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0 2020 =========================================================================
#490
[삼촌... 흑흑... 엄마가, 엄마가 미안하다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그래, 그래. 지혁아.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그래.]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조카가 갑작스레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아내길 십여 분. 그는 그저 알 수 없는 말을 건네는 조카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설마 다시...”
“다시 무의식 상태가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기력이 많이 떨어진데다가 극심한 감정의 소모로 잠이 든 것...... 기력을 보충하게끔 영양 상태를 고려해......”
잠들어버린 조카가 그저 잠시 잠들어버린 것뿐이라는 의사의 확신 섞인 말에 그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털썩.
의사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유민재와 ‘그녀’를 뒤로한 채 박재성은 조심스럽게 조카 강지혁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꿈을 꾼 것일까.
꿈에서 있었던 일들을 꺼내놓으려는 마음이 조급함을 낳았는지, 조카 강지혁의 말은 횡설수설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재성은 조카가 무슨 꿈을 꿨는지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제주도 별장에서 엄마가... 아빠가... 꿈에서 깨면 안 된다고 막...... 근데 갑자기... 엄마가 원망했냐고 물었는데... 대답도 못하고... 나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삼촌...]
누나.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을 손수 키우다시피 했던 누나 박현애.
그랬기에 누나 박현애가 매형 강한석과 낯선 타국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박재성이 받은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충격 속에서 슬픔을 추스를 충분한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은 아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본 채, 넋이 나가버린 조카 강지혁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초인적인 힘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 후로 그는 강지혁을 위해 살아왔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오로지 죽은 누나의 눈동자를 빼다 박을 정도로 닮은 조카 강지혁의 눈을 바라볼 때만이 그가 자신의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하게 허용된 시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가 완벽한 보호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 조카 강지혁을 챙겨줄 만한 시간은 항상 부족했으며, 그 결과 강지혁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와 조카의 관계는 삭막하다 봐도 무방할 정도로 메말라있었다.
더욱이 한 회사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원치 않은 여러 이유들로 조카인 강지혁의 가슴에 대못을 박게 되면서 그는 조카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의 감정들을 숨겨야만 했다. 그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의 눈빛에 담겨있는 원망이, 죽은 누나의 원망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다가왔으며 이는 그 자신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참아내야만 했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스윽.
살며시 다가와 조카의 손을 잡는 이의 모습에 박재성의 상념이 중단되고 말았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게 훤히 드러날 정도였는지라 인기척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지연 그녀가 품고 있는 혼란의 씨앗이 다시금 조카를 휩쓸 수도 있다는 점에 그녀를 바라보는 박재성의 복잡한 심사가 곧바로 행동으로 드러났다.
“유지연씨. 우리... 저랑 잠깐 얘기하시죠.”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유지연 또한 박재성 그의 속내를 모르지 않은 듯 했다.
*
눈이 부시다.
두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눈이 부셨다. 그래서 순간 나도 모르게 상체를 번뜩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두 눈을 떴을 때 바라볼 수 있는 광경이라는 것은,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그리고 바랐던 광경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
꿈에서 나와 버린 것일까.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겨있었을 때가 너무나도 실감났기에 도리어 지금의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느껴지는 온몸의 찌뿌둥함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가 내게 현실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지혁아!”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임은 틀림없었다. 반가움과 안도감이 가득 담겨있는 삼촌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맺힌 것을 보면.
“너 이 자식. 삼촌 걱정이나 시키고.”
민재 삼촌의 격렬한 포옹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빠가 하늘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을게. 사랑한다. 아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길. 엄마는 아빠가 지키고 있을게. 알겠지?]
[건강하고 나중에 먼 훗날에... 먼 훗날에 다시보자. 우리 아들. 사랑해! 엄마가 항상 지켜보고 있을게. 그러니까, 외로워하지......]
꿈임에도 너무나도 선명한 기억들. 그 기억들과 더불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내 가슴속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의 충만을 경험하게끔 했다.
“잘 할게요. 지켜봐주세요.”
“어?”
“아니야. 삼촌. 나 배고파. 삼촌.”
“어? 그래. 그래. 잠시만.”
다짐 섞인 말을 뱉음으로서 아쉬움의 상당부분을 떨쳐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따뜻함이 그리고 항상 지켜보고 있겠다는 엄마, 아빠의 말이 그리하게 만들었다.
“지혁아!”
물론 깨어있는 나를 보며 다급히 달려오는 삼촌과 그 뒤에 자리한 뜻밖의 얼굴에 당황한 것도 큰 몫을 했지만.
*
“13일 동안?”
믿기지 않았다.
내가 병실에 있다는 것조차 의아했는데, 잠들어 있는 기간 그러니까, 꿈속에서 부모님을 만났던 짧은 시간이 13일 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무의식 상태를 의미하는 게.
“뭐?”
하지만 길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은 이내 그 시간동안 일어났다는 수많은 일들로 인해 무척이나 짧게 느껴지고 말았다.
“이제 막 깨어난 너한테 이런 복잡한 얘기 같은 거 하기는 싫은데 상황이 상황,”
“삼촌 자세하게 얘기해줘. 괜찮으니까.”
중국에서 수백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중화통신의 본사가 있는 베이징에 집결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었지만, 상해와 일본 도쿄, 오사카, 대만 등지에서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이 분명했다.
“당장 나 일어났다고. 아픈데 없다고 발표를,”
“그리고...”
그런데 내가 알아야할 상황이 이게 끝이 아닌 듯 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소식만 해도 13일 동안 일어났다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엄청났을 진데 말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어. 그것도 연쇄폭탄테러가.”
폭탄테러가 일어났다는 말에 놀라기는 했으나, 의아하긴 했다.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사건, 사고들은 나와 관련된 일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불안해졌다. 저 폭탄테러가 나와 연관되어 있을 것 같아서.
“설마...”
“베를린에서 프로모션 행사 중이던 다이그 감독이 중상을 입었어. 듣기론 아직 의식을 못 찾았다고...”
“뭐, 뭐?”
“다행히 그날은 조연 배우들이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이게 과연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인 것일까. 삼촌의 말과 더불어 핸드폰으로 살펴본 관련 기사는 내 자신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선사했다.
[기자회견 장에서 어? 응? 아...직... 가면 응, 응. 안... 돼... 어? 아직 가면 안 된다고?]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직 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아빠와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엄마의 이어진 행동.
순간 떠오르는 꿈 속 기억. 말을 잇지 못했다.
[나 그럼 더 있어도 되는 거지? 그런 거지?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내가 무의식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독일 프로모션을 소화해내는 것은 기정사실일 것이다. 주연 배우로서 당연한 의무이자, 내 6월 일정은 이로 인해 짜여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최소 다이그 감독과 같은 신세가 되었을 게 뻔했다. 그래서 소름이 돋았다.
아마 그런 내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성 삼촌이 다급히 걱정을 토해낸 것이.
“지혁아. 왜? 상태가 안 좋아? 의사 불러올까? 어?”
“삼촌...”
“어, 그래. 삼촌 여기 있어.”
“엄마가... 아빠가... 자꾸 가지 말라고 했어.”
“뭐?”
갑작스런 나의 말에 삼촌 또한 말문이 턱하고 막힌 듯 했다. 하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분명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하지만 이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꿈에서 나가야 하는데, 계속 붙잡았어. 지금 가면 안 된다고.”
꿈속 기억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기억들이 단순 꿈이랑 생각지 않았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을 고려해보자면 더더욱 그러했다.
“지혁아...”
무척이나 복잡해 보이는 삼촌의 모습에 그리고 다시금 떠오른 꿈속 기억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아. 이러다가 진짜 울보 소리 듣겠네.
*
[그럼 너 깨어났다는 거 보도하고......]
민재 삼촌이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발표하기 위해 자리를 뜬 사이 나는 무척이나 난감한 상황에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몸이 우선이니까.]
재성 삼촌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병실을 빠져나가자 비로소 난감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와 있었네.”
“뭐?”
하지만 이는 조금은 섣부른 판단에 불과했다.
“네가 아픈데... 어떻게...”
눈을 떴을 때 바로 볼 수 있어서, 그래서 너무 좋아서 건넸던 말에 불과할 진데 그게 그녀의 마음을 자극한 듯 했다.
“바보. 바보!”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그녀를 보자니, 마음이 착찹해졌다.
“미안해. 다시는 이런 걸로 걱정 안하게 할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녀를 안은 채 등을 토닥여주는 것뿐이라서 더욱 그러했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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