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3 2020 =========================================================================
#483
“안녕하세요?”
정적이 가득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엄청나게 큰 건물이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회사의 사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내가 건넨 인사가 방아쇠를 당긴 게 된 듯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진짜야. 진짜.”
“대박. 나 강지혁 처음 봐.”
“팔, 다리 봐. 어떻게 저렇게 길지?”
“박재성 조카라잖아. 박재성도 팔은 길잖아. 키도 크고.”
네, 네. 제가 박재성 조카입니다. 키도 키고 팔도 길어요. 아! 물론 다리도 길지요. 삼촌은 허리가 길지만.
뭔가 동물원 원숭이가 된 듯 해 조금은 언짢아 졌지만, 그래도 좋은 뜻으로 이곳에 방문한 만큼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내 앞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할아버지 한 분이 서계셨으니 오죽할까.
“저기... 어디 들어가서,”
“아!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놀라서.”
“아, 아니에요.”
이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인가? 심장병 아이들한테 수십 년간 후원해주고 있다는 할아버지?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무척이나 안 좋은 습관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겉모습과 아이들한테 수십 년간 후원해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연상이 잘 되질 않았다.
카리스마 있는 경영인.
뭔가 어려움이 절로 느껴지는 외형에 무게감 있는 목소리.
드라마로 따지면 그룹의 회장님으로서 냉철한 판단만, 아! 이 할아버지 진짜로 이 그룹의 회장님이시지?
어쨌든 무서워 보이는 회장님을 따라가다 보니, 한사람, 한사람 우리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 이동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무슨 느와르 영화를 찍고 있는 듯 했다.
“그... 밑에 사람들한테서 들었습니다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 그래도...?”
“당연히 되죠. 할아버지랑 할머니를 본적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계셨으면 비슷한 나이셨을 거에요.”
관리사님보다 어른인데, 꼬박꼬박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게 조금은 불편해졌다. 그래서 그냥 말을 편하게 하시라고 했지만, 무서운 인상의 회장님은 여전히 내게 말을 높여주었다.
“홍보팀한테 듣긴 들었소만... 우리 회사의 광고를 찍고 싶다고 하던데...”
“아! 그 꼭 광고가 아니라,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거에요.”
그나저나, 일개 연예인이 아니 조금 많이 잘나가는 연예인이 광고 찍고 싶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룹 회장님이 마중을 나오시나? 이거 좀 오버도 많이 오버인데. 흐음.
“어째서?”
“사실 저는 잘 몰랐었는데, 제가 후원하는 아이들 중 한명이 회장님 덕분에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 심장병을 앓았는데,”
“아!”
“이런 일이!”
“아... 역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변이 있던, 꽤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반응을 보건대, 회장님의 이런 선행을 주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하긴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그 아이는 지금...?”
“네? 아! 지수는 지금 의대 다니고 있어요! 자기처럼 아픈 애들 고쳐주고 싶다고 소아과 의사가 될 거래요. 그래서...... 엄청 열심히 다녀서 장학금도 받고 있어요.”
“호오... 의대를?”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회장님 또한 자기가 살렸던 아이가 다른 대학도 아니고 의대를 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놀란 듯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신나서 말을 이어가게 됐다.
흐음.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뭔가 무서워보였던 눈앞 회장님의 인상이 어느새 굉장히 푸근하게 느껴졌다.
“네. 지금 Y대 의대 3학년인가? 그럴 거에요.”
“Y대를? 허허...”
“아무튼 애들한테 마련해준 숙소를 갔는데, 아참 지수가 숙소 총무 역할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선반에 낭심 라면이 아니라 똑똑이 라면 밖에 없는, 아! 죄송해요.”
그래서일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멍청한 놈아. 똑똑이 회사에 와서 낭심 라면 얘기를 해? 너도 참 진짜.
“허허... 아니네. 아직 우리가 낭심에 비하면 딸리는 게 사실이지. 그래서 갑자기 우리 회사 광고를 하고 싶다고 한 이유가 전부...”
“지수가 똑똑이 라면만 사는 이유를 알아보다보니, 회장님이 심장병 애들 후원하고 계시다는 거랑 똑똑이 회사가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걸 알아서 제가 도움이 될 방법이 뭘까 찾다가...”
회장님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는지라,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했다. 나 참. 분위기 좋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사실 제가 해외 스케줄이 많아서요. 뭔가 시간이 많이 드는 방법으로 도움을 드리는 건 힘들 것 같은데...”
“그럼 지혁 군이 편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광고가 제일 편하긴 한데... 제가 광고효과가 있을 지가 잘...”
“광고라고 하면 어떤?”
내가 이 회사에 도움이 되고 싶은 이유. 간단했다. 이 회사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고 회장님이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선행 가운데 내가 후원하고 있는 아이를 살리는 것이 포함되었다는 점. 그게 전부였다.
“광고를 한다면 무상으로 찍는 대신, 수익의 아주 조금이라도 아이들한테......”
사실 돈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편하긴 했다. 별도의 시간 투자 없이 그저 회사에 투자를 하거나 아니면 회장님의 후원에 동참을 하거나.
하지만 이는 똑똑이 회사나 회장님이 해왔던 일에 숟가락을 얻는 일 밖에 되질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꾸준히 해왔던 일이 내 인지도나 인기에 뒤덮일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차선이 광고였다. 다만 이 방법은 확신이 없었다. 내가 광고 효과가 있을 지가.
“부모님을 일찍 여의였다고 들었는데... 실례가 되는 말인가요?”
“네? 아! 아니에요. 다들 아는 사실인데요. 뭘.”
“정말 고맙습니다.”
“네? 아, 아! 왜 이러세요. 그... 저는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
회장님이 아니 그걸 떠나서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나한테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현하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셔?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회사 차원에서도 그리고 아이들한테도.”
“제가요? 저 광고라고는 한 3년 동안 사성 쪽 광고 찍은 게 전부라서... 라면처럼 식료품 광고에도 효과가 있을 지는...”
사성과 관련된 광고를 찍었을 때 효과가 좋았음은 자신할 수 있다. 성과 인센티브만으로도 기본 계약금을 훌쩍 넘겼을 정도로 돈 벌이가 굉장했으니까.
하지만 광고는 이미지이다. 나의 이미지가 보다 친숙함을 요하는 식료품 광고에까지 통할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더욱이 사성 관련 광고 이후 광고를 찍지 않았는지라, 이러한 걱정은 클 수밖에 없었다.
“큰 도움이 될 게 확실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뭐야, 갑자기?
내가 아닌, 회장님을 쳐다보며 나의 광고 효과를 확신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뭔가 무서워졌다. 아니, 이러다가 효과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다들?
“순이익의 1%. 순이익의 1%를 아이들한테 기부하도록 하지요.”
“회장님!”
“순이익이라니! 너무 과하십니다. 회장님!”
순간 들려온 회장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꽤나 놀란 듯 했다. 순이익 1%가 큰 건가?
이게 큰 건지, 작은 건지 잘 모르는 나로서는 주변의 분위기에 발맞춰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 어차피 자세한 사항은 관리사님과 이쪽 관계자가 할 것이기에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인 듯 했다.
“저기... 조금 과하신 건...”
“부모님이 정말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네?”
뜻밖의 말을 들어서인지 자연스럽게 반문하고 말았다. 하지만 뜻밖의 말에 대한 의아함보다는 그 말에 대한 진위 여부가 너무나도 궁금해져버렸다.
“정말 그러실까요?”
“나이가 들어도 세상 소식이 궁금해 신문은 매일 봅니다. 거기서 지혁군이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종종 볼 수 있었죠.”
“아...”
“어린 나이인데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니, 부모님께서도 하늘에서 엄청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미스터 지 관련 행사가 잡혀 있었기에 회장님과의 만남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을 맺었다. 하지만 회장님이 마지막 건넸던 말이 남긴 여운은 끝을 맺지 않고 계속해서 내 가슴속에 남아 나를 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엄마, 아빠.
하늘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엄마,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엄마, 아빠 생각을 자주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들에서 부모님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 알았어. 지금 가. 걱정 마. 행사 자리에는 안 늦어. 어? 우냐고? 뭔 소리야. 삼촌. 내가 울긴 왜 울어? 삼촌 오늘 작은 엄마한테 혼났어? 왜 이상한 소리를 해? 아, 됐어. 10분 내로 도착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 끊는다. 삼촌.”
뭔가 흐릿흐릿해진 주변 사물들에 차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러 재촉했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차안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결과 10분은 어느새 20분이 되었고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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