준이 감탄하든 말든, 엘린의 눈은 오로지 식탁 위 나물에 향해있었다. 그녀는 신중하게 식탁을 살피더니 이내 고사리로 가장 먼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 삼키고 경직된 얼굴로 고사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마, 맛있어요! 이거 고사리라는 식물 맞죠?”
“아, 네. 라이너스 대륙에는 고사리가 없나요?”
“여기 있는 식물 다 책에서만 봤던 식물이에요. 근데 책에 나와 있던 거보다 훨씬 맛있네요. 식감도 특이하고.”
“책에 만요? 그럼 실제로는 없어요?”
“네. 라이너스 대륙에서는 모두 사라지거나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식물입니다. 아 콩나물은 빼고요.”
‘멸종됐다는 건가?’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그녀는 다음 반찬으로 젓가락을 옮겼다.
“이 시금치라는 건 단맛이 나네요! 정말 맛있습니다!”
“이건 도라지라는 겁니까? 쓴맛이 살짝 나지만 향이 너무 좋아요!”
먹는 족족 감탄이 터져 나온다.
‘나물을 먹고 감탄하는 엘프라니. 진짜 상상도 못했던 일이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재밌다. 한국의 음식이 인정받는 거 같아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이제 마지막은 김서준이 직접 만든 쪽파 숙회 차례. 김서준이 은근 긴장한다. 엘린은 반짝이는 눈으로 초장도 안 찍은 쪽파를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와, 이건 뭐예요? 살짝 아삭하면서도 단맛도 나고 향긋한 맛도 나는 게, 너무 맛있어요!”
유달리 큰 감탄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다행이야.’
김서준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쪽파를 물에 살짝 데친 겁니다.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쪽파라. 로레일이랑 비슷하다더니, 로레일보다 훨씬 맛도 좋고 향긋하네요!”
로레일? 라이너스 대륙의 작물인가. 김서준은 적당히 받아들이며 맛있게 먹는 엘린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근데 왜 밥을 안먹지?’
김서준이 의문을 가진 순간, 엘린이 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몰라서 안 먹은 거였나. 한식에 밥을 빼먹으면 안 되지.
“이건 밥입니다. 쌀에 적당히 물을 넣고 가열해서 만든 겁니다. 우리는 그걸 반찬과 함께 먹습니다.”
“빵과 비슷한 거군요. 근데 쌀이라... 그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나중에 실물을 볼 수 있겠습니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김서준은 외국에서 놀러 온 친구를 대접하는 기분이었다.
‘근데 약간 식물 덕후 기질이 있는...’
하긴 이 세계도 외국이지. 김서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가, 감사합니다!! 그럼...”
엘린이 그러고는 밥 한 톨을 젓가락으로 집는다. 김서준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건 숟가락으로 떠드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밥에 대한 엘린의 감상평도 역시나 호평 일색. 가벼운 식사를 그녀는 최고급 한정식이라도 먹는 듯이 계속 감탄하며 먹었다.
‘잘먹어서 다행이네.’
반쯤 안심하던 김서준이 물었다.
“근데 이 세계에는 어떻게 온 거예요? 돌아갈 수는 있는 거예요?”
“저도 모르겠어요.”
“네? 몰라요? 그럼 어떻게 왔어요?”
“세계수로 연결된다는 던전이 있었어요. 거길 탐사하다가 골렘을 만났거든요. 겨우 도망쳐서 던전을 나왔더니 이 세계더라고요. 골렘도 같이 넘어왔고요.”
“그때 같이 왔어요?”
“네. 그 일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닙니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요.”
예상은 했지만, 엘린의 말을 들으니 확신이 생긴다. 리노도 그렇고 게이트 없이 넘어오는 이 세계 존재들은 세계수의 영향이 확실해 보였다.
‘이건 큰일이야.’
리노나 엘린 같은 존재라면 몰라도 스톤 골렘 같은 게 또 튀어나온다면 큰 문제였다.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잠깐만...’
순간 밥을 먹는 엘린이 눈에 들어왔다.
“엘린님. 그러면 돌아가는 방법도 몰라요?”
“네. 모릅니다.”
“그러면 연구는 어떻게 하시게요?”
“당연히 여기 살면서 하려고 합니다.”
“집은요?”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나무로 집 만드는 건 이제 잘하거든요.”
“....”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엘프가 나무로 집을 짓고 산다니.’
당연히 가능할 리 없다. 엘프라는 걸 들키는 순간 관리국에 잡혀갈 게 뻔했다. 헌터관리국 입장에 몬스터나 리노나, 엘프나 이계 존재인 건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김서준이 고민에 잠겼을 때,
“앗!”
엘린이 갑자기 소리쳤다.
“왜 그래요?”
“너무 매운데, 혹시 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차분한 대답과 달리 엘린의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묘한 부조화가 은근히 귀엽다. 김서준이 물을 건넸다.
물을 받아든 그녀가 매운 와중에도 웃음을 짓는다. 비현실적인 외모가 진풍경이다. 진풍경이긴 한데...
“하...”
김서준의 한숨에도 엘린은 입안을 식히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