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장은 감자를 원한다.
이튿날.
어제의 잡초 뽑기 작전에 이어 오늘은 감자 재배 작전의 날이었다. 김서준은 트랙터에 감자 수확기를 단 채 감자를 캐는 중이었다.
“움! 움! 움!”
그 주변에서 움들이 열심히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움움!!!!!”
파란 모자를 쓴 작은 움 하나가 강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노움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알겠다움! 정지하라움! 지렁이 선생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라움!”
“““움!”””
줄지어 걷던 움들이 멈춰섰다. 마치 기차처럼 지렁이는 움들이 만든 사잇길로 유유히 기어갔다.
“다시 시작하라움!”
노움의 신호에 맞춰 다시 감자를 나르기 시작하는 움들. 그 꼬마 병정 같은 녀석들의 모습에 김서준이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기가 막히네.”
아무리 봐도 노움과 움이 일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단순히 이런 장면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트랙터를 이용해 땅 위로 꺼내놓은 감자들. 밭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그 감자를 4마리의 움이 달라붙는다.
“움, 움, 움!”
호흡에 맞춰 감자를 드는 움들. 그 후 마치 정해진 길이라도 잇는 것처럼 척척 줄지어 감자를 운반했다.
그렇게 움직인 감자는 곧장 상자로 골인.
‘어떻게 저렇게 척척 할 수 있지?’
그뿐일까.
운반한 감자는 감독을 맡은 움들이 상품성에 따라 분류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밭이 아니라 공장이라고 생각하겠어.’
가장 신기하고도 고마운 건 누구 하나 대충하는 움이 없다는 점이었따.
운반과 포장을 담당한 움들은 혹여 감자에 상처가 날까 조심조심 움직였다.
검사를 맡은 움들은 혹여 놓치는 게 있을까, 꼼꼼하게 체크 했다.
손가락보다 작은 몸에 손톱만 한 얼굴을 가진 땅의 정령은 외모와는 전혀 매칭되지 않는 프로 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길드에 헌터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말이야.’
어제 노움과 움이 일을 마쳤을 때였다.
김서준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마친 노움에게 미안해서 물었다.
“근데 노움. 이렇게 일을 많이 하면 힘들지 않겠어? 난 딱히 줄 것도 없는데.”
“우리 땅의 정령들에게 신농 님을 돕는 건 무엇보다 즐거운 일입니다움! 저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움!”
노움이 했던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건지. 누구 하나 찌푸린 얼굴을 한 ‘움’이 없었다. 모두가 진지하지만 밝은 얼굴이었다.
‘일을 잘하는 데 좋아하다니. 최고의 직원들이 따로 없네.’
한참 리더쉽에 대해 고민했던 부길드장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있었다.
‘좋은 직원을 만나는 건 로또에 당첨된 거나 다름없다. 좋은 직원은 리더가 키워내는 것이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와 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따라 수도 없이 시도하고 수도 없이 실패와 상처를 맛보아야 했다.
‘근데 이건 그런 직원을 한 번에 수백 명을 얻은 셈이잖아?’
그럼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길 가다 로또 수백 장을 주운 거나 다름없는 건가.
김서준이 머리에 가방에 널린 당첨된 로또를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신농님! 쉬셔도 됩니다움! 캐는 것도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움!”
노움이 서준에게 날아와 말했다. 충실한 가신답게 노움은 자나 깨나 김서준을 걱정했다.
“괜찮아. 내 자식들인데. 이 정도는 직접 해야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과연 신농님이십니다움! 대단합니다움!”
“아냐.”
김서준이 멋쩍게 대답했다.
“근데 정말 너희 대단하다. 배수로 공사도 할 수 있다니.”
김서준이 노움에게 따로 부탁한 건 배수로 정비였다.
‘이번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고 했지.’
신농의 땅은 온도가 유지된다. 흰 눈도 신농의 땅으로 내릴 땐 비가 되어 떨어질 게 분명했다.
‘결국 내게는 장마철이나 똑같아.’
땅의 힘으로 일정 습도가 유지된다지만, 다량의 물에도 그 힘이 유지될지는 미지수. 따라서 배수로 점검은 필수였다.
”움! 움! 움!“
”움?“
”움움!“
파란 모자 대신 어디서 난 지 모를 노란 안전모를 쓴 움들은 견적을 재고, 마법으로 흙을 걷어내며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농사만큼 시설도 중요 합니다움! 이 정도는 기본 소양 입니다움!”
그 말이 헛말이 아니듯, 움들은 누가 봐도 능숙해 보였다. 저 정도면 다른 좀 더 복잡한 공사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보였다.
“그런데 노움. 궁금한 게 있어.”
“네. 신농님!”
“혹시...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이전 신농님은 어땠어?”
질문하는 김서준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사실 처음부터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노움이 아무래도 피하는 거 같았지.’
노움은 나타난 이후, 단 한 번도 이전 신농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밭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농사 기술, 작물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이전 신농의 밭과 비교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맨날 말하던 아빠와 안 닮아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도 안 했고.’
하지만, 김서준은 ‘아들로서 이 정도는 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궁금한 게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신농이었을까?’
황금 트랙터는커녕 황금색 농기구도 본 적이 없었다. 작물이 급속 성장도 하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하셨어. 아무리 생각해도.’
김서준은 그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더불어 아버지의 과거도 궁금했다.
“전대 신농님이라...움...”
노움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김서준이 그런 표정일 때, 둥둥 떠다니던 노움이 처음으로 땅에 착지했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움! 노움은 이전 신농님의 노움과 힘은 공유하지만, 기억은 공유하지 않습니다움! 죄송합니다움!”
인사한 노움이 울상을 지었다.
“아냐. 네 잘못도 아닌데 왜 그래! 괜찮아. 노움.”
김서준이 그렇게 말하며 노움의 모자 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노움이 다시 웃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신농마다 노움이 다르구나.’
김서준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노움을 바라봤다. 그 환한 웃음이 서준의 기분도 좋게 만들었다.
‘일도 잘하고. 이 정도면 좋은 노움을 얻은 거 같네.’
김서준도 미소로 대답했다.
“그럼 저는 다시 임무로 복귀하겠습니다움!”
“그래!”
노움이 다시 하늘로 ‘휙’ 날아 올랐다. 김서준은 즐거운 마음으로 트랙터의 핸들을 잡았다.
“리노 공! 그렇게 하면 감자에 상처 난다움!”
“멍멍!”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김서준이 다시 엑셀을 밟았다.
“다들 고생했어. 이제 좀 쉬자.”
작업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덕분에 김서준은 조금 이르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밭 옆에 적당히 자리를 잡은 서준은 눈앞에 귀여운 광경에 미소를 지었다.
“멍!”
“알겠다움!!”
마치 걸어 다니는 인형 같은 노움. 인형만큼 귀여운 리노.
악연(?)으로 시작했던 둘은 금세 친해졌다.
친해진 계기는 바로 지금 노움이 리노에게 건넨 작물. 새빨간 껍질을 가진 ‘미트루트’였다.
‘역시 친해지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건 종족에 상관없이 다 똑같은 건가?’
본래 정령은 밥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노움의 말에 따르면 그러했다. 움들이 흙으로 돌아간 것처럼 흙으로 돌아가 양분을 흡수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저는 먹고 있습니다움!”
“그래?”
“그렇습니다움! 채소의 맛을 체크하기 위해서 입니다움!”
프로 정신이 넘치는 대답에 김서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단하구나. 너.”
“아닙니다움! 헤헤.”
칭찬에 헤실 거리던 노움은 오늘 캔 감자와 미트루트를 챙겼다. 그리고는 리노와 나눠 먹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근데 대화는 어떻게 하는 거지? 노움이랑도 교감하나?’
뭐 그게 중요할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두 귀여운 존재들이 별 탈 없이 친해졌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김서준도 함께 앉아 주먹밥을 꺼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
“누구지?”
김서준이 주먹밥을 내려놓고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아, 네. 하루 수량을 조금만 늘려 달라고요?”
김서준이 자기도 모르게 노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움?”
노움이 어깨를 으쓱한다. 김서준이 방긋 웃으며 턱짓으로 계속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고민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내려놓은 김서준이 옆에 쌓여있는 감자를 바라봤다.
납품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어가고. 프리미엄으로 선정된 업체에만 납품한다고 확연히 선을 그었건만.
여전히 많은 업체가 김서준에게 납품을 의뢰하는 기업의 연락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가볍게 시작한 건데, 시장 반응이 가볍지가 않네.’
기존의 계약된 업체들도 돈은 더 줄 테니 수량을 늘릴 수 없냐며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다른 작물도 키우고 싶은데. 감자밭도 늘려야 하려나.’
어떤 방식이 됐든 간에.
아무래도 좀 더 일찍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할 듯했다.
****
뒷짐을 진 채 식당의 정원을 도는 한 남자. 남자를 발견한 엄민호가 그의 등 뒤에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아. 엄민호 셰프. 오랜만이구먼.”
낡은 셔츠 위로 입은 허름한 점퍼. 회장이라는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50대 중반의 남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네 식당은 올 때마다 참 좋아. 어렸을 적 우리 집이 생각나서 말이야. 이렇게 마당을 걷고 있으면 꼭 그날로 돌아간 거 같구먼.”
“....”
정 회장이 한 번 더 식당 마당의 조경을 둘러보았다. 그리운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눈을 비볐다.
“이런. 내가 또 궁상을 떨었구먼.”
“아닙니다. 회장님.”
어찌 이해가 되지 않을까. 매년 한 번. 정 회장이 엄민호의 식당을 찾는 이날은 정회장 부모의 기일이라는 걸 엄민호는 알고 있었다.
“아냐 아냐. 식사 준비도 미리 시켜놓고 이렇게 궁상떠는 건 요리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들어가자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엄민호는 회장을 방으로 안내했다.
사극에서나 볼법한 스타일에 화려한 온돌방. 그 가운데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 정 회장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부디 맛있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기대하지.”
엄민호가 인사와 함께 물러나자 온돌방의 문이 굳게 닫혔다. 정 회장은 옷을 편하게 벗고 깔린 음식을 바라봤다.
“흠?”
정 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감자 생채. 감자전, 감자볶음에. 감자 조림도 있고. 이 만두도 감자를 이용한 피로 빚었나 보군.’
음식 대부분이 감자 요리였다.
주요리인 탕에도 감자가 쓰인 듯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군.’
벌써 몇 년째 이 식당을 왔지만, 이렇게 한 가지 식재료가 많이 쓰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건가? 재밌겠어.”
정 회장이 기대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이거 기대 이상이군.’
감자가 이렇게 많은 데 전혀 질리지 않았다. 모든 요리에 감자가 잘 어우러지도록 잘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모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엄민호 셰프야. 거기에 이 감자. 보통 감자가 아닌 게 확실하군.’
어떤 요리에도 어울리면서 자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거기에 가진 맛과 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왜 엄민호 셰프가 감자로 한 상을 준비했는지 알겠어.’
그때였다.
-똑똑.
“회장님. 마무리 요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게.”
멀끔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삶은 감자와 식혜. 그리고 하얀 가루가 담긴 종지가 식탁 위에 내려놓아 졌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잠시 후, 방을 나온 정 회장에게 엄민호가 물었다. 벌겋게 충혈된 채 살짝 부은 눈을 한 정 회장이 물었다.
“자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구먼.”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농담일세. 덕분에 정말 즐거웠네. 아주 엄청난 감자를 구했더군. 맛도 향도 엄청나지만, 특히나 마지막에는 정말 어머니의 감자를 먹는 듯한 기분이었어. 고맙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물었다.
“그래서. 이 감자 어디서 구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