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농(神農)
새싹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초록빛은 김서준의 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쏟아지는 메시지들.
‘이제 와서 전직이라고?’
김서준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분이 복잡했다. 고대하고 또 고대했던 일이었다. 그냥 전직도 아니다.
‘여신의 축복까지···.’
일반적인 직업의 잠재력은 직업의 이름, 그 후 얻은 능력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S급 잠재력이 보장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신의 축복이다.
전직의 신의 축복까지. 꿈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래라면 고민할 일도 없지.’
바로 은퇴 취소하고 길드로 돌아가도 모자랐다.
‘농부만 아니었다면.’
문제는 직업이었다.
비전투 직이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연금술사나 대장장이만 해도 장인의 경지에 이르면 서로 모셔가려고 줄을 선다.
하지만, 농부는?
‘완벽한 꽝이지.’
밭농사 지을 때 근력 상승 따위의 능력을 갖춘 헌터를 원하는 곳은 ‘밭’밖에 없다. 아무리 S급이라 한들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전직은 무효로 할 수 없다. 한번 전직하면 끝. 이제 김서준은 꼼짝없이 농부가 되었다. 헌터로서의 삶은 완벽하게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과거에 김서준이라면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어차피 농사를 짓기로 한 마당에 오히려 환영이었다.
“이래서 진심이라면 찾으라고 하신 건가.”
덕분에 남아있던 미련마저 강제로 털어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근데 이거 신기하네.”
김서준이 다시 물푸레나무 새싹을 바라봤다. 어렸을 때는 그냥 좀 큰 신기한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세계수였어?’
신화나 설화에 얽힌 영물들은 대단한 힘을 가진다. 헌터 중에는 이런 영물만 전문으로 찾아다니는 트레져헌터가 있을 정도였다.
세계수(世界樹) 역시 비단 축복뿐만 아니라, 분명 엄청난 힘을 가졌을 게 분명했다.
“감정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김서준이 놀랍다는 얼굴로 그 작은 싹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린 세계수]
등급 : 영물(靈物)
아직은 덜 자란 미숙한 세계수. 신농의 지극정성을 다한 관리가 필요하다.
주의 : 신농은 세계수가 죽으면 모든 능력을 잃습니다.
초록 싹 위로 정보창이 나타났다.
“뭐지? 설마 감정 스킬을 얻은 건가?”
감정사로 전직하지 않았는데, 감정 스킬을 갖추는 경우는 드물었다. 농부가 감정 스킬을 가졌을 리 없다.
하나 신의 축복을 받은 신농. 김서준은 혹시 하는 마음에 팔에 찬 팔찌를 들어 올렸다.
“안 되는데?”
팔찌의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다. 감정 스킬이 아니었다. 하나, 물푸레나무를 보니 다시 정보창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지?”
김서준이 의아해하는 와중, 또 하나의 창이 나타났다.
[고로쇠나무 - 잎]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단풍나뭇과의 낙엽 교목.
<용도 ? 없음>
“어? 이건?”
김서준이 놀라 낙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설명이 적힌 창이 함께 움직인다. 확실했다. 이 설명은 낙엽에 대한 설명이었다.
김서준이 낙엽을 놓고 옆에 있는 나무를 바라봤다.
[고로쇠나무]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단풍나뭇과의 낙엽 교목.
<용도>
- 수액: 당뇨, 위장병, 신경통에 효과.
- 뿌리, 줄기 껍질: 폐병, 관절염에 효과. 말려서 차로 섭취.
또다시 나타나는 설명.
‘설마 식물만 가능한 건가?’
김서준이 주변에 널려있는 나무와 풀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설명을 나타내는 창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반면 아이템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농(神農)의 능력인가 보군.’
상당히 편리한 능력이었다. 이거라면 따로 작물에 관해 공부하는 수고는 덜 수 있을 거 같았다.
김서준이 다시 세계수의 싹을 바라봤다. 녹색을 선명하게 뿜어내는 작은 녀석이 귀엽게 느껴졌다.
“네가 죽으면 모든 힘을 잃는다고?”
아버지가 담을 만들고, 매일매일 일과 후 이곳에 들렀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아버지도 각성자, 신농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진짜 가업이네요.”
김서준이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새싹을 아주 살포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여기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도. 너 때문이겠지?”
새싹은 대답이라도 하듯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아버지가 말한 가업을 잇는다는 건, 농사만이 아니었던 건가.
“그래, 앞으로 잘 해보자.”
****
“음···.”
넓은 창을 넘어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침대에 드리웠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김서준이 눈을 비볐다. 자연스레 손이 휴대폰으로 향한다.
시간은 9시. 휴대폰에 떠 있는 알람이라곤, 전소민이 보낸 가벼운 연락뿐이다.
김서준이 피식 웃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늦었다며 호들갑을 떨고. 수십 개의 연락에 답장하며 정신없이 준비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푹신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하얀 대리석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온 김서준이 서랍을 열었다. 형형색색의 캡슐 커피가 칸 별로 정리되어 있다.
“오늘은 이걸로 할까.”
파란색 캡슐로 커피를 내린 김서준은 다시 2층으로 돌아왔다. 커튼을 열자 통유리 너머로 시골의 편안함이 펼쳐졌다.
“좋네.”
멋진 경관과 상쾌한 공기를 곁들여 마시는 모닝커피는 어느 대단한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에도 밀리지 않을 맛이었다.
-탁.
한 잔의 여유를 충분히 즐긴 김서준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뭐부터 해볼까.”
시골로 돌아오며 집은 새로 지었다. 고블린의 습격으로 군데군데 불타고 여기저기 무너진 집은 고쳐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김서준은 현대식으로 취향에 맞게 그리고 기존보다 더 넓게 2층으로 지었다. 큰 의미는 없었다. 어렸을 때 큰 집에 살고 싶었던 그 소망을 이룬 정도였다.
‘마침 퇴직금도 두둑했고.’
문제는 담벼락 뒤로 보이는 저 난장판이었다. 5년을 넘게 방치해 놓은 2,000평 남짓한 땅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뭐부터 해야 하려나’
잔뜩 어질러놓은 방을 청소하듯, 뭐부터 해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김서준은 직접 거닐며 할 일을 정하기로 했다.
빵으로 가볍게 아침을 때운 김서준은 운동복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나가기 전 거울 앞에 섰다.
‘농부처럼 보이지는 않네.’
모자만 빼면 농부보다는 운동선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나 김서준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각성한 몸에 복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고급 펜션 부럽지 않게 잘 조성된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었다. 초록 잔디가 끝나고 시작되는 흙길 뒤 펼쳐진 고동색이 완전 다른 세계처럼 이질적이었다.
“심하긴 하네.”
가까이서 보니 더 심각하다.
말라 죽은 정체 모를 식물들이 넝쿨처럼 엉켜 온 땅을 뒤덮고 있었다. 그 밑에 있는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
“밭을 만들려면 저거부터 다 치워야겠네.”
김서준이 한숨과 함께 죽은 나무줄기를 집어 들었다.
‘음?’
턱 뭔가에 걸리는 느낌. 김서준이 괜히 좀 더 힘을 줬다.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던 엉킨 줄기들이 이내 ?툭 소리와 함께 끊어진다. 김서준이 한 발자국 뒷걸음질치며 다시 균형을 잡는다.
“허···.”
김서준이 손에 쥔 줄기 가닥과 여전히 바닥에 착 붙어있는 줄기 덩어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거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너무 억새다. 나중에 갈퀴로 긁으려 했는데, 이 정도면 갈퀴가 먼저 망가질 걸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낫질 먼저 하고 나서 긁어낼까?’
생각에 빠져있던 김서준이 환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햇빛이 아니었다. 광원(光源)은 김서준의 오른손이었다.
“뭐지?”
김서준이 놀라 혼잣말을 뱉었다. 빛은 점점 형체를 갖췄다. 적당히 긴 대 끝에 기역 자로 꺾인 날의 형태.
“낫?”
의아해하며 김서준이 빛을 손에 쥐었다. 이내 빛이 가셨다. 나무 대 끝에 황금빛 날을 단 낫이 나타났다.
‘무기?’
아니. 무기가 아니었다.
무기로서의 낫은 보통 대도 더 길고 날도 더 컸다. 김서준의 상식대로라면 이건 무기보다는 농기구 ‘낫’의 형태에 가까웠다.
-팟.
[케레스의 농기구 : 낫]
신농이 사용할 수 있는 신의 농기구. 필요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설명을 읽은 김서준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그나저나 농기구 소환 스킬이라니.”
너무나도 농부다운 스킬에 김서준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근데 농기구치곤 화려하네. 황금빛 낫이라니.’
그러고 보니, 농사의 신이 황금빛 낫을 썼다는 걸 책에서 본 적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김서준은 그런 잡생각과 함께 가볍게 낫을 휘둘렀다.
-촤악.
“...어?”
김서준이 놀랐다. 그 억세던 줄기가 밀가루 면을 자르듯 숭덩숭덩 썰려 나갔다. 단면도 아주 깔끔했다.
“신의 농기구라더니. 성능 확실하네.”
신기함에 몇 번 더 휘둘렀다. 황금빛 낫은 나무줄기 사이를 몇 번이고 거침없이 갈라버렸다.
‘재밌네.’
성능도 좋고 재미도 있다. 기계를 따로 부를 필요도 없이 직접 낫질을 하면 될 듯했다.
‘2000평이 좀 크지만, 시간은 넘치니까.’
김서준이 농기구를 갈퀴의 형태로 바꿨다. 갈퀴로 휙 긁어내자 죽은 나무줄기의 뿌리부터 큰 돌들까지 한 번에 딸려 올라왔다.
갈퀴에 걸린 게 이렇게 많은 데 힘은 거의 들지 않았다.
김서준은 갈퀴를 써본 적이 없었다. 하나, 이런 현상이 ‘케레스의 농기구’ 덕분이라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낫질 몇 번과 갈퀴질 몇 번에 노란 흙이 외부로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묵혀둔 여드름을 짜듯 뭔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농사짓는 거···. 생각보다 재밌을지도 모르겠어.’
김서준이 웃으며 밑에 드러난 흙을 손으로 만졌다. 메마른 흙의 질감이 느껴졌다.
‘원래 이랬나?’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을 때 가끔 도와드리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흙이 분명 촉촉했던 거 같았는데 지금은 수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흙의 색도 모래처럼 밝은 노란 색에 가까웠다.
‘설마 너무 오래 버려둬서 땅이 이상해진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2000평 규모의 땅이 전부 이렇다면 틀림없이 대공사를 해야 했다.
‘시골 라이프 즐기려다 파산하겠는데?’
장난 반 진담 반.
그런 생각을 하며 김서준이 쥔 흙은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잠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흠, 어떻게 할까?”
김서준이 양 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하늘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지려는데.
-팟.
[신농의 힘으로 죽은 땅을 회복시킵니다.]
안내와 함께 김서준의 주변으로 초록빛이 퍼져 나갔다. 빛은 딱 밭의 테두리에서 멈춰 섰다. 은은하게 빛나던 초록빛은 마치 물처럼 땅으로 스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김서준이 당황했다. 사태를 파악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밭에서 은은하게 낙엽 냄새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발밑에 흙은 어느새 익숙한 짙은 갈색 빛으로 변해있었다. 손에 묻은 흙에 촉촉함이 느껴졌다.
“해결된 건가?”
‘신의 농기구에 땅까지. 신농이라더니. 이름값 제대로네.’
고민을 순식간에 해결한 김서준이 스스로의 직업을 칭찬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이면 밭 만드는 건 금방 하겠어.’
즐거운 마음으로 흙을 털고 김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와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른 할 일 정리하고 밭을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 누구 슈!”
일어나는 김서준에 누군가 소리쳤다.
“거기 들어가면 안 돼유!”
김서준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