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3 2020 =========================================================================
#493
[정말 오랜만이네요. 반가워요.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을 테지만.]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마이켈 총리의 얼굴은 무척이나 핼쑥해보였다.
사실 예정되어 있던 만남이 아니었는지라, 자리 자체가 다소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남 자체가 뜬금없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의식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독일 베를린을 찾은 강지혁! 프로모션 행사로 인해 포츠담 광장 소니 센터를 찾은 수많은 팬들이 이번 폭탄 테러로 인해...... 강지혁이 380억 원이나 되는 미스터 지 SUPREME POWER의 출연료 전액을 이번 폭탄 테러 희생자들 지원 및 포츠담 광장 복구를 위해 기부하겠다고 나서 다시금 화제를 불러...... 한편 강지혁은 미스터 지 프로모션 활동 도중 부상을 당한 다이그 리넨만 감독과 서른 명 가량 되는 스태프들 전부의 치료비를 전부 부담하겠다고 나서는 등......]
내 딴에는 나 혼자만 사고를 피했다는 그리고 나와 관련된 일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일말의 죄책감들을 떨쳐내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 진데, 언론에서 너무나도 과하게 이를 띄운 탓이다. 이렇게 한 나라의 총리를 마주하게 된 것은.
[감사해요. 독일 국민들을 대신해서 제가 감사의 인사를......]
사실 내가 사고 현장을 둘러보거나, 아니면 언론의 전면에 나서는 게 영 껄끄러웠다. 내가 프로모션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어찌 됐든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포츠담 광장 소니 센터를 찾은 것일 테고 이것이 희생자들의 규모를 한층 높인 주된 이유가 되어버렸으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씁쓸했다. 고작해야 수백억. 많은 돈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나의 생명에 비한다면 무척이나 미미한 돈으로 속죄 부를 샀다는 것이.
[질서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질서를......]
내가 포츠담 광장에 그것도 독일 총리와 함께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고 이는 그들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사람들이 너무 모이네요. 아직 점심 전이죠? 같이 하겠어요?]
나로서는 괜스레 모인 인파들로 인해 구조 작업을 방해할까 싶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네요. 아직 몸이 전부 회복되지 않아서인가요?]
역시나 속내를 마냥 숨길 수는 없었나보다.
후우, 지금 내가 마주한 상황들 자체가 워낙 깊은 감정들을 뿌리로 삼고 있었는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유지연과의 엉켜버린 실타래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나로 인해 경험해서는 안 될 일을 경험해야 했던 수많은 이들에 대한 죄책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설마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정치인이라서 그런 것일까. 마이켈 총리는 비교적 정확한 눈썰미로 나의 상태를 집어냈다.
[당신이 잘못한 것은 전혀 없어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나도 알고는 있다.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게.
하지만 이런 종류의 죄책감은 안다고 해서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잘못은 폭탄테러를 한 사람들이지, 난민들도 그리고 당신도 잘못한 게 없어요. 이유 없는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요.]
그렇다고 해서 나를 좋아해서, 내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의 프로모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그 사람들이 소니 센터를 방문했다는 게 없던 사실이 되지는 않아요.
차마 반문을 겉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이번 테러로 인해 마이켈 총리 또한 정치적으로 굉장한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점을 뉴스를 통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 또한 어려움에 처해있음에도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었다.
[운이 좋아서 혼자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건 ‘강’이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에요. 그런 따뜻함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네요. 정작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을 느껴야 할 이들은 굉장히 당당한데 말이에요.]
자신의 위로가 큰 효과를 보지 못했음을 그녀 또한 모르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약간이나마 효과가 있다는 점 그리고 자국민들을 위해 수백억에 달하는 자신의 출연료를 선뜻 기부하겠다고 나선 나를 위해 그녀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을 준비해가면서까지.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건데, 못 들어봤나요? 유로잭팟이라고.]
[이걸 저한테 왜...?]
언제 이런 걸 준비한 것일까.
볼펜과 함께 건네받은 복권용지.
물론 들은 적은 많다. 유로잭팟이라는 복권이 유럽 그리고 그 외 지역에서까지 굉장한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은 기사들의 단골 주제였으니까.
[이곳 호텔에 들어왔을 때 눈에 띄더군요. 요즘 이 복권이 한창 핫하거든요?]
하지만 전혀 예상외의 순간에 마주하게 된 유로잭팟이라는 복권은 확실히 뜬금없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운이 좋아서 자기만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겠죠? 그게 ‘강’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의 근본 원인들 중 하나일 테고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했다. 하지만 그 이유도 그 이유지만,
[프로모션 행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테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제쳐둬요. 원래부터 이곳 포츠담 광장은 번화가니까.]
너무나도 단호한 마이켈 총리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시 웃음이 나와 버렸다.
[혹시 알아요? ‘강’의 그 운이 아직까지 남아있을지? 당첨되면 그 중 일부라도 독일 국민들을 생각해주세요. 물론 지금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지만요?]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일까. 고작 수백억이라는 돈 때문에 그런 것일까. 내가 기부한 액수가 이번 폭탄 테러를 위해 모금된 기부액 가운데 단일 모금액으로는 가장 큰 액수라는 사실 때문일까.
과하다고 생각되는 배려에 부담이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복권 한 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행동과 더불어 받게 된 복권 한 장은 생각 이상의 위로를 내게 선사했다.
마이켈 총리의 배려 아닌 배려에 쓴 웃음을 애써 숨긴 채 나름 신중히 번호를 찍어버렸다.
그래 나의 운이, 부모님이 주신 선물로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난 만큼 차라리 당첨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정말.
*
[당첨자 발표는 모레에요. 아! 모레에 영국으로 건너간다고 했나요? 괜찮겠어요? 몸이 아직 전부 회복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다음에 왔을 땐 초대 약속을 꼭 지키도록 하죠.]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끝으로 마이켈 총리와 헤어졌다. 그녀는 한 나라의 총리. 나와의 한 시간 동안 지속된 식사시간 마저도 지금 상황에서는 충분히 무리를 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 위스키나 한 잔.]
어쨌든 나는 다시금 호텔 바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호텔 방에 가기엔 너무나도 이른 시간이었다. 방에 들어간 순간 바로 잠을 청할 수 있게끔 할 만한 것이 지금의 내게는 술밖에 없었다.
“어? 오늘도 술 드시는 거에요? 어제도 엄청 많이 드시던데!”
후우.
이 정도면 나를 기다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런 능청스런 표정 속에 담긴 그녀의 영악함을 모르기엔, 그녀에게 당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재연 언니 때문이죠? 지연 언니랑 오빠 사귀는 것 때문에.”
순간 술잔을 놓쳐버렸다.
[쨍그랑]
“빙고!”
어제처럼 자신을 계속해서 무시할까봐 그런 것인지. 김다인은 기어코 나로 하여금 자신을 마주보게끔 만들었다. 그것도 자신의 추측을 단번에 확신으로 만들 무척이나 간단한 수를 통해서.
[위스키 한 잔 그리고 코스모 폴리탄 한 잔. 거기다 안주는......]
유리 잔 값과 팁 그리고 새로운 주문까지.
영악한 수를 던져놓고 태연하게 행동하는 김다인의 모습이 더욱 얄밉게 다가왔다.
“근데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우울하게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진 않으실 것 같은데... 혹시 연관된 다른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저건 위로가 아니다. 김다인의 눈동자가 호기심을 가득 담고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기에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재연 언니가 헤어지자고 말했던 거, 자의가 아니어서 그런 거에요?”
“너...”
이제는 아예 대놓고 날 찔러오는 김다인의 행동에 말문이 턱하니 막혔다. 도대체 김다인, 너란 존재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을 도대체 얼마나 파고든 것인지.
무서워졌다. 눈앞에 있는 작디작은 여자애 한명이.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잖아요.”
“하아...”
“내가 자꾸 언급해줬잖아요. 재연 언니 정작 이별 통보는 자기가 해놓고선 왜 자꾸 이별 통보를 받은 건 자기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고요.”
그래 그 당연한 걸 난 하지 않았구나.
“무슨 술을 그렇게 연달아 마셔요? 잔술이 아니라 병 째 마시겠네. 이러다가.”
우울한 마음이 도져 연달아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마음은 답답한데,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말았다.
“넌 내가 삼촌 조카라는 거 언제 알았어?”
“네?”
내가 먼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해서일까. 김다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잠시나마 맺혔다.
“오빠 데뷔하고 나서 알았죠. 그때 PD님 신곡 오빠가 작사, 작곡? 그거 했을 때 언론에서 떠들썩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때 데뷔 앞두고 있었을 때였나? 아니, 데뷔했을 때였나? 어쨌든 그때 알았어요.”
“유재연이랑 나랑 사귄 거는.”
“흐음... 그거야 데뷔하고 나서 알았죠. 근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거에요?”
이 녀석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는 게 서글퍼졌다. 정작 물어봐야 할 이에게는 다가가지 못한 채,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녀석에게 내 속내를 털어놓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날 두렵게 만들었다.
“PD님이 재연 언니한테 헤어지라고 했던 거에요? 설마? 우와... 완전 드라마잖아? 이거.”
조그마한 단서를 가지고도 상황을 파악해버리는 김다인을 보면서 내 자신을 자책했지만, 대화를 이어가는 내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삼촌과 유재연 그리고 유지연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그녀가 유추해내길 바랐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혹시라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인지 그녀가 찾아내주길 내심 바라고 있는지 모른, 아니 나는 그러길 바랐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취기가 이 모든 나답지 않은 행동을 용납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김다인의 얼굴은 사뭇 그녀다운 모습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치만 PD님이 어떻게? 연습생들끼리는 그런 거 무조건 숨겨주지... 에? 설마? 지연 언니? 맙소사!”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이 꽤나 독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보다 씁쓸해, 마냥 달게만 느껴졌다. 그 독한 술이.
“오빠?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저기요? 그거 소주 아니거든요? 저기요? 얼음이 장식으로 하라고 주는 게 아니에요. 얼음이라도 타서... 저기요? 저기요? 아! 여기서 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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