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버지는 아니었다(1)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가 금산마을의 아침을 깨운다. 촉촉한 비를 머금은 땅 위로. 옅은 안개가 양탄자처럼 깔린 모습에 조용한 마을이 더욱 고요해 보인다.
“으으으!”
창을 열며 기지개를 켠 김서준은 잠시 멈춰서 풍경을 바라봤다.
‘진짜 좋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러자 흙내음과 함께 자연의 싱그러움이 몸 안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좀 더 즐기고 싶지만, 얼른 가야지.’
오늘 아침 산책은 특별했다.
‘노움이 기대하고 있겠지?’
노움은 리노와 김서준이 둘이서 산책하는 걸 부러워했다.
‘리노를 좀 질투하는 거 같기도 했지.’
그래서 오늘부터는 노움과 함께 산책하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을 노움을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했다.
“멍!”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현관문을 열자 리노가 반갑게 맞이한다.
“잘 잤어?”
꼬리를 격렬히 좌우로 흔드는 리노의 머리를 김서준은 가볍게 토닥였다. 조금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리노는 좋다는 듯 몸을 비볐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불러볼까?”
“멍멍!!”
‘소환. 노움.’
김서준이 손을 뻗고 속으로 되뇌었다.
땅에서부터 초록색 빛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내 구체를 이룬 빛은 공중으로 떠올라 김서준의 앞에 멈춰 섰다.
“좋은 아침입니다움!”
빛이 사라지고 초록색 모자를 쓴 노움이 등장과 동시에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래. 좋은 아침이야. 산책할 준비 됐지?”
“물론입니다움!!”
결기에 찬 대답과 함께 노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과연 저게 산책가는 정령의 표정인가 싶을 정도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움!”
“화이팅!”
“멍!”
둘의 응원을 받은 노움이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이내 두 발이 땅에 닿는다.
‘진짜 신기하네.’
신중한 착지. 긴장한 얼굴. 크게 ‘-후’하고 뱉는 안도의 한숨까지. 정말 걷는 법을 잊은 이가 재활운동을 하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노움은 얼마나 오래 산 거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움’ 시절 이후 땅을 걸어본 적이 없다는 노움의 말은 진실인 게 분명했다.
노움이 비틀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걸음걸이는 금세 좋아진다. 펭귄처럼 살짝 뒤뚱거리는 건 다리가 짧은 탓인 듯했다.
“다행히 몸이 걷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움! 준비 완료입니다!”
“그냥 날아서 해도 되는 데···.”
“안 됩니다움! 산책은 걸어야 산책입니다움!”
노움이 김서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리노가 진지하게 대답하는 노움의 얼굴을 핥았다.
“리노 공. 하지 마라움~.”
진지하던 노움의 얼굴에 미소가 핀다.
‘귀엽네.’
어린 조카 둘을 보는 기분에 김서준의 입꼬리가 절로 위로 올라갔다.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던 김서준이 이내 말했다.
“그래. 자, 그럼 가볼까?”
“멍!”
“움!”
대문을 박차고 나온 그들의 산책로는 평소와는 달랐다.
보통이라면 김서준의 밭을 거닌 후 마을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와 세계수나 아버지의 묘로 향한다.
그러나 오늘은 곧장 세계수로 향했다.
‘황금 꽃봉오리부터 확인해야지.’
세계수의 선물이라니.
‘어떤 선물을 주려나. 또 다른 정령? 아니면 신화 급 아이템이라도 주려나?’
어렸을 적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던 날로 돌아간 듯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조바심이 일었다.
세계수로 가는 언덕에 이르렀을 무렵. 어느새 노움은 리노의 등에 타고 있었다.
“제가 힘들다고 했더니 리노 공이 태워줬습니다움!”
“그, 그래? 힘들었어?”
노움이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집과 언덕은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닿을 거리이건만.
‘운동 부족인가? 아니면 새를 걸어 다니게 하면 힘들어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연유가 무엇이든, 아무래도 노움에게 걷는 건 날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체력 소모가 큰 듯했다.
‘상관없지. 꼭 걸어 다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노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움.”
“아냐. 각자 잘하는 게 있는 거지. 리노가 잘 챙겨줘.”
“멍!”
“고맙다움.”
다시 표정이 밝아지는 노움. 김서준은 저 밝은 성격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얼마 안 가 셋은 세계수에 도착했다. 김서준은 도착하자마자 세계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하나 상처는커녕 낙엽 한 장 없는 생기 넘치는 모습은 여전했다. 울타리나 설치해둔 보안용 장치들도 멀쩡했다.
“오늘도 별일 없었나 보네. 다행이다.”
세계수에게 안부를 확인한 김서준이 뭔가 허전해 뒤를 돌아봤다.
“음?”
바로 뒤에 따라오던 노움과 리노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시야를 넓힌다.
“잘 자란다움.”
“멍.”
축복받은 송이버섯이 자라는 터전 앞에서 귀여운 뒤태들이 발견된다.
‘먹는 게 그렇게 좋을까.’
김서준이 웃으며 살짝 빙 돌아 둘의 측면에 자리를 잡았다.
리노와 노움이 송이버섯을 바라보며 함께 군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축복받은 송이버섯을 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역시 이건 어쩔 수 없네.’
김서준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쉽게도 카메라는 둘의 귀여움을 온전히 담지 못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랴.
김서준이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찰칵.
“움?”
“멍?”
둘이 놀라 쳐다본다.
이 모습도 귀엽네. 김서준은 바로 한 번 더 셔터를 눌렀다. 한 번 더 이어지는 ‘찰칵’ 소리에, 이제는 익숙한 리노와 달리 노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농님! 그게 무엇 입니까움?”
김서준이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
“어때? 잘 나왔지?”
“이건 노움입니다움! 물에 비춰보는 것보다 훨씬 선명합니다움! 리노 공도 있습니다움! 와, 완전 신기합니다움! 신농님은 이런 능력도 있는 겁니까움? 대단합니다움!”
“하하, 아냐. 이건 사진이라는 건데. 보고 있는 현실을 그림처럼 저장하는 거야. 내가 한 게 아니고 이 기계가 하는 거야.”
“오오, 신기합니다움!”
노움은 흥분하며 사진을 더 찍어달라고 졸랐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찍어줄 걸 그랬네. 몇 장은 인화해서 선물로 줘야겠다.’
몇 장 더 좋은 사진을 건진 후, 김서준은 다시 세계수로 돌아왔다.
“리노는 여기 있어. 안에 내가 장치해둔 게 있거든. 노움은 날아서 따라오고.”
“알겠습니다움!”
“멍!”
김서준은 설치해둔 쉴드 발생기를 원격 조정으로 껐다.
-위잉.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막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김서준은 울타리를 훌쩍 넘었다. 푸른 잔디 사이로 힐끔힐끔 보이는 보안 장치를 피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이내 세계수의 코앞.
“노움 여기에 손만 대면 되는 거야?”
김서준이 세계수의 이파리 사이 자라난 황금색 꽃봉오리를 보며 말했다.
“맞습니다움! 조심스럽게 손만 대시면 됩니다움!”
-꿀꺽.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킨 서준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손을 꽃봉오리에 가져갔다.
“음. 아무 일도···.”
[안녕!!]
아련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김서준의 눈앞이 하얘졌다.
****
눈을 감고 있는 김서준의 얼굴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부딪혔다. 김서준은 간질거림에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가장 먼저 보인 건 푸른 하늘. 그림으로 그린 듯한 파란 하늘에 고래, 돼지 등 동물을 닮은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신기하군. 어릴 적에 꿈에서 본 하늘 같아.’
“안녕!”
순간, 앳된 소녀의 얼굴이 불쑥 하늘을 가리고 튀어나온다.
“누구?”
“일어나! 잘 시간 아냐!”
작은 소녀는 대답 대신 김서준에게 일어나라 보챘다.
김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파란 하늘 아래에는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서준! 드디어 만났네!”
그 한가운데, 금발 머리에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너무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드디어 만났다고? 내가 아는 사람인가?’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는 사람 중 이렇게 어린 소녀가 없었다.
‘근데도 왜 이렇게 친밀하게 느껴져. 설마...’
“...세계수?”
“역시 알아봐 주는구나! 히히.”
세계수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꼬마 소녀였다.
‘설마 세계수가 이런 이미지일 줄이야.’
세계수라면 좀 더 세상에 초탈하고 현자 같은 느낌이라 생각했건만.
명절에 시골집 가면 있을 법한 밝고 착한 조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근데 여긴 어디야?”
“여긴 서준을 만나기 위해 만든 공간이야. 아직 밖에서는 이렇게 돌아다닐 수가 없거든. 게다가 서준이 아직 밖에서 나랑 이야기할 정도로 자연과 많이 소통해보지 않았잖아.”
‘자연과의 소통이라면 농사를 말하는 건가.’
김서준은 노움이 말했던 땅과 호흡하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긴, 이제 시작이니까. 아직 부족했지.”
“맞아. 서준은 이제 시작! 나도 이제 시작! 히히.”
세계수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자, 어쨌든 서준은 내 시험을 통과하러 온 거지?”
“맞아.”
“좋아! 그럼 이거 받아!”
세계수가 손을 뻗었다. 반짝거리는 작은 물체가 그녀의 손으로부터 천천히 날아왔다.손바닥에 내려앉는 작은 물체. 김서준은 그 물체를 확인했다.
“이건?”
여러 종류의 씨앗이었다. 세계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이곳에 살아가던 아이들이야. 하지만 이제 자리를 잃어가고 있어. 아이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져가는 것에 슬퍼하고 무서워하고 있어. 서준이 이 아이들을 지켜줄 수 없을까?”
김서준은 씨앗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형형색색에 크기도 모양도 다른 씨앗들.
‘모양만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하네.’
김서준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다 토종작물들이지? 얘는 개구리참외고? 이건 삼동파. 노랑 당근도 있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기서는 능력도 못 쓸 텐데!”
“당연하지. 내가 이번에 키울 작물들인걸?”
“이 아이들을?”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은 세계수가 말했다.
“역시! 내 마음을 알았구나! 역시 서준은 달라! 최고의 신농이야!”
‘그런 건 아닌데...’
김서준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던 세계수가 순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힘이 다했어...”
“벌써?”
“웅. 다시 힘을 비축해야 해. 서준, 부탁이 있어. 앞으로도 매일 와서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 해주면 안 될까? 리노랑 노움도 함께 말이야.”
“물론이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힘든 일도 아니고 세계수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지 않았던가.
‘매일 상태도 확인해야 하니까.’
부탁하지 않아도 매일 자발적으로 했으리라.
“그리고 하나 더 부탁이 있어. 나에게도 이름을 지어줄래?”
“이름? 이름이 없는 거야?”
“응. 모두가 날 세계수라고만 불렀어. 이렇게 친근하게 말하는 건 서준이 처음이야.”
“그래? 하긴 우리 아버지 성격이면 그럴만하지.”
“아버지? 서준의 아버지가 누군데?”
놀란 김서준의 양 눈썹이 위로 들썩였다.
“우리 아버지를 몰라? 네가 전에 불타기 전까지 돌봐주셨던 분 말이야.”
세계수가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불타? 나는 500년 만에 이제 일어났는걸?”
“...500년 만이라고?”
“웅. 500년 동안 자다가 이제 깨어났어! 그리고 서준하고 만난 거야!”
“그럼 여기 있던 나무는...?”
“...?”
세계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김서준을 빤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