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4 2020 =========================================================================
#494
[이 자리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더 노력하는 강지혁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국 프로모션을 마친 뒤 서둘러 귀국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원래대로라면 미국으로 건너가 여유롭게 시사회 일정과 더불어 각 지역 신문, 방송사들의 인터뷰 일정을 소화해야 했을 테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결론을 짓고 내가 감내해야 될 일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지연 언니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연 언니... 재연 언니한테는 거의 부모님이었으니까.]
김다인을 생각하자니, 고마워해야하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전 사실 나정 언니가 PD님한테 말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조금 이상해서 막 찝찝하고 그랬었는데... 왜냐하면 나정언니는 오빠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거나 그러진 않은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레즈라고... 흐흠... 어쨌든 진짜 놀랍네요. 지연 언니가......]
하지만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위해 펼쳤던 생각의 나래와 결론들은 지금에 이르러 나의 속내 상당부분을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내 스스로가 고통스러워 미뤄놨던 것들을 그녀는 너무나도 훌륭하게 착착 결론을 내주었던 것이다.
“후우...”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같은 침대에 그것도 같은 이불을 덮고 있어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떠올라, 내게 절로 한숨을 선사했다. 팬티만 입은 채, 발가벗고 있는 내 모습과 더불어 옆에 김다인이 있다는 점은 더한 골칫거리를 안겨다 줄 수 있는 사안이었는지라 그때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많은 식은땀을 흘렸는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 전날 보았던 옷차림 그대로 누워있던 그녀의 모습과 더불어,
[오빠가 토한 거 정리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치... 술 취해서 사실대로 다 말해주지 않았다면 진짜 버리고 갔을 거에요.]
믿음직한, 아니 믿고 싶을 만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는 김다인 덕에 예기치 않았던 상황은 그저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수가 있었다.
“저기 지혁씨?”
“네, 네?”
비행기가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나를 찾아온 승무원 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무슨 일이지?
2명의 승무원은 나의 별다른 호출이 있지 않고서야 승무원 전용 공간에서 내가 있는 구역까지 올 일이 없는 만큼 의아함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지혁씨 지금 기장님께서 잠시 인근 공항에 기착해야 된다고...”
“네?”
갑작스런 행동에 어울리는 이유로 인해 일순간 반문하고 말았다.
“엔진 쪽에서 이상한 낌새가 보여서 인근 공항에 기착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내 승무원을 뒤따라 등장한 부기장님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세한건 지금 상황에서 알 수 없으나 엔진 추력부분이 평소와 달리 저하된 부분이 있습니다. 무시할 만한 사안이라고 여기실 수 있겠지만, 안전을 생각하신다면 인근 공항에 기착해 다시 한 번 정비를 받아보심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무시하고 가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네. 그럼 공항에 내려주세요. 인근 공항이 어디죠?”
“살짝 되돌아가야 되겠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입니다.”
분명히 런던에서 정비를 했던 걸로 기억하는 데 이런 문제가 생겨 조금은 찝찝해졌다. 그리고 보니, 이 비행기 살 때 중고로 샀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러나?
*
독일어는 영어나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라 뉴스 내용이 전부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정치나 역사와 같은 어려운 말이 아닌, 비교적 쉬운 단어로 구성된 뉴스가 때마침 VIP 라운지의 전용 스크린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는지라 자연스레 시선을 그쪽으로 두게 되었다.
[유로잿팟! 과연 51주차에도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것인가! 유럽 17개국이 참여해 발행하는 연합 복권 유로잿팟이...... 당첨금 집계 누계액이 23억 3693만 8493 유로에 달한다는......]
당첨금 집계 누계액이 23억 3693만 8493 유로라니. 보고 듣고 있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가? 도대체 0이 몇 개야?
[3일 전 발표된 당첨숫자 6개의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가운데, 과연 유로잿팟이 23억 3693만 8493 유로......]
벌써 10개월이 넘도록 당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첨액 자체가 대단했는지라 피식 웃음이 튀어나와버렸다.
그래, 신경 써서 뭐하냐. 너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신경을 써야할 놈이 정작 복권놀음에 신경을 쓰고 있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행동인지. 나 원 참.
[유럽 17개국이 참여해 발행하는 연합 복권 유로잭팟은...... 은행 등에서 당첨자 확인을 받을 수 있으며 각국 공공기관 및 공항에서도...... 51주차 당첨 번호는 1, 2, 3, 4, 5 그리고 유로잿팟 넘버 6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니 복권 샀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번호를 찍었길래 저런 숫자가 당첨번호로 나왔는데 당첨이 안 되는 거야? 나조차도 독일 마이켈 총리한테 복권 받았을 때 1, 2, 3, 4, 5, 6으로... 에? 뭐, 뭐라고?
[다시 한 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1, 2, 3, 4, 5, 6......]
오 마이 갓.
*
“오 마이 갓!”
도이치뱅크.
프랑크푸르트 공항 내에 마련되어 있는 도이치뱅크에 들어섰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내가 지갑 속에 무심코 넣어두었던 복권 용지를 담당 직원에게 꺼내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 환호성을 연달아 터트리는 담당 직원 그리고 분주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는 또 다른 직원을 보자니, 현실을 조금이나마 인지하게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유럽이라는 곳에서, 10개월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복권 당첨자가 바로 나라는 점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허탈할 정도로 현실이 소설처럼 느껴졌다.
[당첨금은 세전 금액 기준 30년 연금 형식으로 분할 지급 또는 세후 금액 기준 일시지급. 이 두 형태로 지급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 지급에 있어 2일에서 3일 가량의 시일이 소모된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처음에 내가 은행으로 들어오자, 단지 내가 유명 인이기에 굉장히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러움의 시선으로 날 쳐다보는 게 절로 이해가 됐다.
[총 당첨금액은 23억 3693만 8493 유로이며 세금은 외국인이시기에 25%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일시지급 형태를 선택하실 시 17억 5270만 유로가 최종 당첨금액이시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이 23억 유로고 17억 유로지, 이건 유로가 아닌 원으로 따져봤을 때도 충분히 대박이라 칭할 수 있는 액수였다. 사실상 조가 넘어가는 순간 사람이 실감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 볼 수 있었으나, 막상 경험해본 결과 이는 다 거짓이었다.
그냥 너무 실감되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 돈으로 뭘 할까.
아예 섬 하나를 사서 나라를 세워 버릴까? 주식을 사서 재벌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볼까? 버즈 두바이 같은 엄청난 빌딩을 세워 대대손손 벌어먹고 살 수 있게 할까?
사람인 이상 엄청난 돈 앞에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유지연과 관련된 복잡한 생각들조차 그 순간만큼은 떠오르지가 않았다.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건데, 못 들어봤나요? 유로잭팟이라고.]
[이걸 저한테 왜...?]
마이켈 총리는 이 모든 결과를 예견하고 내게 복권 용지를 선물한 것일까?
[이곳 호텔에 들어왔을 때 눈에 띄더군요. 요즘 이 복권이 한창 핫하거든요? 운이 좋아서 자기만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겠죠? 그게 ‘강’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의 근본 원인들 중 하나일 테고요. 프로모션 행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테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제쳐둬요. 원래부터 이곳 포츠담 광장은 번화가니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조차 할 정도로 지금 상황은 어마어마한 감정의 폭풍으로 날 밀어 넣고 있었다.
내가 이런 욕구들을 가지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바람들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요트를 사서......]
[꿈 재단을 더 키워서......]
[LA랑 서울에도 집이 있으니까, 뉴욕이랑 유럽 쪽에도 2만평씩... 아니지 유럽은 고성이 많으니까, 성을 하나씩 사서 부루마블처럼.....]
뭔가 점점 나가 아닌 것 같았지만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사실에 비한다면, 이는 조금 약소하게끔 느껴질 정도였다.
이 모든 걸 다 해본다고 해도 1조를 채 넘지 못할 것만 같았으니까.
일단 일시금으로 받고 나서 생각해보려했다. 무제한 카드를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만큼 하나, 하나 차근차근 생각해볼까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떠오른 또 다른 기억들로 인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혹시 알아요? ‘강’의 그 운이 아직까지 남아있을지? 당첨되면 그 중 일부라도 독일 국민들을 생각해주세요. 물론 지금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지만요?]
마이켈 총리가 내게 장난스럽게 건넸던 말이 그 기억들의 시작이었다. 내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한 나라의 총리라는 사람이 직접 찾아와 식사를 함께 하고 또 복권까지 건네줬었다.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2조가 넘는 돈 앞에서 이 같은 마이켈 총리의 말은 나를 잠시나마 머뭇거리게 했을 뿐 결과적으로 마음을 돌리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어진 다른 기억들로 인해 나는 계속해서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부모님이 정말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네? 정말 그러실까요?]
[나이가 들어도 세상 소식이 궁금해 신문은 매일 봅니다. 거기서 지혁군이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종종 볼 수 있었죠. 어린 나이인데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니, 부모님께서도 하늘에서 엄청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똑똑이 회장님과의 만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할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때의 말이 나를 다시금 붙잡았다. 단순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러한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한, 너무나도 생생해서 꿈이라고 여길 수 없는 기억들에까지 도달하면서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또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우리 아들. 엄마가 옆에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너무 훌륭하게 자라서... 엄마는 우리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워]”
[아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빠가 하늘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을게. 사랑한다. 아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길. 엄마는 아빠가 지키고 있을게. 알겠지?]
[건강하고 나중에 먼 훗날에... 먼 훗날에 다시보자. 우리 아들. 사랑해! 엄마가 항상 지켜보고 있을게. 그러니까, 외로워하지......]
항상 날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엄마, 아빠 또한 지켜보고 있었고 또한 앞으로도 지켜볼 거라는 부모님의 말이 가슴 속을 격렬히 두드렸다.
발목을 붙잡혔다고 생각하다니. 애당초 내 것이 아닌 무엇인가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는 점이 무서워졌다. 하지만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돈은 위대하고 또 위험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일시지급을 선택할게요.]
일시지급을 선택하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점이 바로 이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이미 결심이 굳어졌음에도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기기란 상상 이상의 의지를 요구했다. 후우.
[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고객님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과 더불어 입금 받으실 계좌와,]
[제가 받을 수 있는 당첨금 전액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발생한 베를린 폭탄 테러로 부상당한 사람들이 만 명이 넘어간다고 들었어요. 그 분들이랑 사망하신 수백 명의 희생자분들을 위해서 써주세요.]
[네, 네?]
이미 당첨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져서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당첨자가 바로 나라는 점에 더더욱 놀란 듯 엄청난 관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런 시선들이 부담되었으나, 이곳이 공항에 마련된 도이치뱅크의 일개 지점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도리어 저들로 인해 나의 결정이 공신력을 얻게 될 것이니 만큼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계속해서 돈으로부터 비롯된 욕구가 나를 제지하려했으나,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나의 마음을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마이켈 총리님이랑 약속을 했어요. 당첨이 된다면 독일 국민 분들을 위해 그 돈을 쓰겠다고. 하지만 저는 독일 국민들뿐만 아니라 이번 테러 피해자 분들 모두를 위해 이 당첨금을 쓰고 싶어요.]
[저, 저기 미스터 강. 지금 제가 잘 못 들은,]
[마이켈 총리님을 믿고 이 모든 당첨금을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적 상관없이 이번 테러에 피해를 입으신 분들을 위해서 이 당첨금이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저기요! 미스터 강! 저기!]
내 할 말로 비롯된 파장은 엄청났다. 담당직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말문이 막힌 듯 자신들의 두 눈을 한껏 키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 서둘러 VIP라운지로 발걸음을 놀렸다.
이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아니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벼웠다.
“저는 다른 비행기 타고 먼저 귀국할 테니... 아,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별 일 아니니까, 정비 끝나면 귀국하도록 하세요. 네, 그럼.”
평소 때라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기부 사실을 자랑하듯 떠벌리는 걸 꺼렸을 테지만, 그래도 이번 같은 경우 오히려 그것이 나의 욕구들을 잠재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듯 했다.
엄마, 아빠. 나 잘한 거 맞지? 그런 거지?
한국으로 향하는 다른 비행기를 예약하는 와중에 느껴지는 포근함에 알게 모르게 쌓였던 피로감이 절로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품안 가득히 껴안아주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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