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2 2020 =========================================================================
#482
“야 베드신 찍다가 그거... 들켰으면 어떡하지?”
“뭐, 인마?”
녀석의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이 불러온 대참사에 말문이 턱하니 막히고 말았다.
“거기 내 이름 적혀있단 말이야. 베드신 찍을 때 거기에 공사하고 하니까, 안 들켰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별도의 살색 테이프를 이용해 은밀한 부위를 가리는 것이 기존의 베드신 촬영법이었다면 요즘엔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담아내기 위해 그런 작업은 그저 촬영의 각도만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파다했으니까.
“미친놈아! 그러니까, 무슨 이름을 거기다!”
“왜? 그게 어때서?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다들 좋다고 하던데? 후우... 야. 내 이름 영어로 필기체 쫘악 쓰면 얼마나 멋있는 줄 아냐? 타투로 딱 새기면 어?”
“뭐, 뭐? 뭐가 어쩌고 저째? 그리고 다, 다들?”
“난 여친 생기면 항상 하던 거라 딱히 거리낌 같은 거 없는데, 너 의외로 순진하게 논다? 자식 귀엽긴.”
“뭐라고?”
“게다가 서린이도 일주일 전에,”
[딱]
“야! 이씨 너 손 존나 맵다고! 아이, 씨!”
전부 눈이 잘못된 건가?
뭐가 좋다고 이딴 녀석한테 빠져서 그런 ‘행위’를 하게 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이건 절대 부러워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이 녀석이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길래, 여자들이 은밀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동영상으로 남기려 하고 또 은밀한 부위에 타투까지 하게 됐는지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아서 저절로 손이 나가게 됐다. 진짜다.
“인마 부럽다면 부럽다고 말을 해. 말을! 미친! 몸은 존나 좋아가지고 덤벼도 쳐 맞을 것 같아서 반격을 못하겠네. 아씨. 개 아파.”
뭐? 내가 부러워? 누굴? 널? 미친! 이 자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
그런데 녀석의 말에 발끈하게 되면서 저절로 방금 전의 행위를 되풀이하려던 찰나였다.
“너?”
“어, 어?”
“멍?”
내가 때린 곳은 녀석의 뒤통수였다. 그런데 무심코 드러난 녀석의 쇄골 쪽 부근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렸다.
“야, 너 어디 다쳤냐?”
교통사고를 당한 건 나일 진데, 녀석의 쇄골 쪽에는 시퍼렇다 못해 시뻘게진 멍이 잔뜩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 씨. 눈도 좋네.”
“뭔데? 너 요즘 어디서 맞고 다니냐?”
“맞고 다니긴. 다 사랑의 흔적이지.”
“에?”
이해가 안 갔다. 이내 녀석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지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녀석이 털어놓은 얘기는 내게 꽤나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내 취향이 있으면 상대 취향도 존중해줘야지. 안 그래?”
“너 그럼... 설마?”
“이런 건 처음이지만. 뭐, 나쁘지만은 않더라고. 맞는 건 아직까진 조금 그렇지만, 때리는 건 의외로... 너 혹시 귀갑 묶기라고, 에이 아니다. 네 수준 딱 보니 아직 거기까진... 어쨌든 서린이가 약간 SM에 귀갑 묶기 당하는 거? 뭐, 그런 구속 플레이 당하는 거 좋아해서 하다보니까 배워가는 재미가 있더라고. 뭐, 내가 그동안 모솔들만 만나서 그런가?”
말도 안 돼. 이게 말이야 방구야?
청순하게 그리고 수줍게 내게 웃음 짓는 모습.
이게 바로 서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물론 의도치 않게 서린과 성준 녀석의 관계 장면을 목격하게 된 적은 있었지만, 어쨌든 내 기억속의 서린은 방송 상에 보여 지는 모습과는 달리 수줍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애였다. 방금 전 성준 녀석의 말에 깨져버린 거울처럼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진짜 내가 만난 여자 중에 서린이가 젤 잘한다니까? 박주현도 가르치니까 꽤 잘하긴 했었는데, 비교 불가...... 솔직히 안 해본 거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서린이 만나고서는... 하아.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너한테 하고 있는 거야? 어디서 얘기가 여기까지 새어,”
[딱]
“악! 야 이씨! 너 진짜 싸울래? 와... 이번엔 진짜 대박. 와... 이씨!”
진짜로 덤빌 듯이 내게 달려들려고 하는 성준 녀석을 무시해버렸다. 유빈 녀석도 그렇고 나도 그리고 성준 녀석도 다른 평범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자 친구와 관련된, 그것도 이런 민감한 일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는 성격이 아닌지라 내심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야! 어쨌든 방법 좀 생각해봐. 타투는 그렇다 쳐도 나 진짜 시사회 가면 완전 끝장날 것 같다니까? 무슨 방법 없냐?”
네가 친구냐? 아오.
사고는 지가 쳐놓고 다짜고짜 나한테 대책을 강구해달라는 녀석의 말이 무척이나 얄미웠다. 하아, 은현 형이랑 민수 형은 이 녀석을 도대체 어떻게 통제한 거야? 나 원 참.
*
“사고가 나셨다던데, 괜찮으신 겁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몸 상태를 묻는 걸 보니, 앞으론 절대 사고를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주변 사람들의 걱정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수준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무리가 아니었다.
“진짜 다친 데 하나도 없어요. 진짜.”
걱정스러운 눈빛을 건네는 관리사님을 보자니, 서둘러 화제를 돌려야만 할 것 같았다.
“여행 다녀오신 건 괜찮으셨어요?”
작년 겨울에 보내드렸던 스위스 여행 얘기가 나오자, 관리사님의 얼굴이 그래도 제법 가벼워졌다.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혁씨.”
“아니에요. 저한테 앞으로도 잘 해주시라고 뇌물 드린 거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맞다. 그나저나, 그 자제분이 이번에 엄청 좋은 회사 이사가 됐다고 하시던데?”
밝아 보이는 관리사님의 얼굴을 마주하다보니, 일주일 쯤 전 재성 삼촌에게서 들었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좋은 소식이 절로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에이. 저만 빼고 다 알고 있던데요. 뭘. 중국 홍콩에 있는 금융? 흠... 무슨 회사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엄청 좋은 회사에 그것도 스카웃 돼서 이사가 됐다고 하시던데... 진짜 축하드려요. 역시 관리사님을 닮아서 그런지 엄청 똑똑하신가 봐요. 저번에 듣기론 하버드 대학에서 막 수석도 하고 막 장난 아니었다고 하던데...”
“하하. 저를 닮아서라기보다 자기 스스로가 열심히 한 덕분입니다.”
단순히 노력으로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수석도 하고 이사로 스카웃까지 된다?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그러기엔,
“그런 것 치고는... 이번에 손자분도 예일? 애일? 그... 미국에서 유명한 대학 들어갔다고...”
집안 자체가 워낙 대단했으니까. 아니 듣기론 애일? 예일? 그 대학 들어가는 거랑 졸업하는 게 하버드만큼이나 엄청 어렵다던데.
“제 자식 놈도 그렇고 저도 바빠서 신경을 잘 못써줬는데, 이게 다 며늘아기 덕분입니다. 며늘아기도 예일 출신이라, 아빠가 다녔던 하버드보다는 예일이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아니, 이 정도면 진짜 천재집안 아니야? 관리사님도 고시를 일반 대학 시험 보듯이 합격해버린 사람인데 자식에 손자 그리고 며느리까지? 나 참. 진짜 세상 불공평하네. 어? 그러고 보니?
“관리사님 그러면 손자 분은 기숙사?”
“예? 아! 예. 다행히 성적이 좋아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다만, 예일 자체가 컴퍼스 크기가 큰 대학이기도 하거니와 외국인인지라 조금은 멀리 떨어진,”
“차!”
“예?”
뜬금없는 나의 말에 관리사님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저번에 최수덕? 그 얘,”
“아, 최수덕 군에게는 지혁씨가 지시하신대로 차를 제공했습니다. 모델명은 포르쉐 카위엔으로서 가격은 2억 4천만원대... SUV 치고는 유류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성적에 따라 유류비를 지원한다고 했으니 동기유발도 될 것이니만큼,”
“그거! 그거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그 관리사님 손자 분한테!”
“예?”
관리사님의 이어질 반응이 절로 예상됐지만, 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지혁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이. 어떻게 그래요. 손자 분이 그 유명한 내일?”
“예일입니다.”
“예, 그 예일에 합격했다는데!”
관리사님과 내가 남도 아니고, 선물 하나쯤은 해주고 싶었다. 그리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걸로 해서 입학 선물로 드릴게요.”
“지혁씨 너무 과한,”
“그 미드보면 신입생 때 막 장난 아니라는데, 무시당하면 어떡해요? 막 동아리 같은 데서 동양인이라고 안 받아주면,”
“지혁씨 도대체 어떤 미드를 보셨길래,”
아니 관리사님은 진짜 미드도 안보셨나?
미드를 보면 신입생 때 기숙사 파티도 하고 또 동아리 들어가면 신입생 파티도 하고 그러는데, 그때 이미지가 정말 중요하다. 그때가 여자 친구를 만들기도 또래 친구를 만들기도 가장 쉬운 하지만 잘못하면 학교생활을 무척이나 쓸쓸하게 보낼 수도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공부만 엄청 해서 좋은 대학 갔는데, 대학에서도 공부만 하면 인생이 너무 슬플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래도 스트레스를 풀만한 거리는 있어야 되는 게 정상이잖아? 기계가 아닌 이상.
“공부 열심히 하라고 주는 선물이에요. 그리고 관리사님도 좋잖아요?”
“예? 그게 무슨?”
“혹시 알아요. 손자분이 엄청 빨리 증손자를...”
증손자의 위력은 대단했다.
“감사합니다. 지혁씨.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다니...”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관리사님한테 너무 많은 일들을... 제가 좀 일을 너무 많이 벌였죠?”
계속해서 내 선물을 사양하던 관리사님이 이내 감사하다는 말로 상황을 종결시키셨다. 증손자 한마디에. 역시 어른들은 손자, 증손자 같은 아이들을 좋아하시나보다. 하긴 그 애들을 노후를 포기한 채 계속해서 봐야한다는 걱정거리만 없다면야, 싫어하는 게 이상하겠지.
*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레토르트 식품과는 달리 현재 저희의 라면 식품 점유율은 10.8%로 업계 3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점유율 10.8% 그리고 업계 3위.
2분기 그리고 1반기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인 만큼 회의실에 자리한 이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회장, 대표이사, 이사.
회사를 대표하고 또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 모두가 자리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회의실을 감도는 씁쓸한 기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낭심은?”
“낭심은 2분기 점유율 50.89%로 1분기 점유율 50.13%에서 다시금 상승세를,”
발표를 하고 있던 부장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회의실에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은 웅성거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2015년부터 10% 점유율을 달성하며 업계 3위의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업계 1위 낭심 그리고 2위 낫떼 등 대기업의 파상공세에 좀처럼 그 이상의 점유율에 도달하고 있지 못한 채 답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똑똑이.
똑똑이 또한 대기업이다. 하지만 재계 순위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무늬만 대기업일 뿐 실상은 중견기업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라면의 맛과 가격 그리고 사회공헌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대기업들의 파상공세에 그들은 여전히 답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막대한 광고비를 감당할 만큼의 여력이 없었으니까.
“뒤늦었지만, 중국, 일본, 기타 아시아지역의 해외 판로를 개척함으로써 지금 상황을......”
그렇게 회의는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다. 이렇다 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
“예?”
홍보팀을 담당하고 있는 김미영 팀장은 갑작스런 전화에 절로 반문하고 말았다.
[소속 연예인이 똑똑이의 팬이라서요. 그룹 회장님도 그렇고 회사 차원에서도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계시다던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얼굴을 찌푸림과 동시에 전화를 끊어버리려 했다.
[광고에 무상으로 출연하고 싶다는,]
“저기요. 이만 끊겠습니다. 장난은 댁 선에서 끝내세요. 바쁜 사람 불편하게 하지 말고.”
이런 전화가 너무나도 흔했다. 장난 전화 또는 같잖은 술수로 광고를 따내려는 연예계 회사는 그녀가 이 일을 하면서 숱하게 경험했던 것들이었다.
안 그래도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회사 사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전화를 끊어버리려는 행동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머뭇거림이 생겨버린 것은.
“뭐, 뭐라고요?”
홍보 1팀 사무실을 가득 메울 정도로 언성을 높인 김미영 팀장으로 인해 팀원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팀원들의 눈빛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