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19화 (19/139)

19. 진심에 투자하기로.

"혹시 정 회장님 아녀?"

"음?"

정 회장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임종철 명인님 아닙니까?"

"정 회장님, 맞는구먼. 오랜만이여. 잘 지내셨는가?"

정 회장의 반응을 본 비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물러났다. 그러자 임종철이 앞으로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며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아니, 근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하하. 여기가 내가 사는 마을이구먼."

“은퇴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아직도 이곳에 계시는지는 몰랐습니다.”

“고향을 두고 어딜 가겠나. 그냥 농사만 접고 여유롭게 살고 있네. 회장님이야말로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아주 좋은 감자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임종철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좋은 농장 찾아서 손잡는 일은 여전히 하나 보구먼.”

“물론 입니다. 이제는 단순한 납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일류 농부들을 찾고 지원하기 위해서요. 물론 아직 명인님만 한 농부는 못 찾았지만요.”

“하하. 그 아부 실력은 여전하구먼.”

임종철이 껄껄 웃었다.

“여기 밭의 주인이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명인님을 만날지는 몰랐네요. 알아본 바로는 땅 주인이 젊다던데. 혹시, 명인님의 자식 중에···.”

“아녀. 하지만 아들 같은 놈이지. 잠시만 기다리게. 서준아!”

가볍게 흙을 털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김서준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김서준은 다가가며 꾀죄죄한 옷을 입은 남자를 살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구였지?’

얼굴은 낯이 익었다. 타고 온 차량에 기사를 보면 분명 신문에서 봤을 게 틀림없는데, 딱 떠오르지 않았다.

“서준아. 인사해라. 일월 그룹 정 회장님이시다.”

‘일월 그룹! 아 그 회장님이 이분이셨구나!’

김서준은 그제야 눈앞의 노인에 대해 떠올렸다. 길드를 운영하던 시절, 후원자를 제의했던 그룹 중 하나였다.

‘재계 10위권의 탄탄한 기업이었지.’

특히, IW 플라자와 아웃렛에 강했던 게 인상 깊은 기업이었다.

‘근데 그런 기업 회장님이 여길 왜 오신 거지?’

김서준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서준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IW 그룹의 정영준일세.”

인사하는 둘을 보던 임종철이 말했다.

“이 친구가 자네가 찾던 그 농부구먼.”

****

심리학에선 사람의 첫인상이 3초면 결정된다고 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는다. 다만, 정영준만큼의 나이가 쌓이면 좀 더 많은 게 보인다.

인상 속에 숨은 그 사람의 관록, 경험, 분위기 등.

정영준은 그러한 걸 모아 기세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를 즐겼다.

‘이 친구. 젊은 나이답지 않은 기세를 지녔군.’

악수를 할 때부터 그랬다.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태도. 적절한 어투와 슬쩍 자신을 파악하는 듯한 모습이 그러했다.

‘30대 초반이라고 하기엔 기세가 남다르군. 꽤 치열하게 살았던 건가.’

하긴, 그랬으니 이 어린 나이에 명인에 버금가는 감자를 재배하고 명인에게 인정받았으리라.

‘작물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만 잘못돼도 계약마저 파기하는 저 괴짜에게 말이지.’

“이거 드세요.”

김서준이 갓 내린 커피를 내밀었다.

“고맙네.”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밭을 둘러본 후, 두 사람은 김서준의 집으로 왔다. 임종철은 사업상 이야기일 게 뻔했으므로, 눈치껏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밭 상태가 상당히 좋더군.”

“감사합니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 많이 부족합니다.”

“겸손할 필요 없네. 비록 농부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많은 농부를 봐왔다고 자부하네. 흙 색깔이나 밭에서 나는 향만 맡아봐도 알 수 있지. 관리가 아주 잘 된 땅이야.”

신농의 땅은 임종철마저 감탄해 마지않은 땅이 아니던가. 땅이 좋다는 건 익히 알던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 입으로 확인받으니 기분 좋네.’

김서준이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피차 시간 낭비 없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네의 감자를 사고 싶네.”

밭을 세심하게 둘러보는 모습을 볼 때부터 예상했던 대로의 용건이 정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김서준도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대답 전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하게.”

“감자를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자네 감자를 먹어봤어. 맛있더군. 임종철 명인의 감자 이후로 그런 깊이 있는 맛은 처음이었지. 거기에 자네 감자 말이야. 묘하게 그 맛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 먹는 순간 시골과 그리운 정취가 떠오르는 그런 무언가가 말이지. 그런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네.”

정 회장은 그때의 기분을 회상하는 듯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생각했지. 이 감자는 더 많은 사람에게 팔아야 한다고 말이야. 자네 ‘하늘 농원’을 아는가?”

“IW 그룹의 백화점에서만 파는 프리미엄 농작물 브랜드라고 알고 있습니다.”

김서준이 과거에 조사했던 기억을 떠올려 대답했다. 정 회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네. 우리는 이 브랜드로 그런 좋은 작물이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 자네 감자도 같은 방식으로 지원하고 싶네.”

‘하늘 농원이라···.’

좋은 사업이긴 했다. 농산물은 소위 가격 후려치기가 심하다. 유통과정의 문제 때문이다.

김서준이 모두와 직거래를 맺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가격을 받기 위해서 말이지.’

하늘 농원은 이런 계약을 제대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과 맺고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게 하는 좋은 사업이었다.

‘동시에 전국 백화점에 유통해서 엄청난 수익을 낼 기회지.’

정 회장은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아니, 원하면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겠네. 자네 감자는 그 정도 가치가 있으니까. 어떤가?”

김서준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계약은 어려울 거 같습니다.”

-탁.

정 회장은 들어 올리던 커피잔을 가볍게 내려놓고 물었다.

“정말인가?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일지 알 텐데?”

“알고 있습니다.”

“근데도 안 하겠다는 건가?”

“사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모든 수량에 대해 계약을 끝마쳤습니다. 더는 팔 수량이 없습니다.”

김서준의 대답이 정 회장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킨 후 말했다.

“하긴, 자네 밭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 걱정하지 말게.”

“네?”

“땅은 우리가 대지. 유통이나 필요한 게 있다면 지원하지. 자네는 농사만 지을 수 있게 전부 지원하겠네. 프리미엄 작물이니 5천 평 정도면 되겠는가? 아니면 1만 평을 지원할 테니 다른 작물도 키워도 좋고.”

농사 규모 1만 평부터는 대규모 농업으로 통한다. 그 정도로 1만 평은 엄청난 규모였다.

‘물론 이런 외진 지역의 땅을 매입하는 거니, 기업 입장에서 큰 투자는 아니겠지.’

그래도 엄청난 제안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어쩌면 정 회장으로서 제안하는 최고의 대우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감자가 그 정도인가.’

자기 자식들이 인정받은 거 같아 김서준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1만 평 규모로 펼쳐진 자신의 밭을 떠올렸다.

‘멋지긴 하겠지만···.’

김서준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장님. 제안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역시 어려울 거 같습니다.”

‘계약하는 순간 많은 게 달라지겠지.’

당연했다. 상대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사업가, 그중에서도 가장 수완이 좋은 사업가 중 하나가 아닌가.

‘많은 걸 준다는 건 많은 걸 받아가겠다는 소리겠지.’

작게는 납품 기일에 맞춰 작물 재배를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출에 대한 걱정, 정해준 작물을 키우는 등등.

많은 걸 받음으로써 을이 된 자신은 그걸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할 게 뻔했다.

‘물론 대박이 날 수도 있겠지. 아니, 지금 이 능력이라면 대박이 나겠지. 하지만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잘 하고도 내일이 불안하고.

스트레스 속에서도 아닌 척하고.

열등감과 경쟁 속에 점점 말라 죽어가는 듯한 그날로 순식간에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농사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서툽니다. 지금 이렇게 대규모로 농사를 지으면 분명 지금과 같은 감자를 재배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좀 더 스스로에 자신이 생겼을 때 계약하고 싶습니다.”

‘곧이곧대로 다 말할 수는 없지. 반쯤 진심이기도 하고.’

김서준이 적당히 둘러댔다.

“그렇군. 그런 연유라면야···.”

정 회장의 얼굴에 일순간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아쉽게 되었군. 이런 감자를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억지를 부릴 수는 없지. 좋은 작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농부의 마음도 편안해야 하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이렇게 약속하지. 혹시라도 팔고 싶은 생각이 들면 꼭 우리에게 연락을 주는 거로 말이야. 감자가 아니더라도 좋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부탁이 하나 더 있네.”

정 회장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한 김서준의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

정 회장이 남은 커피를 모두 들이켜고는 말했다.

“나랑 따로 계약을 하나 하지. 납품 장소는 우리 집일세.”

****

“안타깝게 됐군.”

돌아가는 차 안. 정 회장이 사뭇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계약을 안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태 제시한 조건 중 가장 좋은 조건이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뭐,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야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안에 퍼지는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 문뜩, 정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말이야. 나도 이런 시골에 살았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농부셨어.”

“그러셨습니까?”

“그랬지.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지. 농부라는 게 참 힘들다는 걸. 어느 날은 어렵게 진 농산물을 다 갈아엎기도 하고. 풍년이 나도 가격이 내려갈까 마냥 웃을 수 없는 게 농부지.”

정 회장은 우수에 젖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꾸준히 온 정성을 쏟아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있어.”

“임종철 명인처럼 말입니까?”

“그래. 부모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런 농부들이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하늘 농원은 아직도 직접 관리하시는 거군요.”

“그래. 그건 내 숙원이니까 말이야.”

정 회장은 좀 전의 김서준을 떠올렸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그의 감자를 사기 위해 들렀다 거절당한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저런 대답을 할 줄이야. 순간 명인님이 겹쳐졌어.’

정 회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래서 말이야. 그 청년 집 주변에 땅 천 평만 사들여서 선물로 보내주게.”

“...선물로 말입니까?”

“방금 그 청년이 딱 그런 농부였네. 진심인 농부. 그럼 나도 보여줘야지 않겠나? 진심이라는 걸.”

정 회장은 그 진심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노움 여기에 손만 대면 되는 거야?”

김서준이 세계수 사이에 작게 난 꽃봉오리를 보며 말했다. 어제보다 더 커진 황금빛 꽃봉오리는 쨍한 푸른 이파리 사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맞습니다움! 조심스럽게 손만 대시면 됩니다움!”

-꿀꺽.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삼킨 서준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손을 꽃봉오리에 가져갔다.

“음. 아무 일도···.”

[안녕!!]

그 순간 처음 듣는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김서준의 눈앞이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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