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소환할 농기구는...
자전거를 탄 남자가 소리쳤다.
“거기 사유지유! 거기 들어가면 안 돼유!”
안장 위, 등산복을 배 바지로 입은 남자의 실루엣이 김서준에 눈에 띄었다. 모자 밑으로 검은 피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한 남자를 김서준은 대번에 알아봤다.
‘종철 할아버지시구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김서준이 먼저 꾸벅 인사했다. 자전거를 세운 할아버지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개를 쑥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아이고, 서준이여?”
할아버지가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언제 온 겨!”
김서준의 고향 마을인 금산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고블린의 습격이 있던 후, 많은 분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전소민의 가족도 그때 서울로 이사했다.
‘이제 게이트에서 아웃브레이크(게이트의 시간이 지나 몬스터가 빠져나오는 현상)가 일어날 일은 거의 없지만 그때는 몰랐으니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
반대로 마을에 남은 이도 있었다.
임종철네 가족이 그랬다. 가장 젊은 나이로 이장을 맡았던 임종철은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꿋꿋이 마을을 지켰다.
‘참 대단해.’
김서준이 묘를 만들 때도 이장으로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셨었다.
‘오늘 점심쯤 찾아뵈려 했는데. 죄송하게 됐네.’
김서준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왔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봬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휴, 괜찮여. 여기서 오는 길이면 아버지 뵙고 오는 거 아녀. 항상 부모가 제일인겨.”
“아닙니다. 아버지는 어제 뵀어요.”
“어제 뵀다고?”
“네. 할아버지. 저 어제 여기로 이사 왔거든요.”
“이사를 왔다고? 설마 저기 공사가 니집 공사 였던겨?”
“네. 맞아요.”
임종철이 화들짝 놀랐다.
“그게 참말이여? 서울에서 소민이랑 잘 나간다며? 길드도 만들었다더니 이제 다 그만둔 겨?”
김서준이 내심 놀랐다.
친자식도 아닌 자신이 5년 전에 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했다.
‘앞으로라도 좀 잘 챙겨드려야겠어.’
여러모로 고마운 분.
시간도 많으니 종종 찾아뵙는 것도 좋아 보였다.
“네. 이제 아버지 가업 이어서 농사짓고 쉬면서 지내려고요.”
“가업을 잇겠다고?”
“아, 네 뭐 대단한 사업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간단하게 농사짓고. 남는 거 있으면 주변 사람도 나눠주고 그러려고요.”
“그렇구먼. 뭔 일 있어서 내려온 건 아니지?”
“네.”
김서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임종철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다행이고. 근데 밭은 뭐하러 들어간 겨? 벌써 농사 시작하려는 겨? 그리고 그 낫은 또 뭐고?”
“아, 이게...”
-꼬르륵.
대답하려던 김서준이 민망함에 괜히 배를 쳐다봤다. 임종철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우리 집 가서 밥 먹으면서 하지?”
“네. 좋습니다.”
가운데에는 구수한 집된장으로 만든 된장찌개. 그 옆을 감초처럼 채워주는 맛좋은 나물들. 시골의 인심을 보여주는 볼록 솟은 고봉밥까지.
시골 인심이 듬뿍 담긴 집밥은 배뿐 아니라 마음까지 꾹꾹 채우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후식으로 주신 식혜까지.
‘좋다.’
김서준의 머리는 그 짧고 간결한 한마디로 가득 찼다.
행복이 별거냐. 이런 게 행복이지.
어딘가에서 들어봤던 그 말이 문뜩 떠오른다. 김서준은 그 말을 조금 바꿔본다.
‘이런 것도 행복인 거지.’
치열한 경쟁에 승리는 달콤했다. 돈과 명성을 얻는 희열은 강렬했다. 다만, 그런 행복은 매우 짧았다.
잠깐의 행복 뒤 다시 치열한 경쟁이 이어진다. 온전히 행복을 누리고 있다간 다음 행복을 놓치고 만다.
하나, 이 행복은 달랐다.
온전히 행복을 누리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뒤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한마디로 보답이 부족한 건 순전히 내 마음의 양심에서 비롯된 일.
거기에는 의무도 책임도 아무것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
‘이런 행복 나쁘지 않네.’
도시를 떠나며 기대했던 행복의 모습 그대로였다.
“감사합니다.”
식혜를 받아든 김서준은 정중한 인사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맨날 먹는 밥 좀 나눠 먹는 게 뭐라고.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자주 와”
“그려. 아들놈은 서울에서 요리 한다구 오지도 않고. 이제 동네에 사람도 없어서 심심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새 사람 오니 좋구먼.”
임종철과 그의 아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인사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근데 명신이 형은 요즘 뭐해요?”
“그 무슨 호텔에서 요리한다는 데. 호텔 이름이 뭐라더라. 아르, 아르, 아르...”
“아르카디안이요?”
“아 그래. 거기. 거기 구만.”
“와 거기 예약하기도 힘든 5성급 호텔이잖아요? 대단한데요?”
“에휴. 아녀. 아직 멀었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 어깨가 올라가신다. 김서준이 속으로는 웃으며 모른 척 맞장구를 쳤다.
밥알이 적당히 풀리고, 살얼음이 살짝 뜬 달달한 식혜와 함께 아들 자랑이 이어졌다. 그다음은 김서준과 전소민의 근황 이야기.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임종철이 물었다.
“근데 농사짓는다면서. 농사짓는 방법은 좀 공부했는가? 농사 처음 지으면 쉽지 않을 텐디?”
김서준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요.”
사실 거의 무지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핑계가 아니라 농사에 대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퇴직 결정하고 오히려 더 바빴지.’
한달이 넘는 기간은 처음 일 시작 할 때 만큼 바빴다.
손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은 조금 일정을 당겨서라도 마무리했다. 인수인계는 프로젝트마다 적임자를 정해 확실하게 넘겼다.
그렇게 낮을 보내면 밤에는 MP사에서 새로 파견된다는 경영진을 위해 자료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링거까지 맞았고.’
전소민이 오히려 걱정했을 정도였다. 하나, 김서준은 그게 오랫동안 몸담았던 길드에게, 고마운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업상 만났던 업자에게 집을 짓는 걸 의뢰한 것도 겨우 시간을 냈다.
“공부는 이제 하려고요.”
김서준은 대답하고는 민망함에 식혜를 들이켰다.
“잘됐네. 마침 할 일도 없었는데. 내가 가르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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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소리와 함께 먼지를 날리며 초록색 트랙터 한 대가 나타났다. 거대한 바퀴가 울퉁불퉁한 바닥을 시원하게 해치고 구른다.
“멋있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멋있다. 흔히 생각했던 경운기와는 달랐다. 거대한 바퀴 위 새끈하고 육중한 바디는 스포츠카 못지않다.
‘하나 사고 싶네.’
그런 충동이 일 정도.
“하이고, 먼지야! 이 길도 정비 한번 해야겠구만.”
트랙터에서 내린 임종철이 투덜거렸다. 많이 해진 티와 펑퍼짐한 바지 위로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그는 내리자마자 김서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복장이 그게 뭐시여. 그러다 풀에 다 까져.”
김서준은 몸에 딱 달라붙는 스판 재질에 운동복이었다. 풀에 쓸려 옷이 망가지고 여기저기 살갗이 까지기 딱 좋은 복장이었다.
‘원래라면 그렇겠지.’
그 정도는 김서준도 알고 있었다.
“이거 보기엔 이래도 헌터들 훈련용으로 입는 특수소재입니다.”
“그려?”
“네. 칼에도 쉽게 안 찢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기.”
김서준이 한쪽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뭐 시여.”
“홍삼입니다. 어제 드리려고 했는데 못 챙겨가서요. 오늘 농사 가르쳐주시는 거도 그렇고. 항상 잘 챙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거 비싼 거 아녀. 뭘 이런 걸 다 준비했디야. 이게 뭐라고.”
임종철이 그 안을 슬쩍 확인했다. 붉은색에 금테.
‘이거 장관장에서 젤 비싼 거 아녀!’
임종철이 놀라 김서준을 바라봤다. 김서준은 눈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거 참 그거. 제대로 해야겠구먼.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선물을 트랙터에 잘 넣은 임종철은 곧바로 농사 수업을 시작했다.
“일단 이거 땅을 다 까야 하는데...”
임종철이 죽은 나무줄기들을 슬쩍 당겨 보았다. 줄기들이 팽팽히 장력을 유지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역시 모양도 그렇고 질긴 게, 마나 먹은 풀이구먼.”
“마나 먹은 풀이요?”
“이런 애들이 있어. 잡초인디 이상하게 억세거나 색이 이상하거나 그런 애들. 그게 주변에 마나를 흡수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렇군요.”
“예상했던 거보다 더 질기긴 한디, 일단 트랙터로 한번 밀어 보자고. 괜찮을겨. 저거는 나무도 밀어버리는 놈이니까.”
임종철은 능숙하게 트랙터를 다시 움직였다.
-윙!
‘저게 파쇄기였나.’
초록색 트렉터 뒤 달려 있는 상자처럼 생긴 거대한 파쇄기가 웅웅 거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설치된 날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그대로 트랙터가 밭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바퀴는 죽은 줄기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콰르르르륵!
주변에서 줄기들이 빨려 들어간다. 갈갈이 찢긴 즐기는 그대로 상자 위에 쌓인다. 김서준은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런데,
첫 줄의 반쯤 갔을 즈음, 김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가 이상한데?’
-콰르르륵! 콰륵! 콰르륵!
파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어쩐지 위태롭다. 자꾸 무언가 걸리는 듯한 느낌. 트랙터의 움직임 역시 점점 느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턱!
“이게 왜 이려!”
기우가 아니었나.
결국, 파쇄기가 멈춰 섰다. 트랙터 역시 서버렸다. 엑셀을 밟아도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더 나아가지 않았다.
당황한 임종철이 트랙터에서 내려 파쇄기로 향했다.
“다 엉켜버렸구먼!”
죽은 줄기들은 예상보다 더욱 질겼다. 녀석들은 제초를 위해 설치된 날들 사이에 끼어 날의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거기에 엉켜있는 다른 줄기들이 사슬처럼 트랙터를 붙잡아 놓은 형국이었다.
“이걸 어쩐다.”
임종철이 연결된 줄기라도 끊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동아줄처럼 얽히고설킨 줄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김서준이 줄기를 받아 양손에 힘을 쥐었다. 양팔의 핏줄이 선명하게 설 정도로 힘을 써서야 겨우 줄기가 끊어졌다.
“날이 안 들 줄은 몰랐네. 미안혀.”
“아닙니다.”
“그나저나, 줄기가 억세서 낫질하고 나서 작업할 수도 없고. 사람 불러서 땅을 다 뒤집어 까야겠는데?”
“낫질이요?”
임종철이 줄기를 하나 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요렇게 댕기처럼 꼬여 있어서 억 샌 게 더 심한 거니까. 좀만 낫질해주면 훨씬 더 나을 텐데 이 정도면 어지간한 낫으로는 힘들지. 하여간 이래서 마나 먹은 풀이 힘들어.”
“그거라면 방법이 있을 거 같습니다.”
“응?”
김서준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황금빛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낫을 떠올렸다. 그러자 빛이 김서준의 생각대로 형상을 이뤘다.
“이게 뭐라고!”
“제 스킬입니다. 농기구를 이렇게 소환할 수가 있습니다.”
“황금 낫이라니. 신기하구먼. 근데 그게 날이 잘 드나?”
백문이 불여일견.
김서준은 곧장 나무줄기를 한 움큼 쥐고 낫을 휘둘렀다. 어제처럼 쉽게 줄기들이 숭덩숭덩 잘려나갔다.
“대단하구먼. 뭔 놈의 낫이 그렇게 잘든 디야!”
임종철의 눈이 휘 동그래졌다.
“제가 이렇게 낫질 먼저 하겠습니다. 그다음에 돌리시죠.”
“근데 이 넓은 땅을 혼자 다 할 수 있겠어?”
“흠···.”
김서준이 땅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2000평. 체력은 둘째치고 시간은 문제가 있었다.
‘내가 일하는 동안 계속 기다리셔야 할 테니까.’
혼자라면 몰라도 어르신을 수고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며칠에 걸려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역시 내키지 않는다.
‘무언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 김서준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어르신 잠시만···.”
김서준이 임종철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케레스의 농기구’를 사용했다. 낫이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형체를 잃었다.
“흡!”
황금빛이 하늘로 솟구쳤다. 공중에서 빛은 점점 커졌다.
‘소환할 농기구는...’
김서준은 더욱 강렬히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에 집중했다. 빛 덩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트랙터!’
-쾅!
하늘에서 황금빛 물체가 떨어졌다.
그건 분명,
“트, 트랙터...?”
거대한 트랙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