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2 2020 =========================================================================
#492
[재연이 네가... 알아서 멀어져 줬으면 좋겠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극에 달해, 이런 상황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충격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었다.
수차례 데뷔의 문턱에서 좌절했기에,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데뷔를 준비하고 있을 그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마냥 이를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동안의 좌절이 독이 된 듯, 그는 끝없는 기약이 주는 희망고문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자꾸만 불어나는 체중, 연습 불참, 월말평가 불참. 데뷔를 코앞에 둔 이의 행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망가진 상태였다.
무슨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물론 춤, 노래, 작곡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그였기에, 처음 시작부터 그녀가 감당해야 될 주변의 시선들은 무척이나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쟤한테 홀려서 자꾸 성적 떨어지는 거 아니야?]
[맞아. 이번에 데뷔 조 겨우 들어갔다던데?]
[진짜? 대박. 보컬만 따져도 지리는데, 겨우 들어갔다고? 와... 유재연 쟤 완전 여우네. 남자 잡아먹는 여우.]
그가 조금만 삐끗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전부 그녀의 탓이 되고 말았다. 정작 그녀는 그의 그러한 모습들이 과거의 숱한 좌절로 인한 것임을 알고,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옆에서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그런 상황 자체가 비교적 익숙했다. 비록 그가 슬럼프를 이겨냈을 때 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을 때가 아닌 좋지 않은 상태에 빠졌을 때만 자신이 덩달아 언급된다는 점은 그녀 자신을 슬프게 만들었으나, 그저 그의 곁에 있는 시간들이, 함께 꿈을 꾸는 시간들이 그 모든 것을 이겨내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달랐다.
[요즘... 재연이 너도 성적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 맞지?]
하지 않던 변명까지 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변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전과는 그 정도에 있어서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그의 상태와 더불어 그녀 자신 또한 위기의 순간에 처하게 되어버렸으니까.
[내 말은 지혁이 뿐만 아니라, 너도. 너도 지금 위태롭다는 거 알고 있냐는 말이야.]
중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하루, 하루 쉬지 않고 달려왔던 자신의 길이 위태롭다?
그녀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함과 두려움에 그저 떨어야만 했다. 난생 처음 경험했던 대표님과의 독대가 그녀의 그런 감정들을 극대화시켰다.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서로의 연애 사실을 암묵적으로 숨겨주는 것이 연습생들끼리의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그녀와 그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그것도 대표님이 일개 연습생의 열애 사실에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사실이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어린 소녀에 불과했으니까.
[언니...?]
[나중에 가수가 됐을 때... 그때... 그때 만나면 되지 않을까? 서로...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언니이자, 부모님과 같은 역할을 대신하고 있던 유지연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너도 이번에 데뷔 조 들어갔고 그 친구도... 데뷔 조 들어갔다며. 그러니까 그 친구가 마음 다잡고 열심히 할 수 있게 재연이 네가... 먼저 놓아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언니인 유지연의 진심어린 조언에 그녀의 머뭇거리던 마음은 점차 어느 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건 다 변명이야. 언니 입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동생이 꿈을 이루는 거니까. 언니는... 네가 꿈을 이뤘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그를 위해서.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는 그를 되돌리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며 그녀는 그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건넸었다.
[우리 헤어져.]
[어, 어? 뭐라고?]
[더 이상 설레지가 않아. 보고 싶지도 않고.]
[자, 잠깐만 기다려!]
이 모든 게 핑계이자 변명일 수 있다. 아니 핑계이자, 변명이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데에는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꿈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 또한 큰 몫을 담당했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그날의 이별이 영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서로가 잠시 떨어져 있는 것 일뿐, 이제 데뷔를 앞두고 있는 그와 자신은 언젠가는 다시 그날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또 믿었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지난 10년 동안 그날의 선택은 그녀 자신을 셀 수 없을 만큼 후회하게끔 만들었고 지금에 이르러서 이는 그녀가 가장 믿었던 이에 대한 신뢰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으니까.
*
별다른 말을 들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마주한 눈빛들을 더 이상 보기 싫어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기... 곧 도착입니다. 도착하기 30분 전에 말씀해달라고 출국 때 말씀하셔서...”
“아! 감사합니다.”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통도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건네받지도 못했다.
내가 들었던 내용이 사실인지, 내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내가 못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큼 내가 그때 들었던 내용들은 명확했고 또한 충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밤새 오해를 할 만한 부분을 찾아봤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은 좀 어때요?]
[하하. 이게 누군가. 의식을 찾았다고 말은 들었네.]
[누가 누구보고 의식을 찾았다고 그래요? 3시간 전쯤에 의식 찾았다고 들었는데.]
[하하. 그런가? 하하!]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정리하지 않았다. 복잡해진 마음과 더불어 머릿속이 자꾸만 뒤엉켜 그 시작조차 꺼려질 정도였다.
[얼굴이 반쪽이 됐군. 지금이라도,]
[누가 누굴 걱정해요. 얼른 낫기나 해요. 프로모션 일정은 걱정하지 말고.]
[프로모션 행사를 도맡아 할 필요는 없네. 자네 몸도 지금 정상이,]
[의식을 잃었을 뿐이지, 누구처럼 갈비뼈 부러지고 두 다리에 깁스 하고 머리에 수십 바늘씩 꿰맨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다이그 감독님의 병문안을 끝으로 근처 호텔에서 바로 짐을 풀었다. 애당초 이곳에 온 이유 자체가 다이그 감독님과 더불어 혹시 모를 다른 스태프들의 부상 때문이었기에 더 이상 할 일 자체가 없었다. 의식이 없다던 다이그 감독님은 내가 비행기에 있었을 때 의식을 되찾았으며, 다른 스태프들 또한 다행히 가벼운 부상을 당한 게 전부라는 소식을 듣게 된 터라 오히려 그 장소에 내가 있는 게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삐용삐용]
폭탄 테러로 인해 어수선해진 거리는 오히려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중동 내전 지역처럼 곳곳에 널려있는 건물의 잔해들과 아직까지 구조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구급 대원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해 도리어 마음을 비울 수가 있었다.
[아무 위스키나 한잔.]
짐을 풀자마자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 지금의 내게는 정적인 공간보다는 동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갑작스런 유재연의 이별 통보는 내게 크나큰 아픔을 선사했었다. 나는 한순간에 떠난 그녀를 그리워하며 꿈을 잃어갔고 결과적으로 방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의 아픔이 내게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유재연의 이별 통보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 터라, 마음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단순히 그녀에 대한 사랑이 돌아왔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팁으로 하세요.]
유지연 그리고 삼촌.
이 두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날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지연에 대한 마음이 깊을수록 그리고 삼촌이란 사람이 내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모르지 않았기에 더더욱.
후우.
그녀가 어째서 그렇게 나를 밀어내려고 했는지.
동생인 유재연과 관련된 부분에서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내보이곤 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린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그런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가왔는지라 묘한 위화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한잔 더.]
유재연에게 미안했다. 그녀 또한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기에 더더욱.
나와 유지연이 연관되면 연관될수록 그리고 유재연 그녀 자신을 소재로 한 음악이 거리 곳곳에 퍼져나갈 때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에 어떤 감정들을 품었을까.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아 미안한 감정은 깊이를 더해갔다.
[나쁜 놈.]
[그래 내가 흑흑... 너 찼다고. 찼는데! 이건 흑흑... 너무 하잖아. 이건!]
[흑흑. 후회 안한다느니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다느니 하면서! 나 썩을 년 만들었으면, 흑흑... 그 정도 했으면 된 거잖아!]
예전에 한번 옥상에서 그녀를 마주했을 때, 내게 울면서 자신을 자책하던, 자신이 너무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내게 미약한 원망을 건네던 그때를 시작으로 그녀와의 과거가 머릿속에 하나, 둘 떠올렸다. 이내 내게 다가온 뜻밖의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
*
여기에 네가 왜 있는 건지.
그걸 묻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다가와 신기한 듯 쳐다보는 그녀를 신경 쓸 정도로 내 마음이 넉넉지가 못했다.
“에에? 뭐에요. 그 반응은.”
굳이 내가 묻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이를 털어놓을 사람이,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없진 않았다.
“적어도 놀란 척은 해주시라고요. 오빠?”
김다인.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멈출만한 골칫거리를 내게 선사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들었다.
“여행이죠. 여행. 그러다가 테러에 휘말릴 뻔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진짜 몰랐는데. 완전 대박! 이 정도면 우리 인연 아니에요? 오오오오빠?”
나와 유재연의 관계를 파악해내려던 그녀.
그녀의 그런 행동에 조금이라도 과거를 되돌아봤다면, 지금의 상황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도를 넘는 장난에 적당히 맞장구라도 쳐줬으면, 하아...
의미 없는 가정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튀어나와버렸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술잔을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넘겼다.
“뭐야, 너무해요. 오빠. 왔는데 아는 척도 제대로 안 해주시고. 흐음... 술만 드시는 것 보니까, 혹시 안 좋은 일 있으신 거?”
겉으로 보기엔 깜찍하고 귀여운 여동생. 하지만 진짜 모습은 다소 냉소적이고 또한 무뚝뚝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속이 좋지 않았다.
저런 행동이 다 이유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다른 때였다면 불안감을 느꼈을 테지만, 그러기엔 내 심사가 말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모습을 애써 무시할 뿐.
“의식 되찾으신 거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독일까지 오신 거에요? 그런데 술까지 먹어도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녀는 그런 나를 가만히 놔두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이제는 아예 자리를 잡고 날 괴롭힐 작정인 듯 그녀는 술과 더불어 안주까지 시킨 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크으...]
거북한 기분이 들어 술잔에 담긴 내용물을 연달아 목구멍으로 넘겼고 이는 내게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게끔 만들어준 옆자리 그녀의 행동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김다인 그녀가 이내 제풀에 지칠 때까지 나는 연달아 잔을 들이켰다. 복잡한 심사를 잠재우기 위해, 방에 들어갔을 때 바로 잠이 들 수 있게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