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들 밥
“신농님은 아직 신농의 힘을 전부 사용하시는 게 아닙니다움.”
김서준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능력이 부족해 송이버섯 터전도 늘리지 못했고. 세계수의 정보도 능력의 한계로 보지 못하지 않았던가.
“농사를 짓고 땅과 호흡할수록, 더 많은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움!”
“그런 거였군.”
농작물 먹기, 세계수와 대화하기, 세계수 교감하기 등등.
신농의 힘이 강해지는 방법에 대해서 김서준은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농사짓기도 수만은 가설 중 하나였기에 놀랄 일은 아니었다.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되겠네.’
다만, 이제 깔끔하게 농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그럼 노움이 나타난 것도 내가 강해져서 인가?”
“맞습니다움! 신농님의 기운이 커져 제가 현신할 수 있게 된겁니다움!”
“그렇구나.”
“한 단계 성장할 때마다 세계수는 인정의 의미에서 황금 꽃을 피웁니다움!”
그러자 김서준이 의아해했다.
“그러면 그냥 내가 강해졌다는 징표랑 다를 게 없잖아?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아닙니다움! 세계수는 인정과 함께 엄청난 선물을 줍니다움!”
‘세계수의 선물이라.’
순간 ‘케레스의 농기구’로 만들어낸 각종 농기구와 황금 트랙터가 머리를 스쳤다.
‘선물이면 그 급이려나? 그럼 대박인데?’
“그래서 그렇게 축하한다고 했구나.”
“맞습니다움. 축하드립니다움!”
“그럼 선물은 어떻게 받는 거야?”
“꽃이 피면 선물을 받습니다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
“아닙니다움. 꽃을 틔우려면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움!”
“특별한 방법? 그게 뭔데?”
“그건 노움도 모릅니다움!”
“...”
순간 김서준이 할 말을 잃었다.
너무나 해맑게 모른다고 하니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귀엽긴 한데. 너무 당당한 거 아냐..?’
노움이 뭔가 묘한 김서준의 반응을 눈치채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게 아닙니다움! 방법은 세계수가 직접 알려줍니다움! 황금 꽃봉오리에 손을 대면 꽃을 피울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움!”
****
일을 은퇴하고 쉬고자 귀농하는 이들의 가장 큰 로망은 무엇일까? 단연 자신이 키운 작물을 직접 재배해서 만든 요리로 식탁을 채우는 일일 것이다.
김서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는 오히려 더 그러고 싶었다.
‘어렸을 때는 고기 먹다 필요하면 밭 가서 상추랑 고추 따오고 그랬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귀농의 환상이라면. 김서준에게 이런 일은 사무치게 그리운 어릴 적 향수의 일환이었다.
‘처음부터 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안 나서 못했지.’
땅은 충분했지만, 너무 미숙했기에 다양한 종류의 작물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신농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능해.’
신농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이미 증명됐다. 노움과 움이라는 든든한 일꾼들도 있으니 이제 겁낼 게 없었다.
“그래서 전부 다 밭을 개간하겠다는 거지?”
“맞습니다. 다 개간해서 3개는 감자밭으로. 하나는 제가 심고 싶은 작물로 채우려고 합니다.”
500평씩 4개로 나뉜 밭을 임종철이 보며 말했다.
“아쉽지 않겠는가? 더 늘려도 될 터인디...”
“사업에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제가 생각한 생활을 누리고 싶습니다. 업체 수도 제가 부담스럽지 않은 선으로 맞추려고 합니다.”
임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농부는 3개월간 감자 농사를 짓는다. 그렇게 끝나면 수확하면 추가로 다른 작물 농사를 지어서 땅을 한 번 더 활용한다.
‘그 정도가 일반적이지.’
그렇게 한 해 두 번, 많으면 세 번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김서준은 무려 길어야 2주면 끝나는 농사 주기를 가졌다. 수확량 역시 남달랐다.
‘발아율 100%에 달린 감자도 일반적인 감자보다 1.5배 많지.’
한 식당의 감자를 전부 담당하는 방식의 계약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말도 안 되는 효율 덕이었다.
‘1,500평이면 지금보다 2배가 넘게 늘어나는 거지.’
아쉽다고는 했지만,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어지간한 대규모 농사를 짓는 농부에 견줄 수익을 낼 수 있을 터였다.
‘설마 그것까지 계산한 건가? 어차피 수익은 충분하다는 점까지?’
임종철은 속으로 다시 한번 김서준의 철저함에 감탄했다.
“자네가 어련히 잘 계산했겠지. 그럼 이제 바로 시작하자고.”
“아, 어르신 잠시...”
김서준이 임종철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한 김서준이 외쳤다.
“나와랏!”
-쿵!
햇빛을 사방으로 반사하며 트랙터가 박력 넘치게 바닥에 착지했다. 뿌옇게 이는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자태에 임종철의 눈은 이미 온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그렇게 좋으실까.’
김서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도와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고맙지. 얼른 작업 시작하자고.”
임종철은 몰고 온 트랙터를 한쪽에 대충 주차해놓은 뒤. 서둘러 황금 트랙터에 올라탔다.
-구구구.
엔징의 배기 소리와 함께 임종철이 ‘크. 이거지!’ 하는 작은 탄성을 토해냈다.
“난 그럼 먼저 가겠네!”
“네.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
임종철을 보낸 김서준이 뒤이어 말했다.
“노움. 우리도 시작하자.”
김서준의 말에 노움이 당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움! 모두 출동이다움!”
“움! 움! 움! 움!”
노움에 부름에 땅속에서 나타나는 움들. 그걸 본 리노가 노움에게 달려간다.
“멍!”
“알겠다움! 리노 공도 함께 가자움!”
리노와 노움도 전쟁에 출정하듯 비장한 얼굴로 밭으로 향했다.
‘귀여운 녀석들.’
김서준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챙겨온 농기구를 들었다. 케레스의 농기구로는 트랙터를 소환할 생각이었기에 챙겨온 평범한 농기구들이었다.
‘뭔가 어색하네.’
황금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질감이 어색했다. 무게도 달랐다.
‘훨씬 무겁네. 케레스의 농기구가 다르긴 다르구나.’
신의 농기구와 일반 농기구를 비교하는 거부터가 어불성설이긴 했다.
일은 분업으로 진행됐다.
임종철은 트랙터로 밭을 가는 역할로 가장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 김서준과 일부 움들은 그럼 그 땅을 삽을 통해 정리했다. 정리가 끝나면 노움과 리노를 필두로 한 움들은 감자나 여러 작물의 씨앗을 심는 식이었다.
‘역시 빠르네.’
모두 전문가인데다가 워낙 손이 많다 보니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특히나 움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저렇게 하는구나.’
노움과 움들은 마법으로 흙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 능력을 통해 땅을 파거나 평탄화하는 작업을 매우 빠르게 수행했다.
‘땅의 정령다운 모습이네.’
저 작은 손을 뻗기만 하면 흙이 생물처럼 움직이는 장면은 과연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옛날에 봤던 S급 헌터의 염력 같기도 하고. 뭔가 멋지네.’
빤히 바라보던 김서준과 움 하나가 눈이 마주쳤다. 움은 작업을 멈추고 차렷 자세를 하더니 경례를 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움.
‘...나도 해야 하나?’
김서준이 어설프게 손끝을 눈썹에 가져다 대고 까딱했다. 그제야 움은 손을 내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참. 외모는 애들인데. 진짜 군인이 따로 없네.’
김서준은 혀를 끌끌 차며 작업을 이어갔다. 김서준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는 군 면제 대상자였다.
****
작업 중 쉬는 시간.
오늘 큰 작업을 하는 걸 미리 알고 있던 김향숙이 직접 점심을 준비해왔다.
“오랜만에 들 밥이구먼.”
“들 밥이요?”
“아, 젊은 사람들은 그 말을 잘 모르나벼. 이렇게 밭에서 밥을 먹는 걸 들 밥이라고 하는구먼. 옛날에는 이게 농사의 묘미였지.”
“아. 그렇군요.”
김서준이 대꾸하며 받은 도시락을 열었다.
밥 위에 알록달록한 각종 나물과 잘 익은 계란 후라이가 올라가 있었다.
“와. 진짜 맛있겠는데요?”
“들 밥은 역시 비빔밥이지. 잘 준비했구먼.”
김향숙이 수줍게 웃고는 통 두 개를 내려놓았다.
“고추장하고 참기름은 알아서 뿌려 먹어요.”
“그려. 알아서 챙겨 먹겠구먼.”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흙밭에 털썩 주저앉아 자리를 잡았다.
임종철이 먼저 사용한 통을 받은 김서준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적절히 밥 위에 뿌렸다.
“으흠.”
고소한 내음이 사방으로 퍼지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순간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노움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민망해하는 모습.
그때 김향숙이 작은 통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서준 씨. 여기 꼬마 친구도 밥 먹는 거 맞죠?”
“노, 노움은 꼬마가 아닙니다움! 밥도 안 먹어도 된다움...”
노움이 평소처럼 거절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수록 기어들어 갔다. 살짝 미소 짓는 서준과 달리 그대로 받아들인 김향숙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아쉽네요. 따로 준비했는데.”
“그..그...”
노움이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망설이던 그때, 김서준이 말했다.
“노움. 먹어.”
“괜찮습니다움!”
“괜찮아. 편하게 먹어.”
김서준은 고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노움이 저러는 이유는 먹어도 되지 않는 채소를 먹는다는 말에 프로답다고 칭찬한 탓이라고.
‘나한테 실망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 같아.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되는 데.’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김서준은 오히려 죄책감이 없도록 단호하게 말했다.
“어른이 주는 밥은 거절하는 거 아냐.”
노움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움! 몰랐습니다움!”
김서준은 사과하는 노움 대신 김향숙에게 비빔밥을 받았다.
노움은 정령. 외국인도 낯설어하는 음식을 노움이 알까. 그저 고소한 향과 맛있어 보이는 모습에 식욕이 당겼을 게 분명했다.
‘거의 맨날 생식하니까 고추장은 좀 맵겠지?’
김서준은 약간의 고추장과 참기름을 뿌려 비빈 후 노움에게 내밀었다.
“이건 비빔밥이라는 음식이야. 먹어봐. 나물이 많아서 입에 맞을 거야.”
“감사합니다움!”
“여사님께도 인사드리고.”
“감사합니다움! 잘 먹겠습니다움!”
“맛있게 먹어요.”
김향숙은 노움뿐 아니라 리노를 위한 돼지고기까지 준비했다. 덕분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작은 만찬회가 되었다.
‘다 같이 소풍 나온 거 같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밥까지 먹자고 있으니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이거 좋네. 다음에 어르신들 모시고 피크닉이라도 다녀올까?’
김서준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리를 즐겼다.
한참 식사로 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음? 저게 뭐여?”
임종철의 말에 김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김서준의 밭 앞에서 멈춰 섰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남자는 서둘러 움직여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꾀재재한 옷을 걸친 작은 노인이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저, 저건...”
임종철이 말을 더듬으며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말했다.
“아니, 저 친구가 여기 무슨 일이랴.”
“어르신 아는 분이 십니까?”
“알지. 이거 귀한 손님이 오셨구먼. 먹고들 있어. 잠깐 얼굴 좀 보고 올 테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