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부 서준 씨 덕분입니다.
김서준의 황금색 트랙터는 도로를 잔뜩 뒤엎은 넝쿨을 헤치고 고고히 자신이 갈 길을 달렸다.
그 뒤로는 허무하리만큼 쉽게 갈려나 간 풀의 흔적과 회색빛 아스팔트가 드러나니.
“저, 저럴 수가.”
“대단해. 저렇게 쉽게 밀어버리다니···.”
“저런 농기구가 있다고? 내 검보다 좋은 거 같은데?”
미심쩍은 눈빛을 했던 헌터들마저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이제 끝이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풀도 끝이구나.”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이 개 같은 잡초들!”
몇몇은 이제 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난다는 생각에 환호했다. 그사이 은근슬쩍 다가온 1팀장이 노을에게 말했다.
“지시했던 사항은 전달했습니다. 3팀이 주변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나머지는 제거 후 뿌리를 캘 예정입니다.”
“잘했어. 절대 감시자가 알아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기동하라고 전달하고.”
“알겠습니다.”
1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휴대폰을 꺼냈다. 문자로 지시사항을 곧장 전달한 그는 다시 놀라운 광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저렇게 쉽게 할 수 있을지 몰랐네요. 저 지긋지긋한 풀을···.”
“그러게 말이다. 내 검격도 저렇게는 못했는데.”
노을은 황금색 트랙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검사로 전직한 헌터. 거기에 A급까지 단 자신도 달려 들어봤지만 쉽지 않았던 작업을. 그는 집 앞마당 제초하듯 쉽게 해결하고 있었다.
“팀장님.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하세요.”
“저분 헌터 슈트를 입고 있던데. 저분도 헌터 신 겁니까?”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럼 저 트랙터도 혹시 능력인 겁니까?”
“그래. 저게 저 사람 스킬이래. 직업이 농부거든.”
“농부요? 그런 직업도 있습니까?”
“나도 몰라. 근데 저걸 보고 어떻게 안 믿겠어?”
오러 블레이드도 난항을 겪던 풀을 가볍게 밀어버리는 제초기. 인간의 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제초기는 그 외에 스킬이라는 말 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감이 넘치더니. 그럴 만했네.’
사태를 파악해 범인을 찾는 것도 모자라, 사건 수습까지. 만약 자신이 지부장이었다면 계약했던 조건이 아깝지 않을 터였다.
“그렇긴 하네요. 저걸 보니 뭔가 트랙터를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
노을이 팀장을 바라봤다.
이제 32살을 먹은 나이에 걸맞은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장비 산다고 적금을 깬 그는 또다시 적금을 깰 것처럼 선망의 눈으로 트랙터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 철이 안 드는구나.’
노을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리는 걸 겨우 참았다.
넝쿨을 분쇄하며 지나가는 황금빛 트랙터 안. 김서준은 여유롭게 운전하는 척하며 헌터들의 동향을 살폈다.
“잘 움직이고 있는 거 같긴 하네.”
엉킨 부분이 잘려나간 줄기를 무 뽑듯 뽑아 뿌리를 캐내는 헌터들. 그 사이 몇몇 헌터가 은근슬쩍 현장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김서준은 노을을 바라봤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손목을 두드렸다. 조사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 좋은 징조였다. 김서준은 편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트랙터를 몰았다.
해가 기울 때 즈음.
“잠깐 쉬었다 하시죠!”
노을이 소리쳤다. 헌터들과 도로를 통제하던 경찰들이 모두 휴식을 시작했다. 김서준은 노을에게 다가갔다.
“단서는 좀 찾았습니까?”
“찾았습니다. 누군가, 자리를 잡고 이곳을 지켜보던 거 같은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자리를 뜬 거 같지만, 풀이 눌려 있는 거로 봐서 오래된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네. 주변 CCTV도 확인해서 범인을 꼭 찾아내겠습니다.”
“그럼 작업 속도도 올리겠습니다. 더 천천히 할 이유가 없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김서준은 미소로 대답했다.
휴식을 마친 후.
김서준은 거침없이 풀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 작업 속도에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 미쳤는데?”
“멋있다.”
“와 며칠 걸릴 줄 알았는데 이 속도면 오늘 끝나겠는걸?”
그 말대로였다. 범인의 꼬리를 잡은 지금. 더 작업을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김서준은 가장 빠른 속도로 도로를 휘저었다. 머리에 스크레치를 내듯, 얽히고설킨 덩굴은 황금빛 트랙터가 지나간 길을 따라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좀 더 빠르게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김서준은 소리치며 최대한으로 작업 속도를 끌어 올렸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작업하세요!!”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린 헌터들은 김서준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누구 하나 군말 없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트랙터에 쌓인 풀, 혹은 튀어나간 잔해들을 제거했다.
모두가 전력을 다하니 작업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그렇게 해가 완전히 기울었을 때. 김서준은 마지막 넝쿨을 도로 위에서 치워 버렸다.
“후···.”
집중한 탓인지 식은땀이 어느새 나고 있었다. 김서준은 가볍게 소매로 땀을 닦으며 트랙터에서 내렸다.
그때 누군가 차가운 생수를 내밀었다. 노을이었다.
“진짜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서준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빠르게 작업을 끝내는 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풀 좀 베는 게 뭐 대단하다고요. 비용도 다 받았고.”
“하긴 비용을 많이 받긴 하셨죠.”
“하하, 근데 범인은 어떻게 됐습니까?”
“거의 잡았다고 합니다. 신상도 나왔고요.”
“신상까지요? 대단하네요.”
“비록 풀 베기는 못 해도. 저희 헌터관리국이 그렇게 무능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네요. 그래서 범인은 누굽니까?”
“이거 보시죠.”
노을은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김서준은 그의 프로필을 찬찬히 읽었다.
“식물 술사라. 직업이 참 특이하네요.”
“농부가 하실 말은 아니죠.”
노을의 농담에 김서준이 피식 웃음을 뱉었다.
“그렇긴 하네요. 근데 등급이 C급 밖에 안 된데요?”
김서준의 말에 노을도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저희도 그게 좀 의문이에요. 이전에 일했던 길드에 알아보니까 식물의 씨앗이나 특징을 이용해서 싸우는 능력이긴 했는데. 이 정도로 엄청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고작해야 넝쿨로 채찍을 만드는 정도였다고···.”
순간 김서준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서준 씨 생각에도 좀 이상하긴 하죠? 길드 나간 게 일주일 전이라는 데. 일주일 만에 이렇게 강해진 게 저도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렇긴 하죠. 이걸 쉴드 마법처럼만 써도 최소 B급은 되겠네요.”
“기발한데요?”
노을이 무엇을 상상했는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김서준도 가볍게 웃었다.
****
며칠 후.
범인을 잡았다는 기사가 다양한 신문사에서 보도되고 있었다.
“이런 거 보면 참 신기하긴 하다.”
문제가 터졌을 때는 크게 보도되지 않았던 사건이 해결됐을 때는 대서특필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게 권력의 힘인가.”
김서준은 살짝 찝찝한 마음으로 기사를 둘러 보았다. 기사의 내용은 칭찬 일색. 댓글의 분위기 역시 오랜만에 일 잘했다는 평이었다.
“내용 괜찮네. 노을 씨 이걸로 칭찬 좀 받았겠는걸?”
특히, 자연재해인 줄 알았던 사건이 범죄라는 걸 밝혀냈다는 점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기사에서 그 주인공은 최연소 총괄 팀장 노을. 그리고 지부장이었다. 김서준의 이름은 없었다. 당연했다.
‘모든 공을 넘기고 실속만 챙기는 게 이번 협상의 핵심이었으니까.’
이런 부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명성에 대해 일말의 욕심도 나지 않았기에.
‘노을 씨의 이름도 함께 써주면 제 이름은 안 넣어도 된다고 해주세요.’
김서준은 흔쾌히 공을 넘겼다. 약속은 확실하게 지켜졌고 이로써 일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범인은 길드에 내쫓겨진 후,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다만, 범인은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고 밝혔으며 스스로도 그 현상에 놀라 관찰 중이었다고 자백했다.]
다만 이 부분은 좀 찝찝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길드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건가?’
조사가 좀 더 이어져야겠지만, 이건 분명 이상했다. 능력이 폭주했다. 뭐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범인이 증언했으리라.
잠깐 고민하던 김서준은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수사하면 밝혀지겠지. 여기부터는 내가 신경 쓸건 아니니까.”
할 일을 다 했고 받을 건 다 받기로 한 지금. 수사도 들어갔고 자신이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닌 게 확실했다.
지금 김서준이 신경 써야 할 건 결과가 아닌 보상이었으니.
"그나저나 일 처리가 정말 빠르시군요."
"서준 씨 덕분에 복잡한 일 순식간에 해결했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노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굴착기 3대가 땅 고르기를 시작했다. 그 뒤로는 몇몇 인부들이 도로 폭을 재는 등 밑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최연소 총괄 팀장이라더니. 역시 권력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나 보네.’
이렇게 대규모 인력이 빠르게 투입됐다는 게 그 증거였다. 김서준은 새삼 그녀가 다르게 보였다.
“왜요?”
“아닙니다. 근데 엄청 많이 오셨네요.”
“기왕 하는 거 빨리 끝내야죠. 서준 씨도 하루 만에 끝내셨잖아요.”
마을이 소란스러워지자 하나둘 주민들이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니, 동의서 받아간 게 엊그제 같은데 바로 하는 겨?”
“빠르구먼. 빨라!”
“근데 공무원 처자. 이걸 갑자기 왜 해주는 거여?”
한 할머니 한 분이 노을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고 공무원증을 목에 찬 그녀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전부 여기 서준 씨 덕분입니다.”
“서준 씨? 서울에서 내려온 이 총각 말여?”
“네. 이 분이 나라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하셨는데, 보상금 대신 마을에 도로를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요.”
“그게 참말이여?”
“참으로 고마운 청년이구먼!”
“이제 택배 시킬 때 눈치 안 봐도 되겠구먼.”
“경운기 타다 논두렁 빠질 일도 없겄어!”
“고맙네! 고마워!”
김서준의 손을 화들짝 잡고 악수를 하는 할머님. 김서준이 놀라 노을을 바라봤다. 노을은 눈을 찡끗했다.
“그뿐이 아녀유.”
그때 뒤늦게 자전거를 타고 임종철이 나타났다.
“어르신.”
김서준이 고개를 숙이자 인자한 미소를 띄운 임종철이 말했다.
“앞으로 다치면 우리 집으로 오셔유. 서준이가 나라에서 힐링 포션도 받아줘서. 이제 병원 갈 필요가 없어유.”
“진짜인가?”
“아유 젊은 친구가 이웃 생각하는 마음이 대단하네!”
“우리 자식보다 잘 챙기는구먼!”
한 할아버지의 농담에 웃음꽃이 피었다. 김서준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임종철과 노을은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서준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마을 어른들은 회관에 급하게 술상을 벌였다.
‘아니, 거의 잔치였지.’
마을 사람들은 물론 작업에 참여한 모두, 심지어 노을까지 술판에 합석을 시켰다. 신기한 건 어색할 것만 같던 분위기가 금세 무르익었다는 점이었다.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모두가 웃는 얼굴로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취기로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겠구먼.”
해가 완전히 기울고 풀벌레 소리로 밤공기가 울릴 무렵. 마침내 막걸리가 떨어졌다. 임종철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다 같이 논 게 얼마 만인지. 서울에서 온 총각 덕에 아주 좋은 일이 이어지네.”
“이래서 촌에도 젊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니까. 예쁜 색시도 여기서 살지, 그려? 아니 둘이 살림 차리면 되겠구먼?”
“그럴까요?”
노을이 재치있게 대꾸했다. 덕분에 어르신들의 입에 웃음꽃이 피었다.
잔치가 끝나고 어르신과 인부들과 헌터들이 모두 돌아갔다. 노을은 김서준을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직 그 정체불명의 몬스터를 못 잡았거든요. 혼자 가시다가 혹시 몬스터라도 만나면 어떻게 해요?’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노을을 김서준은 막지 못했다. 리노와 함께 두 사람은 시골의 한적한 밤길을 걸었다.
“오늘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네요.”
“제가 감사하죠. 빠르게 처리해주신 덕분이니까요.”
“하하. 근데 다들 친절하시고 이렇게 별도 많이 보이고. 여기 진짜 좋은데요? 저 진짜 여기 살까 봐요.”
노을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살짝 홍조가 어린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이웃이 생기면 좋죠.”
“그래요?”
의미심장하게 웃은 노을이 말했다.
“서준 씨, 좀 부족하지 않아요? 제가 마침 좋은 와인 하나가 있는데···.”
노을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 위에 와인 한 병이 나타났다. 그녀가 병을 흔들며 말했다.
“혹시 토마토 카프레제, 한 번 더 안 해주실래요?”
“하하···.”
어쩔 줄 모르는 김서준의 다리를 누군가 툭툭 쳤다. 아래로 향하는 시선.
그 시선이 닿은 곳에 리노가 무언가를 ‘-툭’ 내려놓았다. 순간 김서준의 동공이 커졌다.
‘소, 송이버섯? 이걸 어디서···.’
리노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시크하게 뒤를 돌아 먼저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