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노움입니다움!
어렸을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시절.
학교 가는 준비를 하는 아침 시간이면 김서준은 항상 TV 앞으로 달려갔다. 밥도 거기서 먹고 옷도 거기서 입었다. 무엇을 하든 눈은 TV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정령왕 레카의 모험을 보기 위해서였지.’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정령들과 주인공의 모험은 그날의 김서준과 아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귀여우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며 묻곤 했다,
“그게 그렇게 재밌니?”
그럼 김서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너무 재밌어!”
오죽하면 지금도 그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날까. 다만 이제는 추억으로서 구석에 미뤄뒀을 뿐.
그런데 지금 그 추억의 잔상이 노움을 보는 순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똑같아. 이 녀석 레카에 나온 땅의 정령 노움하고 똑같이 생겼어!'
솜인형같이 푹신해 보이는 몸. 짧은 팔과 다리와 유난히 큰 발과 쫑긋 솟은 귀.
‘그리고 머리에 쓴 버섯인 줄 알았던 초록색 고깔모자까지. 정말 똑같잖아?’
공중에 둥둥 떠서 모자를 물고 있는 리노를 떼어내려는 그 작은 존재는, 외모부터 풍기는 분위기까지 완전히 만화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이거 놓으라움!”
“리노 놔줘. 그거 먹는 거 아냐.”
리노는 그제야 모자를 놓아주었다. 그리곤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힝. 다행이다움.”
모자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노움이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서준은 그 작은 존재를 유심히 바라봤다.
[노움 : 땅의 정령]
세계수를 지키는 땅의 정령.
오직 신농과만 계약하고 신농만을 위해 능력을 쓴다는 전설의 정령이다. 농사에 능해서 ‘신농의 수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상태창을 자세히 살피던 김서준의 눈이 자연스레 다시 노움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친 노움이 이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움. 땅의 정령 노움. 신농 님의 도움이 되고자 현신 했습니다움!”
귀여운 목소리와 외모로 중세 시대에나 어울릴법한 장엄한 대사를 읊는 노움. 그런데 그 언밸런스 함이 리노에 못지않게 귀여웠다.
“그래. 반가워. 난 서준이야. 근데 거기서 뭐한 거야?”
“축복받은 송이버섯의 성장을 돕고 있었습니다움.”
“송이버섯을? 그런 방법이 있어?”
“축복받은 송이버섯은 솔잎으로 덮어주면 더 쑥쑥 잘 자랍니다움!”
축복받은 송이버섯은 다른 작물과는 달랐다. 급속 성장도 적용되지 않고 얼마나 자랐는지도 표시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양식이 안 되는 작물이라 어떻게 잘 키워야 할지 정보도 없었다.
‘신농의 수족이라더니. 농사에 관한 지식을 갖춘 건가?’
임종철이 아무리 명장이라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작물에 한해서였다. 노움의 지식과는 달랐다.
‘대박인데?’
김서준의 맘에 든다는 표정에 노움이 뿌듯한 듯 가슴을 내밀며 떵떵거렸다.
“이제 제가 왔으니 신농님은 걱정 폭 놓으셔도 됩니다움!”
****
-띵!
타이머가 울리는 소리에 맞춰 엄민호가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다 익었구나.”
엄민호는 한껏 부푼 기대와 함께 감자 냄비를 열었다. 뿌연 김이 단번에 솥을 빠져나오며 고소한 향이 주방 가득 퍼졌다.
“와...냄새 좋다.”
“분명 따로 넣으신 건 없으셨는데...”
“진짜 셰프님이 찌면 삶은 감자도 다르구나.”
주방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 수근거리며 감탄을 토해냈다.
엄민호가 못 들은 척하며 감자를 꺼냈다. 무심하게 접시에 담아 직원들에게 하나씩 권했다.
“소금하고 설탕은 알아서 찍어 먹고.”
“알겠습니다.”
접시를 받은 직원들이 호호 불며 저마다의 방법으로 감자를 입안에 넣었다.
“와!”
탄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맛있으면서도 뭔가 건강한 맛이야.”
“너무 구수하다. 할머니랑 먹었던 감자 같아.”
“이게 힐링푸드인가...?”
직원들은 놀라워하며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엄민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감자는 달라. 무리하는 게 맞았어.’
양식. 중식. 일식. 한식.
각각의 요리는 저마다의 특징을 가진다. 우열은 없지만, 특징은 있다. 그래서 엄민호는 이 중 한식을 골랐다.
‘한식 고유의 건강하면서도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요리가 좋았으니까.’
그런데 엄민호의 목표는 어느 순간 무색해져 버렸다. 임종철이 농사를 그만두면서부터였다.
‘좋은 식재료를 찾겠다고 전국을 돌아다녔지.’
농부들은 저마다 자신의 작물의 대단함을 내세웠다. 그러나 대다수는 모두 유전자 조작, 또는 마나 기술에 의존한 것들.
결국,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가볍고 비슷비슷한 것들이었다.
‘장인 정신으로 자연을 머금은 작물을 기르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었지.’
수익성을 쫓아 살길을 찾은 이를 어찌 비난하랴. 다만 이전과 식재료의 맛을 끌어내기엔 너무 가볍고. 건강한 식단이라 하기에는 불안한 그 재료 앞에 엄민호는 조금씩 요리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꿈을 잃어가던 날 만난 게 바로바로 이 감자였다.
‘그리고 다시 희망을 본 거 같았지.’
엄민호는 남은 감자 한 개를 수저로 ‘툭’ 잘라냈다. 그리고는 호호 불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부드럽게 부서지며 구수한 전분의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동시에 시골의 땅에 영양소를 입으로 흡수하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런 감자라면 할 수 있어. 다시 그때의 요리를!’
또한, 이제야말로 자신의 아래 있는 제자들에게 그가 추구하는 요리를 제대로 전수할 시간이었다.
엄민호는 직원들을 바라봤다. 직원들은 감미로운 디저트라도 먹는 듯이 감자를 소중히 먹고 있었다.
“다들 이제 감자 맛은 알겠지?”
“네!”
“다음 주부터는 이 감자를 주재료로 사용할 거다. 조리장들은 각각 내가 준 레시피 잘 익혀 놓고. 수 셰프는 새롭게 요리하나 구상해봐. 우리 스타일 최대한 살려서.”
“넵!”
우렁차게 대답하는 직원들을 보며 엄민호는 신신당부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중요한 손님’ 오는 거 다들 알지? 절대 실수 없도록 단단히 준비해. 이상!”
****
“제 능력을 제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노움은 김서준을 데리고 밭으로 향했다.
‘무슨 능력을 보여주려고 그러지? 송이버섯처럼 감자 품질을 올리는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김서준은 그런 기대를 품으며 리노와 함께 걸었다. 노움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앞장을 섰다.
밭에 도착한 노움이 김서준에게 물었다.
“제가 밭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움?”
“물론이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줘.”
송이버섯처럼 특별한 무언가를 찾길 바라며 김서준은 흔쾌히 허락했다. 노움은 붕하고 날아 세세하게 밭을 살폈다.
김서준이 하듯 흙을 만져보기도 했다. 마침내 돌아온 노움이 말했다.
“역시 신농님이다움. 밭을 참 잘 만드셨습니다움!”
노움이 격양된 어조로 칭찬했다. 김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그래? 그냥 평범하게 만든 건데. 고마워. 노움.”
“아닙니다움! 땅 상태도 좋고 종자 간 간격도 딱 적당합니다움! 완전 수준급 입니다움! 그리고 하나하나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가 느껴집니다!”
김서준은 내심 뿌듯했다.
농사는 어찌 보면 소일거리. 하지만 아버지에게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한 만큼. 거기에 신농이라는 고마운 능력까지 생긴 만큼 김서준은 농사에 진심으로 임했다.
노움의 칭찬은 마치 그 마음을 읽은 듯했다.
‘게다가 딱 적당하게 완성된 건 어르신의 가르침 덕이겠지.’
김서준은 속으로나마 임종철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다만, 잡초가 많습니다움!”
“응. 잡초 제거는 점심에 할 거였거든.”
“좋습니다움! 딱 제 능력을 보여 드리기 좋은 상황입니다움!”
노움은 그렇게 말하며 밭의 중앙으로 휙 날아갔다.
“다들 나오라움! 일할 시간이다움!”
노움이 공중에서 소리쳤다.
‘뭐지?’
김서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눈으로 봐서는 그랬다.
김서준이 리노를 바라봤다. 리노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얼른 나오라움!”
노움이 다시 소리쳤다. 그러자 리노가 고개를 휙 돌렸다. 동시에 귀를 쫑긋 세웠다.
“리노?”
김서준이 리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부스럭부스럭.
풀잎이 흔들리고 땅에 있는 돌들이 구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지진이 난 듯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못 알아챌 정도로 작지도 않았다.
“뭐지?”
김서준이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내 놀라운 걸 발견했다.
“저, 저건?”
땅속에서 파란색 아주 작은 고깔모자가 쏙 튀어나왔다. 이내 모자 아래 얼굴이 드러났다.
“노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마력을 운용해 시력을 강화했다. 선명해진 시야로 김서준은 작은 얼굴을 빼꼼 내민 존재가 땅 위로 기어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크기만 작은 노움이잖아?’
손가락만 한 크기의 파란 모자를 쓴 노움이 마침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게 하나가 아니었다.
밭 여기저기서 수십, 아니 수백의 노움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노움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그들을 빠르게 세고 있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노움이 소리쳤다.
“모두 복장 정비해!”
노움이 명령하자 작은 존재들이 머리에 쓴 파란 모자를 깔끔하게 일자로 세운다. 김서준은 그 신기한 광경을 입을 떡 벌리고 바라봤다.
“얘네들은 ‘움’ 입니다움!”
“움?”
“넵! 제 부하들이자 신농 님의 일을 도울 땅의 정령들입니다움!”
소개를 마친 노움이 다시 크게 명령했다.
“차렷!”
귓가를 간지럽히는 ‘-착!’ 소리와 함께 일제히 ‘움’들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 위로 제대로 각 잡힌 차렷 자세를 한 노움이 소리쳤다.
“신농 님께 인사!”
노움의 지시에 따라 파란색 모자들이 일제히 아래로 향했다. 동시에 헬륨가스를 마신 아기의 목소리 같은 소리가 밭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움!!!”””””
“어, 바, 반가워.”
김서준은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바로!”
일제히 다시 일어나는 파란 모자들. 흡사 군대를 보는 듯한 기분. 거기에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움. 오늘 작전은 잡초 뽑기 작전이다움! 모두 작전 시작!”
‘...작전? 이거 진짜 군대였어?’
김서준의 놀라움을 뒤로 한 채. ‘움’들의 잡초 뽑기 작전(?)이 시작됐다.
움들은 곧장 가장 가까운 잡초로 달려갔다. 그리곤 잡초를 하나씩 잡고 무를 뽑듯 힘을 쓰기 시작했다.
‘대박.’
잡초들이 엄청난 속도로 뽑혀 나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운반 담당과 뽑기 담당이 나뉘어 있잖아?’
뽑기 담당이 잡초를 뽑아서 아무데나 던져 놓는다. 그러면 운반 담당인 움들이 잡초를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완벽한 분업의 형태였다. 일사불란하게 이뤄지는 작업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건 진짜 대박인데···?”
김서준은 육성으로 감탄했다. 리노 역시 신기한지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 채 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제거하면 다 하는데 30분도 안 걸리겠어.’
그뿐일까.
김서준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헌터의 스킬처럼 마나가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김서준에게 노움이 천천히 날아왔다.
“이게 제 능력 입니다움!”
노움이 한껏 귀여운 표정으로 활기차게 이야기했다. 김서준은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말했다.
“너 진짜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움!”
“근데 노움. 움들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거야? 작물 재배라던가, 심기라던가.”
“물론입니다움! 노움과 움은 농사의 전문가들입니다움! 뭐든 명령만 내려주시라움!”
노움의 자신만만한 모습. 그 뒤로 열 일하는 움까지.
‘보기만 해도 든든하네. 뭐부터 해야 하지? 일단 감자부터 더 심어볼까?’
고민 끝에 김서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노움, 혹시...”
김서준의 부탁을 들은 노움이 방긋 웃었다.
“물론입니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