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8 2020 =========================================================================
#498
“노래 정말 좋아. 언니. 이거 진짜 언니가 만든 거야?”
‘오빠는 정말 나빠’라는 제목의 노래가 연습실 내부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당장 지수 그녀와 같은 그룹 멤버인 체이의 붉어진 두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으며, 다른 이들 또한 이와 비슷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 노래 진짜 좋아요.”
“맞아요. 진짜 대박이에요.”
지영과 채연의 말에는 일말의 가식조차 담겨있지 않았다. 같은 소속사 직계 선배라는 이유로 형식적인 말을 건넨 게 아닌, 순수한 의미에서의 놀람이 그녀들에게 호들갑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태도를 가지게끔 강요했다.
그렇게 그녀들은 한층 밝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같이 밥을 먹으러 가게 되었고.
“언니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으, 응? 응... 그, 그래. 체이야.”
“뭐야, 새연 언니. 지금 체이 언니가 언니라고 해서 설마 부끄부끄? 히히... 아! 채연 언니 우리 뭐 먹을까?”
“글쎄...”
이제는 제법 친해진 관계를 자랑하듯, 체이는 넉살좋은 지영의 부추김에 힘을 얻어 새연과 채연의 팔짱을 낀 채 연습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지와 지수, 그녀 둘만이 연습실에 남아있게 된 것이 그 때문 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언니... 아직이야?”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민지의 얼굴은 무엇인가 복잡해보였다. 다른 이들이 저마다 친해지기 위한 계단을 밟고 있을 때조차 그녀는 그저 과거의 어느 한 부분을 훑어나가고 있는 듯 했다.
“언니도 오빠 좋아했던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응, 맞아. 아직 좋아해.”
“어?”
“좋아한다고. 아직.”
그녀가 알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라면 대답은 그녀의 입이 아닌 얼굴과 행동에서 찾아야만 했다. 입으로부터 대답을 들으려고 질문을 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예상이 벗어나고 말았다.
“언니?”
자신의 물음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건네는 지수의 모습에서 민지는 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화감이라는 것이 그녀와 지수 그녀 사이에 존재했던 오랜 세월의 간극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인지라, 민지는 애써 이를 간과해야만 했다.
“우리도 어서 가자. 애들 기다리겠네.”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뒤로한 채 연습실을 나서려는 지수의 모습에 민지 또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내야만 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애써 한쪽으로 치워버린 채.
“어?”
그런데 그때였다. 지수의 뒤를 따라가던 그녀가 일순간 걸음을 멈춘 지수의 행동에 덩달아 발걸음을 멈췄다.
“언니?”
등에 머리를 찧을 뻔 했는지라, 의아함이 가득담긴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어렵지 않게 그 의아함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지수의 등 너머로 보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로 인해서.
*
“누나랑 매형 건강 검진하러 병원 갔다며?”
“어. 삼촌이 조금... 작은 엄마랑 같이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고맙다. 가까이에 있는 내가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고맙긴 뭐가 고마워. 당연한 거지.”
애들을 어린이집으로 보낸 뒤, 태현 형의 부름에 잠시 JS에 들렀다. 복잡한 심사와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점들로 인해 나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는지라, 태현 형 또한 이를 어렵지 않게 알아챈 듯 했다.
“너도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어?”
“얼마 전에 무의식 상태로 보름가까이 누워있던 것도 그렇고... 막상 깨어나고 나서도 주변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쉬지도 못했잖아. 스케줄도 빡빡했고.”
하긴, 이렇게 머리가 아플 진데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한 거지.
“그때 질리도록 검사 받았어. 형도 알잖아. 아무 문제없었던 거.”
“그래, 알긴 알지. 근데 너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매형이랑 누나 건강 검진 받는 데, 너도 그냥 가서 같이 받지 그래? 편히 쉰다 생각하고,”
“됐거든요? 여튼 밥이나 먹어. 형. 나 배고파. 일 많이 남았어?”
휴식하러 병원 간다는 게 말이나 돼? 나 참.
“애들은?”
“오늘은 저녁까지 먹고 온다는데?”
“아, 그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병원을 가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태현 형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병원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얼굴이 어두운 것도 그렇고 병원을 간다고 해서 이 사안이 해결되지 않을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화제를 돌려버렸다.
“소담이는 오늘 저녁 약속 있다네. 흠... 30분 정도면 되는데. 여기서 기다릴래? 아니면 밑에 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든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라는 말. 진심인가?
아무리 구내 카페라고 해도 가는 순간,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될 게 불을 보듯 뻔한데 내가 미쳤다고 가겠는가. 차라리 여기에 있고 말지.
“너 여기에 있으면 집중이 안 되니까, 기다리는 건 아마도 30분이 아니라 1시간 정도?”
얼씨구? 참나.
“차에 가 있을 게.”
어디서 이런 취급 받을 사람이 아닌데, 너무 막 대하는구만?
태현 형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와 순간이나마 머릿속에 담겨 있는 복잡한 덩어리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43기 연습생......”
“어머, 어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생각을 떠나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휴.
“먼저 가세요.”
“자리가 있는,”
“뭘 놓고 온 게 있어서요. 그럼 이만.”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주변의 시선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지만 적어도 엘리베이터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막상 복도를 걷는 동안, 이렇다 할 사람들이 눈에 뜨이질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대규모 레슨 시간이 겹쳐, 사옥 복도 지분의 상당량을 차지하는 연습생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된 듯 했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자연스레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고 이내 복잡한 심사의 실타래를 풀어보려는 시도를 다시금 하게 됐다.
나와 유재연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 연습생일 수밖에 없다.
유재연과 나의 관계를 방치하는 것보다 알림으로써 더욱 큰 이득을 얻게 되는 자. 연습생일리가 없다.
상충되는 두 전제로 인해 결론이 나오질 않았다.
연습생만이 나와 유재연의 관계를 알고 있을 거라는 전제가 잘못된 것일까.
하아. 미치겠네.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 실타래를 보며 점점 지쳐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득 들려오는 선율이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 속에서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 말 끝까지 들어요. 나도 이제 여자란 말이야.”
누구의 목소리인지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수의 목소리.
서정적인 멜로디와 함께 어우러지는 지수의 목소리는 나의 머릿속을 일순간 텅 빈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고민들을 밀어내버린 것이다.
“이렇게 같이 있는 게 뭐가 그리 힘든 일이라고. 그러면서 그 여자는 왜 만나요. 혼자라면서, 여자 친구 없다면서.”
진실성과 더불어 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가득 담긴 감성은 귀가 호강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이돌이 아닌, 뮤지션으로서 낼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 감정 등이 지수에게서 들려온다는 것에 기뻤다. 방금 전까지 풀리지 않는 실타래니 뭐니 했던 내가 말이다.
“오빠한테 나는 아직 동생일 뿐이죠. 왜 나는 아직까지 동생이죠.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나를 동생으로 봐요.”
이는 자작곡이 분명했다. 또한 지수의 얘기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농밀한 감정을 가사 안에 담아내 뮤지션의 향기를 짙게 뿜어낼 리 만무했다. 그래서 의아함이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아직도 초등학생으로 보이나요. 나 진심이에요. 나도 이제 여자란 말이야.”
초등학생?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수가 남자를? 그런데 어째서 사라졌던 실타래가 다시금 떠오르는 것일까?
선율과 더불어 지수의 목소리 그리고 가사. 모든 게 완벽했다. 감동했다. 작사, 작곡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훌륭히 자신의 감정을 담아내는 곡을 만들어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들이 사라지게 만들 땐 언제고 다시금 복잡한 심사를 불러 모으고 있다는 점에서 말문이 턱하니 막혀버렸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옆 연습실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 마음을 내가 몰라, 너무나도 답답했다.
“언니 우리 뭐 먹을까요?”
“여기 앞에 파스타 진짜 맛있게 하는 데 있다던데, 거기 갈까?”
“진짜요? 저 파스타 완전 좋아하는데! 채연 언니, 새연 언니는 어때요?”
“으, 응? 응. 나도 좋아.”
“나도.”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수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우선 과제인 듯 했다.
“얼른 타요. 응? 그런데 지수 언니랑 민지는?”
“일단 먼저 내려가요. 우리. 사람들 기다리니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들에게 그것도 먼저 아는 척을 하기엔 지금 내 상태가 좋지 않아, 마냥 이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쪽도 반대편 끝 쪽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했고 그들 사이에 지수가 보이지 않아 상관은 없었다.
“언니... 아직이야?”
상념은 자연스레 내가 보고 있는 광경과 연결됐다. 지수와 민지. 나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이들이 연습실에 남아있는 모습은 과거의 나를 추억하게끔 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그들은 무척이나 굳어있었다. 마치 내 모습을 거울로 보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민지의 얼굴은 복잡해보였고 등을 보이고 있는 지수의 얼굴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언니도 오빠 좋아했던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응, 맞아. 아직 좋아해.”
“어?”
“좋아한다고. 아직.”
굳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념과 지금의 상황을 잇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쉽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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