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런 것도 가능한데.
김서준이 임종철의 집에 가거나, 아침 조깅을 할 때면 항상 지나가는 집이 있었다. 푸른색 지붕을 가진 낡은 집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다.
집 뒤로는 농지도 있었지만, 역시나 방치되어 잡초로 가득 차 있었다. 매번 지나갈 때마다 김서준은 그 땅이 참 아깝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제 이게 내 땅이 됐네···.”
정 회장은 선물이라며 천 평가량의 땅을 사줬다.
“왜 이렇게 큰 선물을···.”
“회장님께서는 좋은 농부가 더 마음껏 농사를 짓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김서준은 그 말이 어느 정도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천 평을 주는 대신 구두를 나눈 약속을 문서화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조건을 걸지도 않았으니까.’
굳이 따지면 서둘러 거래했으면 좋겠다는 뇌물이랄까.
‘그나저나 정말 시의적절하시네.’
노움의 말에 따르면 ‘사비오’는 아주 특별한 작물이었다.
“사비오는 자기가 가진 땅의 크기만큼 뿌리를 뻗습니다움!”
옆에 작물이 없으면 없을수록 더 넓게 뿌리를 뻗고 더 굵은 줄기를 만들며 더 높게 자랄 수 있다고 했다.
‘노움의 묘사는 거의 동화 속 그 콩나무 같았지.’
마치 탑처럼 높게 높게 자랄 수 있고 실제로 나무에 현자들이 살기도 했다고 한다는데···.
김서준으로서는 너무 동화 같은 이야기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여하튼 잘 됐어.’
김서준은 황금 트랙터로 개간을 마친 땅을 바라봤다.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한 땅과 적당히 좋은 색과 향을 가진 흙은 뭘 심어도 잘 자라날 거 같았다.
“노움 근데 정말 이 땅을 다 써야 하는 거야? 너무 넓지 않을까?”
“아닙니다움! 사비오가 꽃을 피우려면 이 정도는 뿌리를 뻗어야 합니다움.”
노움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노움이 하는 말이기에 김서준은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이제 심어볼까?”
“알겠습니다움. 다들···.”
“잠깐만.”
김서준이 움들을 부르려는 노움을 멈춰 세웠다.
“움들 불러서 땅 파려고 하는 거지?”
“그렇습니다움. 엄청 깊게 파야 해서 혼자 하려면 오래 걸립니다움.”
“내가 할게.”
김서준이 씩 웃었다. 리노와 노움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한 김서준은 지긋이 다시 눈을 감았다.
‘케레스의 농기구 소환할 농기구는···.’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린다.
무한궤도 형의 바퀴. 그 위에 360도로 돌아가는 몸. 그리고 기린의 목처럼 뻗다가도 팔처럼 자유롭게 굽어지는 핸들.
‘그리고 굴착기의 상징 버킷!’
머릿속 그림이 완성되는 것과 함께 황금색 빛이 방출되었다. 허공에서 모인 빛이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 대박 입니다움!!!”
“멍멍!!!”
리노와 노움이 방방 뛰며 눈을 반짝였다. 김서준도 스르륵 눈을 떴다.
황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대형 굴착기가 위용을 드러냈다.
“역시 되는구나!!!”
김서준도 이번만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트랙터를 처음 소환했을 때와 같은 전율이 온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움! 이게 무엇입니까움?”
“이건 굴착기라는 거야. 땅 팔 때 쓰는 거거든. 둘 다 위험하니까 뒤로 가봐.”
“멍!”
짜릿한 흥분은 김서준을 어서 운전석으로 들어가라며 재촉했다. 자리에 앉으니 더욱 흥분된다. 김서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한껏 기대를 품은 둘은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저 정도면 거리는 충분하네. 그럼 시작해볼까?’
김서준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조종법을 따라 레버를 움직였다.
그러자 핸들과 버킷이 조작에 따라 움찔거린다. 몸체도 괜히 한 바퀴 돌려보고 앞뒤로도 움직여 본다. 트랙터 때처럼 한두 번 까딱거리니 금세 몸이 조작법에 적응한다.
‘대단해. 그리고 재밌어.’
트랙터는 멋지지만, 차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면 굴착기는 매우 다른 영역이었다. 조작할 것도 많고 훨씬 역동적이니 보는 맛도 조작하는 맛도 훨씬 더 있었다.
‘자주 쓸 일이 없어서 아쉽겠어.’
김서준은 살짝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굴착기로 땅을 크게 한 버킷 떠냈다. 이내 거침없이 땅을 파내는 버킷.
“어, 엄청납니다움!!!”
“멍멍!!”
노움과 리노가 격하게 놀라며 환호했다. 김서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릴 때 내 모습 같네.’
김서준이 흐뭇하게 웃으며 둘을 바라보던 그때, 저 멀리 무언가 작은 인영(人影)이 보였다.
“저게 뭐지?”
공중에 나타난 작은 인영은 빠르게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설마?”
김서준이 설마 하는 사이 파공음이 울리며 인영은 빠르게 밭에 착지했다. 순간 밭에 돌풍이 일었다.
휘날리던 갈색 머리가 착 가라앉았다. 이내,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설마가 맞았다.
“전소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어제 전화를 걸었던 주인공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서 물었다.
“김서준?”
****
“아무도 없네.”
고속도로를 내달려 어제 김서준이 알려준 주소로 내려온 전소민은 집 앞에 적당한 곳에 차를 댔다.
“좀 기다릴까.”
갑자기 찾아온 자신이 김서준의 일정을 방해할까 전소민은 차 안에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다시 하얀색 차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그때, 엄청난 힘이 뒤에서 느껴졌다.
“저건···?”
얼핏 해가 하나 더 떴다고 오해할만한 황금빛 마력 덩어리가 눈에 보였다.
전소민은 바로 땅을 박찼다. 허공 답보로 공중을 내달린 그녀는 금세 빛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굴착기?’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건 웬 황금색 굴착기 한 대. 그리고 초록색 난쟁이 모자를 쓴 꼬마와 귀여운 강아지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까 그 힘은 어디로 간 거야?’
의구심과 함께 전소민이 밭에 착지했다.
-철컥.
순간 굴착기의 문이 열리고 그토록 그리웠던 친구의 얼굴이 나타났다.
“전소민?”
“김서준? 네가 왜 거기서···?”
“어? 일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저녁때쯤 천천히 올 줄 알았더니.”
김서준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시간은 이제 9시.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내려온 마음이 들킨 거 같았다. 양 볼이 살짝 화끈거리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전소민이 말했다.
“아, 아니. 그냥 낮 되면 길 막힐까 봐. 근데 여기 무슨 일 없었어? 이 위에 엄청난 힘 덩어리가 있었는데···.”
“아,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날아왔구나. 걱정하지 마.”
김서준이 타고 있던 굴착기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
“응. 내가 이거 소환하는 걸 본 걸 거야.”
“뭐? 굴착기를 소환했다고···?”
“응. 나 전직했거든. 신농(神農)으로.”
신농. 당연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직업이었다.
전소민은 김서준에게 하던 일을 먼저 마무리하기를 권유했다. 김서준은 멀리서 온 친구를 그냥 둘 수 없다며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전소민의 만류에 결국 작업을 이어갔다.
전소민은 밭 사이로 잘 포장된 도로에 걸터앉았다.
황금색 굴착기가 다시 움직인다. 거침없이 땅을 파낸다. 그 모습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
‘서준이가 저런 재주가 있었나.’
어릴 적부터 거의 평생을 봐왔건만 저런 재주가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아니, 신농의 능력인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옆에 있는 밭에 있는 정령들을 보면 농기계 조작 방법쯤 스킬로 얻었다 한들 이상할 건 아니었다.
‘저게 정령이 다 몇 마리야?’
일반적인 정령사는 대부분이 하나, 많아 셋 정도의 정령을 다루는 게 다였다.
‘근데 저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잖아.’
눈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글바글하다. 게다가 그 정령들이 아주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저 위에 있는 정령의 지휘를 따르는 거 같지?’
저 정도면 정령 군단이라 불러도 될 법했다.
‘과연 신의 축복을 받은 직업 답네. 전투 직렬이 아니라 등급을 매기진 못하겠지만, 마력만큼은 S급 수준이려나. 아니, 이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
맞다.
어차피 다시 헌터 일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김서준에게 전투 등급을 매기는 건 무의미했다.
‘중요한 건 서준이의 표정이지.’
김서준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어 행복해 보였다. 표정뿐이 아니라 여기서 넘치는 기운이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전과는 달랐어.’
예전에는 좀 더 날이 서 있었다. 언제든 살짝 긴장과 경계를 하는 듯한 면이 있었다. 좋은 일이 있어도 걱정을 뒤에 안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까 인사는···. 너무나도 순수하게 반가운 모습이었어.’
그런 인사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전소민이 결국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인데 휴가까지 와서 한숨을 쉬어?”
상념에 빠진 사이 김서준이 작업을 마치고 올라왔다.
“어, 아니야. 아무것도.”
김서준이 전소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긋 웃는 김서준의 얼굴이 역시나 훨씬 좋아 보였다.
‘뭔가 더 잘생겨진 거 같기도 하고···.’
“왜 그렇게 빤히 봐? 못 본 새 뭐가 좀 달라졌어? 밖에서 일해서 좀 탔나?”
“아, 아냐. 근데 얘는 누구야? 귀엽다!”
“아. 얘?”
김서준이 전소민의 시선을 붙잡은 리노를 쓰다듬었다. 리노는 좋다는 듯 웃으며 몸을 비볐다.
“얘는 리노야. 리노야 인사해.”
“멍!”
“뭐야? 얘 네 말을 알아듣는 거 같은데?”
“비밀인데, 사실 리노랑 나는 텔레파시로 대화하거든.”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역시 안 믿나.’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아이러니에 김서준은 속으로 웃었다.
“근데 진짜 귀엽다. 얘는 종이 뭐야?”
“잘 모르겠어. 분양받은 게 아니고 주운 거거든.”
“주웠어?”
“다리를 다친 걸 산에서 발견해서 치료해줬더니 그때부터 따라다니네.”
“이렇게 귀여운 애를? 진짜 너무하네.”
전소민은 안타까운 듯 리노를 품에 안았다. 리노는 전소민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너무 귀엽다. 리노. 손.”
곧장 손을 올려놓는 리노. 그런 리노에 전소민은 바로 빠진 듯했다. 그 모습을 보던 김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고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셨나?”
“고민? 고민 없어.”
“표정에 걱정이 가득한데?”
전소민이 살짝 입술을 들썩거렸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냐, 진짜 고민 없어. 이번엔 정말 너도 보고 오랜만에 고향 공기 마시면서 쉬러 온 거야.”
김서준은 찰나에 그 모든 눈짓 몸짓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무슨 비밀이야. 편하게 이야기해.”
“아, 아니거든! 그나저나 여기 진짜 많이 변했다. 그때 이후로 처음인데. 그 사이 마을이 더 한산해진 거 같네.”
“흠···.”
“아이, 진짜 아니라고.”
전소민이 소리치자 그제야 김서준은 의심의 눈을 거뒀다.
“근데 저거 진짜 네가 소환한 거야?”
“아, 저 굴착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칼이나 창, 방패 같은 걸 소환하는 걸 봤어도 저건 좀···. 그렇잖아?”
“그런가?”
전소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려고 그런 거면 말해도 돼. 나 입 무거운 거 알잖아.”
“흠···. 사실은 말이야.”
“응. 그래, 편하게 말해봐.”
김서준이 뜸 들이며 손을 움직였다.
“어?”
“저것만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쾅!
밭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전소민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바람이 일며 흙먼지가 일었다. 그 먼지 속에서 황금빛 트랙터가 당당한 위용을 드러냈다.
“이런 것도 가능한데. 어때?”
“....말도 안 돼!”
전소민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