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496화 (496/502)

00496  2020  =========================================================================

#496

[아니에요. 어차피 제 돈도 아닌데요. 총리님이 복권용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이군요. 그 뛰어난 재능과 빛나는 마음씨까지.]

[네?]

복권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한 뒤,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기에 당첨금과 관련된 사안은 이미 나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했다.

내게서 머물렀던 시간이 짧았던 만큼 이를 떨쳐내기도 보다 쉬웠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를 모두 기부하겠다고 나선 그때 그 순간의 선택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당연할 말일 테지만 나 역시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말하곤 하죠. 복권에 당첨되면 몇 억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몇 억은 부모에게, 몇 억은... 이런 식으로.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과연 그것들 모두가 지켜졌을까요?]

도대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단순히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 위해 직접 전화를 건 것은 아닐 듯 했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갑작스런 행운에 도취돼 흥청망청 그것들을 소비하기에 바빠지죠. 돈에, 여자에, 술에, 마약에. 그런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됐을 지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겠죠?]

지금 독일은 최악의 폭탄 테러로 인해 혼란이 극해 달해있는 상태. 그런 독일의 수반인 그녀로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게 너무나도 자명했으니까.

[몇 번을 감사하다고 해도 모자랄 정도에요. ‘강’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 행동은.]

뭐, 듣고 보니 내가 했던 행동이 그만큼 미친 행동이었구나 싶었다. 단지 그게 끝이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를 가지고 아쉬워할만한 정신적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들려온 마이켈 총리의 목소리는 내 자신의 행위에 보다 큰 의미를 더하기에 충분했다.

[이번에 베를린 주에서 ‘강’을 독일의 명예시민으로 임명하고 싶다는 강력한 요청이 들어왔어요. 물론 연방 의회의 수반인 저는 이 요청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또한 의회의 위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할 의사도 가지고 있어요.]

명예시민? 처음엔 내가 들은 단어 ‘Ehrenbürger’의 의미가 헷갈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어는 일상생활 수준의 독일어 실력을 지닌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단어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이를 영어인 ‘Honorary citizen’로 바꿔 말해준 마이켈 총리의 원하지 않은 배려 덕에 그 의미를 자연스레 알게 됐고 이는 나의 말문을 턱하니 막아버렸다.

[명예시민이지만, 독일 내에서는 의료, 교육, 교통, 주거 등 시민권에 버금가는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강’이 원한다면 즉시 독일 국적을 취득할 수도 있는 증표가 될 것이고 명예시민의 지위만으로 ‘강’은 독일과 유럽연합내의 국가 방문 시 유럽인들과 동일한 대우를......]

이게 도대체 말이야 방구야?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터라 마이켈 총리의 말은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보고 명예시민? 그 혜택을 받으라는 건가? 한국인인데?

*

[‘강’에게 부담을 주고 싶어서 건넨 말은 아니에요. 시일이 얼마든지 걸려도 좋으니,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싶어 말을 꺼낸 것이니까요. 뭐, 물론 독일 연방의 총리가 마이켈이라는 이름의 여인일 때 그 결정이라는 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요?]

딱히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국적을 옮기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혜택 권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바로 대답할 수 있음에도 그러질 않았다. 당장 당면한 문제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오빠다! 오빠!”

“우와! 오빠 왔다! 오빠 사랑이 안아줘!”

때마침 나를 보고 달려드는 동생들의 움직임에 도저히 전화통화를 계속해서 이어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녁은 먹었어요?”

애들을 차례대로 한 번씩 안아주고 나서야 작은 엄마를 마주할 수가 있었다.

“아직 안 먹었어요.”

“다행이다. 오늘 불고기 했는데, 많이 먹어요. 불고기 좋아하잖아요.”

요리를 하고 계셨던 듯, 앞치마를 한 채 나를 마중 나온 작은 엄마의 모습에서 포근함이 느껴졌지만 이내 내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리고 나니 마음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내 보게 된 광경과 작은 엄마의 부연 설명만큼은 아니었다.

“그때 한 숨도 안자고... 이제 자기 나이도 있는데 그거 생각 안하고... 자꾸 그러더니 결국 몸이 상해버렸나 봐요. 회사에 휴가를 냈다길래, 애들 소풍가는 날이라고 그런 줄 알았다니 몸 상태가...”

“죄송해요... 작은 엄마.”

회사에 갔지만 며칠 전부터 휴가를 냈다는 말에 본가에 오게 된 것이었다. 내가 살면서 여름, 겨울 정기 휴가를 제외하고 개별적으로 휴가를 낸 걸 본적이 없는 삼촌이 말이다.

그런데 막상 본 삼촌이 나와 작은 엄마가 방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있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이유를 들어서 더더욱.

“염색도 좀 하고 몸도 좀 챙기라니까, 요즘 들어서 운동도 안하고 자꾸 무리를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속상해서 한 말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오빠도 그렇고 나도 지혁씨... 자식처럼 여기고 있으니까요...”

생각해보니, 벌써 삼촌의 나이가 쉰에 다다르고 있음이 떠올랐다.

흰머리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된 삼촌. 내 기억속의 삼촌은 무척이나 단단한 근육질 몸매에 댄스곡이 어색하지 않은, 언제나 젊게 살아갈 것만 같은 사람이었는데, 오늘 같이 약해진 삼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저번에 도무지 연락도 안 되고 병실에만 계속 틀어박혀 있길래... 건강 걱정돼서 한약 몇 제 지어왔어요. 끼니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그랬거든요.”

내가 서른 살이 되었다는 점.

아직 한창 때라 자위하며 이십대를 떠나보낸 아쉬움과 허탈함을 애써 포장한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그런데 삼촌이 벌써 쉰이라는 나이에 가까워져 있다니, 괜스레 죄스러웠다.

나의 인생은 보름달이 되어가고 있을 진데, 삼촌은 이제 그믐달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함께한, 함께할 모든 시간들이 소중할진데, 삼촌의 이러한 변화가 너무나도 크게 다가옴은 그만큼 내가 삼촌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내가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을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병원은 갔어요?”

“자꾸 병원을 안 간다고 해서 걱정이에요. 알잖아요. 오빠 고집이...”

속상한 듯 눈시울이 붉어진 작은 엄마를 보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관리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관리사님. 저에요. 네, 네. 저 괜찮아요. 아! 다름이 아니라... 내일 건강검진 스케줄 좀, 아, 저는 아니고요. 삼촌이랑 작은 엄마요. 네. 네. 비용 상관없이 해주세요. 네? 정밀 검사 같은 경우는 길면 2박 3일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요? 아, 상관없어요. 무조건 그렇게 해주세요. 안 간다고 하면 강제로 끌고서라도 데리고 갈 테니까.”

삼촌에게 그날의 진실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힘을 잃어갔다. 차마 이와 관련된 일로 삼촌을 깨울 수가 없었다. 규칙적인 생활과 식습관을 유별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수하던 삼촌이 저녁이 다 될 때까지 그것도 누군가가 방에 들어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그리하게끔 만들었다.

“말 편하게 해주세요. 작은 엄마. 저도 외숙모를 그냥 외숙모로만 여겼다면 작은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러니까, 내일 삼촌이랑 같이 가서 진찰 받으세요. 애들은 제가 챙길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이내 작은 엄마는 부엌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방에 홀로 남아 삼촌이 누워있는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다시금 작은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삼촌을 깨우기 전까지 계속.

*

[갑자기 무슨 병원을 가라고 그러냐? 어? 삼촌이 말이야. 이십대 못지않은......]

갑작스레 건강검진을 받고 오라는 나의 강압적인 요구에 삼촌은 떨떠름한 반응을 내보이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듯 했다. 말머리마다 우리 지혁이니, 효도니 하는 말들을 꺼내며 민재 삼촌과 다른 친구들에게 이를 자랑하는 것을 보면.

후우.

꿈속에서 보았던 엄마, 아빠의 모습에서 내 기억속의 모습 그대로를 보았으면서 어째서 삼촌의 모습에서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한숨만 나왔다.

한동안 상념은 지속됐다. 삼촌과 작은 엄마가 병원에 들어서는 것까지 직접 확인한 뒤 온 거라 걱정하는 마음 자체는 상당부분 해소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니고 있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는지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오빠! 오빠! 나 이거 봐라? 예쁘지!”

“응. 우리 사랑이 머리핀 진짜 예쁘다.”

“히히!”

이내 등장한 사랑이의 모습에서 시간이 꽤나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햇빛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오전 때와는 달리 어느새 따사로운 햇살이 사랑이를 배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점심이랑 저녁은 제가 준비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잘 부탁드려요.”

“그,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갑작스럽게 야외수업하게 됐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아이들... 갑작스럽게 야외 수업해서 도시락이나 그런 것도 준비 안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맞죠?”

전부터 말은 있었다. 사랑이를 포함한 애들 전부가 같이 어린이집을 다니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얘기가. 그래서 동생들의 소원 아닌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그 데리고 오고 싶다는 곳인 본가가 아닌, 내 집에서. 그것도 규모를 조금 더 키워서.

“네? 아, 네. 하지만 저희 측에서 자체적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저희 동생들만 특혜를 달라는 건 아니니까, 너무 부담가지지 마시고요. 그냥 다른 애들 대하듯이 따뜻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뿐이에요.”

정원 곳곳에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순간이나마 마음이 훈훈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 점심과 저녁 관련된 부분을 알려드린 뒤, 다시금 당면한 문제에 신경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어진 생각의 꼬리에서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유지연과의 대화에서 느꼈던 묘한 위화감. 얼버무리듯이 지나쳤던 그 위화감이 순간 그런 행동을 자아냈다.

“오빠! 애들이 숨바꼭질하자는 데 오빠도 할래?”

“오빠! 오빠도 하자!”

동생들과 더불어 어린이집 아이들 모두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왔지만, 차마 아이들과 눈을 마주해주지 못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오빠?”

“사랑아 오빠가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런데 친구들끼리 재밌게 놀고 있을래? 오빠 금방 올게.”

“으, 응? 응! 오빠! 사랑이는 선생님 말 잘 들어!”

“아니야! 소망이가 더 잘 들어!”

“아니야! 희망이가......”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 눈짓으로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대신한 채 서둘러 발걸음을 놀렸다. 지금 당장은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할,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동생들에게는 미안한 말이겠지만.

*

“언니 요즘에 장난 아니라며?”

또다시 어색해진 연습실 내 분위기에 한숨을 내쉰 주민지의 활약은 눈부셨다.

오랜 연습생 생활을 겪었던 그녀였기에, 주민지는 이내 등장한 TRENDY의 멤버 지수 앞에서도 여지없이 분위기 메이커 기질을 발휘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그녀와 지수 간에는 안 좋은 일화도 더러 존재했지만, 짧지 않은 세월의 흐름 그리고 그 밖의 좋았던 일화가 오랜만에 재회한 그 둘의 관계를 어색하지 않게끔 만들어줬다.

“응? 뭐가?”

“작곡 선생님이 언니 잘한다고 하던데?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언니들 컴백한다는 거 작곡 선생님한테 들었네. 언니 이번 앨범에 언니가 작곡, 작사한 곡 수록한다며?”

트렌디 멤버들이 제각기 예능, 연기 등 각자의 개별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이때, 그녀는 가수 본연으로서의 능력을 배양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그녀가 리더이자 메인보컬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자연스러운 행보임이 틀림없었다.

“진짜? 진짜에요? 언니?”

“이미 위에서 컨펌 다 났다고 하던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새롭게 발매될 트렌디 앨범에 자신의 곡을 수록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최고의 걸 그룹으로서 아직까지 아시아 전역에 폭 넓은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트렌디의 앨범은, 단순히 멤버들이 작곡, 작사에 도전했다고 해서 손쉽게 수록 곡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여기서 주민지가 말한 수록곡이라는 것은 지수가 단독으로 작사, 작곡한 곡을 뜻했으니 오죽할까.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대단하다는, 일종의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것이 지수의 얼굴을 붉히게끔 만들었다. 이어서 그 곡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듣게끔 만들기도 했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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