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6 2020 =========================================================================
#476
[왕이 없어도, 왕이 있어도 고르단 백성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네.]
CG작업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판타지영화 특성상, 배우들 대부분이 대본과 자신들의 상상력에 의지해 연기를 해야만 했다. 당연히 연기하는 게 어색하고 또한 여려 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들 운명의 전쟁 촬영에 베테랑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각자의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연기 자체에서 만큼은 전혀 어색함을 느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이 당신이 당신의 자리를 찾아가지 않은 이유입니까?]
[자네...?]
[두네달인을 상징하는 장수(長壽). 가르드의 말을 듣자니, 당신은 60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외형으로 세상을 누볐다더군요.]
[그것만으로는,]
[물론 두네달인들이 모르도스와의 전쟁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해도 아직까지 그 수가 제법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르도스의 부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중간대륙 곳곳을 누비는, 흔히들 순찰자들로 불리는 수상쩍은 인물들이 바로 그 두네달인들이라는 것도.]
이제는 배우들과도 제법 친근해져, 연기를 하는 것이 더욱 수월해졌다. 나의 분량이 많아짐에 따라 이는 무척이나 호재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왼손 검지에 끼고 있는 반지. 바라딘의 반지로 고르단의 왕에게,]
[그만, 그만하게.]
[평화의 시기에 왕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곧 간절히 원할 겁니다. 사우스 팔라스, 로단, 지르단, 소노린... 그들이 혈맹의 약속을 지키게끔 할 수 있는. 그들의 잊혀진 왕을.]
아리신의 고뇌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자, 낯선 복장에 과묵하기까지 한 길잡이 ‘리’의 특별함이 드러나는 장면인지라 영화의 무척이나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대신 피를 흘려줄 ‘멍청한’ 이방인들 또한 없지 않습니까.]
[멍청하다니! 자... 자네. 도대체.]
모르도스로부터 중간 계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던 두네달인. 그런 그들의 곁엔 고고한 엘프도 용맹하기 그지없는 드워프도 그리고 그들을 왕으로 내세웠던 수많은 인간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중간 계에 머물던 이방인 카린만이 존재했을 뿐.
[카린은 더 이상 우릴...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말인가...?]
[카린은 병력들을 이끌고 오기로 했던 엘프, 드워프, 인간들을 끝까지 기다리며... 그날 고향이 아닌 낯선 대지에 자신들의 모든 피를 흘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카린은 그날의 전투 이후 중간계의 그 어떤 곳에서도... 뭐, 그건 순찰자인 아리신. 당신이 더욱 잘 알 텐데 괜한 소리를 했군요. 이르지만 저는 이만 눈 좀 붙이러 가겠습니다. 내일도 길 안내를 하려면 체력을 비축해놔야 하거든요.]
3부의 제목이 동방의 빛인 만큼, 2부의 중간 장면에 해당하는 이번 신에서 드디어 카린과 관련된 얘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기에 배우이기 이전에 나 또한 운명의 전쟁 팬으로서 절로 관심이 더해졌다. 촬영을 하면 할수록 카린은 나와 연관 있는 이들을 일컫는 말임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컷! 나이스!]
뭐, 3부 대본이 곧 나온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모든 사안을 알 수 있을 테지.
[오늘 꽤 괜찮은데?]
[에?]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여?]
피터 제이크 감독의 컷 소리에 옆에 있던 바위에 털썩 주저앉은 나의 등을 조나나가 가볍게 툭 쳤다.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오늘 연기하는 내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솔직히 조금 걱정했거든.]
[에? 그게 무슨?]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나와 연기 호흡을 나누던 신들에서 이상함을 느꼈다는 소리인 것일까. 꽤나 심각하게 다가올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조나나로 인해 마음이 절로 심란해졌다.
[하하. 물론 연기 얘기는 아닐세.]
[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조나나의 의도와 조나나의 말 뜻 모두.
[자네... 조금 위태로워 보였거든.]
위태롭다? 내가?
[어제, 그제 휴가에 서울을 잠깐 갔다가 왔다더니, 향수병 때문에 그랬나? 하하. 그동안 스케줄도 그렇고 너무 자기 자신을 혹사 시키는 것,]
내 자신이건만, 그런 내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기 가장 힘든 것은 도리어 내 자신인 것 같다.
미스터 지 촬영 후반부터 묘한 권태감이 나를 휩쓸었고 이를 털어버리기 위해 더욱 촬영 준비에 몰두했던 것 같다. 이는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운명의 전쟁 촬영에 다시금 합류하게 됐을 땐, 심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상태였다.
물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더욱 촬영 준비에 힘쓰려고 했다. 주연 배우로서 영화 촬영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고 하루 빨리 동료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연기에는 문제가 없었어. 도리어 내가 감탄할 정도로 자네와 호흡을 맞추는 게 꽤나 재밌었고 몰입도 잘 됐거든.]
[그런...]
[다만, 촬영 외적인 부분에서 자네가 무척이나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이라네. 그런데 오늘 보니 말끔히 사라졌군. 하하. 이제 술 한 잔 하자고 말을 꺼내도 실례가 안 되겠어? 하하.
서로 호흡을 나누다보면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것이 연기외적인 부분일지라도.
그래서인지, 내가 위태로운 상태임을 그는 나보다도 먼저 자각한 듯 했다. 나는 이를 알고 있음에도 이것이 이다지도 동료배우들에게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를 애써 외면한 듯 했고.
[주말 휴가 때 대본만 들여다보지 말고 주변을 좀 둘러보게나. 여기 뉴질랜드에도 코리아 타운이 있나? 있다면 거기 가서 기분전환이라도 좀 하게. 배우들한테는 휴식도 무척이나 중요하거든.]
고마웠다. 사적인 부분까지 걱정해주는 것은, 웬만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오지랖에 불과한 이곳 생활에서 그 또한 저런 말을 하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틈틈히 시간 보내서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조나나.]
[하하. 고맙긴 무슨. 오늘 촬영은 이게 끝이지?]
[네. 방금 신이 끝이었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 그리고 술자리는 조만간 같이 가져요. 저한테 좋은 술이 있으니까.]
꽤나 흥미롭다는 듯, 내가 가진 좋은 술에 대해 관심을 표하며 작별인사를 건네는 조나나를 뒤로 한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언급한, 위태로운 나를 보다 여유롭게 만들어준 ‘서울’이 지금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
*
“뭘 그렇게 헐레벌떡 와?”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실감이 됐다. 옆에 그녀가 있다는 게.
[이럴 시간 있으면 쉬지. 여기까지 왜 왔어?]
직접 서울로 가서 그녀를 마중 나갔다. 돌아온 건 핀잔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몇 시간은 더 빨리 그녀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냥 보고 싶어서.”
“뭐래.”
내 말에 부끄러운 듯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려버린 그녀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하루 종일 뭐했어?”
나를 보러 왔지만,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이렇게 촬영이 끝난 저녁 늦은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이기적인 나는 좋았지만 정작 그녀는 혼자서 이곳에 남아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냥 호텔 마사지도 받고 산책도 좀 했어.”
“그래?”
“촬영은 잘 했어?”
“응. 뭐. 평소랑 다를 건 없지.”
DITTO 영화가 굉장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그녀는 촬영과 더불어 최소한의 행사들만을 소화한 뒤 내게로 와주었다. 그리고 이는 그녀 스스로에게도 신체적으로 굉장히 무리가 된 선택임이 틀림없었다.
“피로는 풀렸어?”
“마사지도 받고 아까 스파도 좀 했어. 그래서 어느 정도는 풀렸어. 시차는 아직이고.”
“마사지는 좋았어?”
“그렇게 좋진 않았어. 나쁘지도 않았고.”
“나 많이 보고 싶었어?”
“많이 보고... 뭐?”
아싸. 개 이득.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자니, 왠지 모르게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듯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촬영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전념할 수 있는 대상이 생겼다는 점에서, 촬영 준비에 소홀히 할까 괜한 조바심이 들었지만 오히려 도움이 된 듯 해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한동안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실컷 나누었다.
되도록 시간이 될 때마다 전화를 자주하려고 했지만, 그녀와 나 둘 다 스케줄에 치여 고작해야 이삼일에 한번 씩 짧게 통화를 했던 게 전부였는지라, 나눌만한 얘기는 많았다. 뭐, 그런 얘깃거리가 없어도 그저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지만.
“한국에서는 난리던데. 여긴 엄청 조용하네.”
“난리?”
난리라는 말에 자연스레 반문하게 되었다. 무슨 난리? 촬영외의 것에 도외시하다 보니 주변 소식들에 무척이나 어두워져있었다. 나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그래서인지 난리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궁금증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너가 벌여놓은 것들.”
“아...”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을까.
“기사에 엄청 떴었어. 너 시상식 기사들 가라앉자마자.”
꿈 예술학교. 꿈 시네마 하우스. 라이브 카페.
일을 벌여놓고 신경을 꺼버린 사람이 바로 나란 사람이었다. 후우. 메일에 관리사님이 보고서 엄청 보냈을 텐데, 속 꽤나 썩히셨겠네. 내가 확인안 한 것 때문에.
사실 1월쯤 언론에 이 같은 사실이 새어나갈 것이기에, 이와 관련된 공식 발표도 1월 말쯤에 하기로 했었다. 다만 생각보다 이 소식들이 새어나가지 않아 공식 발표를 계속해서 늦췄을 뿐.
하긴 지금이 5월인데, 새어나가도 진작 새어나갔겠지.
“조... 이사님? 그 꿈 재단 이사라는 분이 직접 나와서 발표하시더라고.”
“관리사님 아니 이사님이 하셨다면 다 알아서 잘 하셨겠지.”
“학교도 그렇고 극장도 그렇고 다 네 생각이야?”
“응?”
워낙 일을 스케일 넘치게 벌여놓다 보니, 저 모든 일들을 내가 그것도 즉흥적으로 벌여놓았단 말을 선뜻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뿐.
조만간, 아니 내일 당장 관리사님에게 전화나 해봐야겠다. 지금 당장은,
“읏차.”
“에? 뭐야. 내려놔.”
“안마 해줄게. 드러누워 있으세요. 아가씨.”
눈앞에 있는 게 무척이나 시급했으니까.
“하아...”
“시원해? 어깨가 많이 뭉쳤네. 마사지 진짜 별로였나 보다.”
나름의 사심도 채우고 그녀의 피로도 풀어주고 싶어, 그녀를 안아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어깨와 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물론 손이 마냥 어깨와 등에만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시원해?”
“하아...”
“시원한가보네. 잠깐만 옷 좀,”
“하아... 뭐?”
“어허. 가만히 누워있어. 피로 싹 풀리게 해줄게.”
원피스를 입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것도 드러나는 거지만 단번에 벗기기가 너무 쉬웠으니까.
아! 오해는 금지. 어디까지나 그녀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옷을 잠시 벗긴 것뿐이다. 진심.
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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